# 54
그림 그리는 마법사 - 54회
곧 웨이터가 음식을 한 가지씩 가져오기 시작했다.
비주얼마저 고급스러워 보이는 애피타이저와 연어, 자연산 송이버섯구이 등 고급 식재료를 쓴 애피타이저가 나와 입맛을 돋우었다.
김주하가 송이버섯구이를 한 점 오물거리며 먹고서 입을 열었다.
“팔공산에서 가져오는 송이버섯이래요. 육질도 쫄깃하고 향이 강하죠?”
“음, 그러네. 뭔가 솔향이 솔솔 나는 게 신선하다.”
“저기 강수오빠.”
“어?”
“실은 오빠한테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요.”
“부탁? 뭔데?”
“오빠가 그려준 내 초상화를 할아버지가 봤거든요. 오빠 그림 실력이 굉장히 좋다고 칭찬을 하셨어요.”
“하하. 그래?”
“할아버지가 미술품도 꽤 수집하세요. 초상화를 보고서 오빠가 유화도 잘 그리는지 궁금하시대요. 그래서 이번엔 유화로 초상화 한 점 부탁 하려고요. 그림값은 줄게요.”
“유화로? 그림값을 주겠다고?”
“그림은 잘 모르지만, 유화는 간단하게 그릴 수 없잖아요. 당연히 사례해야죠.”
아크릴도 아니고 유화 초상화는 주하 말대로 단시간에 완성할 수 없었다. 물감이 마르는 시간이 필요해서 단계별로 공을 들여야 제대로 된 그림이 나온다.
경포대에서 주하와 임해영을 앞에 세워 놓고 연필 초상화를 그릴 때 두 사람의 표정과 감정을 초상화에 담아냈던 느낌이 나름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연필 초상화는 표현의 제약이 명확해서 조금 아쉽기도 했었다.
아트페어 출품작을 끝내서 시간은 많았다.
유화로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제안에 구미가 당겼다. 그렇다고 연필 초상화처럼 그냥 그려줄 수는 없었다.
그림값을 받는 것이 옳다.
자신의 그림은 ‘한국청년화가 12인전’에서 4백만 원에 팔렸다. 유화로 초상화를 그려준다면 그 정도는 받아야 한다.
부자라고 해도 20호 초상화 한 점에 4백만 원을 선뜻 지급할 사람은 많지 않다.
먼저 그림값을 제시해 보았다.
“물감으로 그리면 그림 한 점이 사백은 하거든. 물론 좀 싸게 그려 줄 수는 있지만 말이지.”
초상화 값이 4백만 원이라는 말에 옆에 앉은 임해영이 살짝 놀란 듯 강수를 힐끗 쳐다보았다.
반면 김주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사백이면 돼요? 더 받아야 하는 거 아녜요?”
“뭐?”
농담처럼 가볍게 던지는 주하의 말에 강수가 주하의 얼굴을 보았다. 주하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더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집이 얼마나 부자인 거야?’
4백만 원을 일말의 고민도 없어 받아들이는 것을 보니 보통 부잣집 딸내미가 아니었다.
강수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하하. 더 받으면 나야 좋지만 사백이면 적당한 가격이야.”
“그럼 그려주는 거죠?”
“좋아. 지금 여유가 있어서 초상화 그리는 것이야 어렵지 않지. 한데 유화로 초상화 그리려면 네가 모델을 몇 번 서야 할 텐데?”
“서면 되죠? 그게 뭐 어렵나요?”
“작업할 공간도 있어야 해. 내 작업실은 내가 사는 아파트 거실을 사용하고 있어서 네가 좀 불편할 텐데 괜찮겠어?”
“해영 언니하고 같이 가니까 상관없어요.”
‘같이 온다고? 이웃집 언니라고 하더니 아예 붙어 다니네? 뭐지?’
순간적으로 떠오른 의문을 접고 강수가 말했다.
“그러면 월요일, 금요일 일주일에 두 번, 2주 동안 그리는 거로 하자. 시간은 오후 2시에서 4시까지.”
“좋아요. 다음 주 월요일부터 가겠어요.”
전채요리로 나온 정성을 들인 음식를 한 점 집어 먹은 강수는 임해영을 슬쩍 쳐다보았다.
강수는 주하와 임해영의 관계에 의구심이 들었다.
실은 경포대에서도 이상한 느낌을 받았었다.
임해영은 주하의 말에 따르거나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스스로 대화를 주도하지 않았고, 묻는 말에만 사무적인 말투로 대답할 뿐이었다. 또한, 자신에 관해서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이웃집 친한 언니가 아니라 보호자 같았다.
둘의 관계가 궁금해진 강수가 조용히 음식만 먹는 임해영에게 말을 걸었다.
“저, 해영 씨는 무슨 일을 하십니까? 혹시 모델 일 하나요?”
고개를 들어 강수를 본 임해영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람 경호하는 일 해요.”
“아, 경호원이요? 어쩐지 몸이 예사롭지 않다 했습니다. 운동을 많이 했나 보군요.”
“예, 운동 좋아해요. 대학도 체육학과 나왔죠. 사실 지금 업무 중이에요.”
“예?”
잠시 임해영의 얼굴을 바라보던 강수가 탄성을 질렀다.
“어? 그럼.”
“김주하 아가씨가 제 고객이죠.”
짐작은 했지만, 농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던 강수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앗, 그렇습니까? 하하. 보호자 같다는 느낌이 들긴 했는데 해영 씨가 주하의 경호원이라니. 짐작도 못 했습니다.”
‘경호원? 주하를 왜 경호하지?’
김주하가 팔로 장난스러운 포즈를 취하며 말했다.
“헤헤. 해영 언니가 한 무술 해요. 실은 어차피 알게 될 사실이라 밥 먹고 얘기해주려고 했어요.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랬구나. 그럼 경포대에서는 왜?”
“경포대에서 일부러 오빠를 속이려는 건 아녔어요. 생각해 봐요. 해영 언니를 제 경호원이라고 하면 오빠하고 노는 게 어색하고 불편했을 거예요. 그래서 이웃집 언니라고 한 것뿐이에요.”
강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렇긴 하네.”
김주하가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는지 강수의 배를 가리켰다.
“저번에 경포대에서 봤을 때 오빠 몸도 장난 아니더라. 배에 복근도 선명하고, 무슨 운동을 했어요? 헬스 한 몸은 아닌 것 같은데.”
“운동? 난···.”
본래 몸이 좋긴 했지만, 지금처럼 군더더기 없고 잔 근육이 발달한 균형 잡힌 몸은 아니었다. 몸이 갑자기 변한 이유가 있다면 달리기와 마나수련을 한 것밖에는 없다.
강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둘러댔다.
“푸쉬업이랑 등산, 달리기를 해 왔어.”
“푸쉬업, 등산, 달리기요? 그런 운동으로도 근육질 몸이 될 수 있구나.”
의심 없이 믿어버리는 김주하다. 임해영은 둘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차분하게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
“참, 설악산에서 무슨 작업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트페어 상하이에 출품할 작품을 그리고 있었어.”
“아트페어 상하이요?”
“간단히 말하면 대형 전시 공간에서 삼사일 동안 미술품을 판매하는 커다란 미술시장이야. 10월에 상하이에서 열리지.”
“신청만 하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거예요?”
강수는 김주하가 미술에 별로 관심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트페어마다 다르긴 하지만 역사가 있고, 명성이 높은 아트페어는 주최 측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갤러리와 작가를 선정해. 그래야 수준 있는 아트페어가 되고, 작품도 많이 팔리고 수익을 낼 수 있으니까. 아트페어 상하이는 제법 명성이 높은 편이지.”
“어머, 그럼 강수오빠도 유명한 작가인 거네요?”
강수가 멋쩍게 웃었다.
“아니, 그렇진 않고. 운이 좋아서 참가하게 된 거야.”
“호오, 그래요?”
우우웅!
이때, 강수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응? 박해나 씨네?’
“전화 좀 받아도 될까?”
“네. 물론이죠.”
강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며 통화를 연결했다.
“안녕하세요? 해나 씨?”
[네. 강수 씨, 잘 지냈죠? 갤러리윤에 들렀다가 강수 씨 작품 봤어요. 색감이 풍부하고 깊을 뿐만 아니라 몽환적인 분위기는 고흐와 모네의 그림을 섞어 놓은 것 같아요. 어떻게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죠? 놀랍네요.]
“하하, 해나 씨가 괜찮다니 기분이 좋은데요? 해나 씨는 출품작 끝냈나요?”
[저는 아직 작업 중이에요. 마감에 쫓기는 기분이죠.]
“아직 시간 많으니까요.”
[강수 씨는 상하이에 참관하러 갈 건가요?]
“아, 그거 어떻게 해야 하죠? 참석해야 하는 건가요? 아니면 안 가도 되나요?”
[아트페어 참관 여부는 작가 맘이죠. 갤러리윤에서 강요하지는 않아요.]
아트페어 상하이는 세계 정상급 갤러리와 작가가 참여하는 대규모 행사다. 당연히 참관해서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 경향과 미술계의 흐름을 몸으로 느껴보는 것이 필요했다.
“다른 작가의 작품을 살펴볼 수 있으니 참관해야겠네요.”
[참관할 거면 삼사일 안으로 갤러리윤에 통보해주세요. 티켓팅과 호텔 예약을 여행사와 계약해서 대행해준다고 했어요.]
“알겠습니다. 잘됐네요. 바로 연락하죠.”
전화를 끊은 강수는 갤러리윤에 전화해서 아트페어 상하이에 참관한다고 통보하고, 4박 5일의 경비를 해당 여행사로 보냈다.
강수가 자리로 돌아가 앉으며 양해를 구했다.
“미안. 갑자기 처리할 일이 생겨서 통화가 길어졌네.”
김주하가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통화를 꽤 길게 했네요? 여자분인 거 같은데 애인인가 봐요?”
“응? 애인은 아니고 아트페어 상하이 참관 때문에 통화가 길어진 거야.”
“아, 아트페어 상하이가 언제 개막하는데요?”
“10월 15일.”
임해영이 주하를 곁눈질로 슬쩍 살폈다.
이강수에게 관심을 보이는 듯한 말투와 이강수의 통화에 관해 묻는 김주하의 질문이 의외였기 때문이다.
이강수가 호감 있는 인상에 그런대로 미남이고 체격도 운동으로 단련된 것처럼 탄탄하긴 했지만, 김주하의 관심을 끌 정도의 상대는 아니라고 여겼다.
‘내가 잘못 판단했나?’
임해영은 멍게를 한 점 집어 먹었다.
쌉싸름하고 상쾌한 바닷냄새가 산뜻하게 입안에서 감돌았다.
‘이런 맛?’
특별한 장소에서 자라 자신만의 개성과 독특한 풍미를 가진 멍게처럼.
이강수에게 그런 특이한 매력을 느꼈을 수도 있다.
‘주하가 만난 남자들이 대부분 가볍고 속물적이라 어쩌면 강수 씨의 예술적인 면에 끌렸을 수도 있겠구나.’
잡담을 나누는 사이 드디어 겉이 노릇하게 갈색으로 구워진 스테이크가 나왔다. 소스 대신 소금과후추, 올리브오일이 뿌려진 스테이크였다.
“고기는 와인하고 먹어야 좋다고 해요. 와인 한잔 할래요?”
“차를 가져왔으니까 안 마셔야 하는데 입가심만 하게 조금만 줄래.”
주하가 레드 와인을 정말 조금 따라주었다.
강수는 스테이크를 썰어서 한 점 입에 넣고 맛을 음미했다.
두툼한 스테이크는 입안에서 부드럽게 씹혔고, 감칠맛과 고소한 맛이 어우러졌다. 풍부한 육질은 소금과 섞이면서 고기 본연의 깊은 맛을 선사한다.
더욱이 스테이크를 먹은 후 마시는 한 모금의 레드 와인은 고기의 과도한 맛과 입에 남아 있는 육질의 느낌을 깨끗하게 없애주었다.
‘비싼 만큼 맛은 있구나. 그렇다고는 해도 드럽게 비싸네.’
전채요리부터 메인 스테이크, 후식까지 음식은 맛있고 마음에 들었으나 한 끼 식사비로 23만 원은 지나친 호사가 아닐 수 없었다.
“어땠어요? 요리는 입맛에 맞았어요?”
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너무 비싼 점심이라 맛없으면 주방장한테 한소리 하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겠다. 맛있게 잘 먹었어.”
“뭐라고 말하려고요?”
“그야 요리 좀 제대로 하라고.”
“킥킥. 잘못했으면 셰프가 곤욕 치를 뻔했군요?”
“후후, 그랬을걸. 이제 일어날 때가 됐지?”
“그래요. 이제 일어나요.”
후식까지 만족스러운 식사를 끝낸 강수는 주하와 월요일에 보기로 하고 헤어졌다.
*
주하와 헤어진 강수는 그림 재료를 사기 위해 죽산화방을 들렀다.
마야홀 시리즈d 24색 유화물감과 붓, 기름통, 팔레트, 오일, 건조제, 인물 20호 캔버스 2개 등 필요한 재료를 전부 샀다.
학부시절에는 유화를 자주 그렸다.
졸업한 후에는 일러스트에 집중하면서 아크릴물감을 주로 사용했으나 유화의 감각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랜만에 유화 물감을 사용해야 하니 실험 삼아 인물화를 그려보기로 했다.
강수는 컴퓨터를 켜고 테스트할 여자 얼굴을 찾았다.
‘누가 좋을까?’
기왕이면 주하와 비슷한 이미지의 여성이 좋을 것이다.
여자 연예인을 찾아보던 강수는 적당한 얼굴을 발견하고 32인치 모니터에 얼굴을 확대했다.
모니터에 나타난 얼굴은 5인조 걸그룹 ‘핑크티티’의 세나.
강수는 잘 알지 못하는 걸그룹이다. ‘핑크티티’의 노래가 한 곡도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 뜨지 못한 수많은 걸그룹 가운데 하나 같았다.
세나는 깜찍한 고양이상 얼굴에 큰 눈, 장난기 있는 입술이 주하의 이미지와 비슷했다. 모델은 골랐지만 제소를 칠해 놓은 캔버스가 마르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강수는 이젤에 캔버스를 걸어놓고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 이런저런 기사를 클릭해서 읽어보았다.
연예기사 가운데 ‘몬스터를 막아라’ 관련 기사가 있어서 클릭했다.
‘몬스터를 막아라가 벌써 촬영 들어갔구나.’
윤상일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몬스터를 막아라’는 보름 전에 크랭크인 했고, 순조롭게 촬영 중이었다.
‘몬스터를 막아라’는 밀폐된 실험실에서 변종바이러스를 연구하던 연구원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몬스터로 변해버린 이야기를 다룬 영화였다.
제작발표회에서 주, 조연 배우와 배우가 맡은 배역이 소개되었으나 줄거리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없었다. 촬영기간은 4개월이고, 후반작업까지 제작기간은 7개월로 내년 4월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후후, 내년 4월에 스크린에서 종희를 볼 수 있겠구나. 빨리 개봉하면 좋겠다.’
강수가 종희와 헤어지긴 했지만 종희와 지냈던 추억과 기억이 잊힐 리는 없었다. 비록 아련한 살의 감촉과 몸에서 맡았던 향기와 격정적인 감정은 희미해지고 언젠가는 사라질 테지만 말이다.
제소가 마른 것을 확인한 강수는 모니터를 세로로 세우고 세나의 얼굴을 띄웠다. 매력적이고 예쁜 얼굴이 모니터를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