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53화 (53/197)

# 53

그림 그리는 마법사 - 53회

실내에서 50대의 가정부로 보이는 통통한 여인이 웃으며 주하를 맞이했다.

“아가씨, 어서 오세요.”

“한 실장님은 어디 있죠?”

“회장님 서재에 계실 건데요.”

“저를 찾으셨습니까?”

마침 50대 후반의 중년인, 회색 정장을 한 한동제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거실로 나왔다.

“아, 잘됐다. 이거 액자 좀 부탁해요. 액자는 심플한 걸로 하세요.”

김주하가 박스를 한동제에게 내밀었다.

박스를 열어 안에 든 물건을 확인한 한동제의 눈에서 이채가 스쳤다.

“호오, 아가씨 초상화군요. 알겠습니다. 심플한 액자에 넣어서 드리죠.”

“아니다. 액자는 사진 찍어서 보내세요. 내가 고를 테니까.”

“그러죠.”

한동제는 2층으로 올라가는 주하를 미소 띤 얼굴로 지켜본 후, 회장이 있는 서재로 갔다.

똑똑!

“회장님, 한 실장입니다.”

안에서 희미하지만 저음의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와.”

한동제가 안으로 들어갔다.

15평 정도 넓이의 서재는 별다른 장식 없이 단순한 구조였음에도 불구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났다.

실내 중앙에는 가죽 소파와 탁자가 놓여 있고, 오른쪽 벽의 책장에는 고서를 비롯해 수많은 책이 꽂혀 있었다. 실내 왼쪽 벽에는 매화와 항아리, 새가 그려진 김환기 화백의 작품이 정중앙에 걸려 있고, 그 양 옆에는 예사롭지 않은 남녀 인물 조각상 두 점이 서 있었다.

서재의 창문 앞, 의자에 앉은 노인이 정원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노인의 이름은 김대풍.

올해 나이 78세.

그는 서울과 부산에 이십여 개의 빌딩을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 갑부였다.

김대풍이 의자를 돌려 한동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몸집이 크고 풍채가 좋았는데 얼굴은 78세의 나이답지 않게 젊었으나 피부가 건조하게 메말라 있어 뭔가 힘에 겨운 듯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몸에서는 오랫동안 사람 위에 군림하며 몸에 밴 위엄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회장님, 주하 아가씨의 심부름으로 잠시 외출하고 오겠습니다.”

김대풍의 입에서 굵고 저음의 연륜이 느껴지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주하 심부름? 그게 뭔가?”

“주하 아가씨를 그린 초상화를 액자로 만들어 달라는 심부름입니다.”

“초상화? 어디 봐.”

한동제가 박스에서 초상화를 꺼내 김대풍에게 건네주었다.

초상화를 받아 든 손은 두툼했지만, 피부는 퇴색했고 탄력을 잃었다.

“연필 초상화로군.”

초상화를 감상하던 김대풍이 문득,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후후, 시간은 거스를 수가 없구나. 몸은 늙어가는데 억만금을 가지고 있어도 젊음을 살 수가 없으니···.”

김대풍의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은 한동제가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쯔즛, 그 많은 돈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자식이 하나도 없으니 미련이 많으시겠지.’

속으로 김대풍을 불쌍히 여겼으나 한동제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김대풍이 말했다.

“한 실장, 이 초상화, 자네가 보기엔 어때?”

“제가 보기에 실력 있는 화가의 솜씨 같습니다.”

“그렇지? 예사 솜씨가 아니야. 누가 그렸는지 궁금하군. 가서 주하 좀 불러와.”

“예.”

즉각 밖으로 나간 한동제가 주하와 다시 서재로 들어왔다.

“할아버지, 부르셨어요?”

“그래. 네 초상화가 썩 마음에 드는구나. 누가 그렸느냐?”

“헤헤, 제 초상화 보셨네요? 이강수라는 화가가 그려줬어요.”

“이강수?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구나. 이강수는 어떻게 알게 됐느냐?”

“경포대 놀러 갔다가 해수욕장에서 만났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화가지 뭐예요. 재미 삼아 초상화 그려달라고 하니까 즉석에서 그려준 거예요. 어때요? 잘 그렸죠?”

“그래, 무척 잘 그렸지. 한데 이 초상화를 액자로 하기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 안 드니?”

“예? 뭐가 부족해요?”

“연필로만 그렸어도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그림이 생생한데 초상화에 물감을 입히면 얼마나 아름답겠느냐?”

“아, 맞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고마워요, 할아버지. 강수오빠한테 연락해서 물감으로 그려달라고 해야겠어요.”

“오빠라고? 이강수의 나이가 몇인데 오빠라고 부르는 게야?”

“헤헤, 스물아홉이래요. 그림 주세요.”

김대풍이 초상화를 한동제에게 넘겨주었다.

한동제가 그림을 받아 주하에게 건네주려는데 초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한 김대풍이 다시 주하를 불렀다.

“주하야, 그 초상화에 물감을 입히면 좀 아깝지 않을까?”

“예?”

한동제와 김주하가 무슨 소리냐는 얼굴을 하고 김대풍을 바라보았다.

“뭐가 아까워요? 초상화에 물감칠하는 게 더 낫다면서요?”

“연필 초상화는 그것대로 가치가 있으니 물감을 입힐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그냥 유화로 한 점 그려달라고 하거라. 이강수라는 친구가 연필 초상화만큼이나 유화도 잘 그리는지 실력을 보고 싶구나.”

“아, 그렇네. 호호. 알았어요. 한 실장님, 초상화는 액자 부탁해요.”

주하는 재빨리 서재를 빠져나오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에이, 참.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면 될 걸 왜 이랬다저랬다 해서 헷갈리게 하고 그래? 사람 무안하게. 하여튼 할아버지 성격은 알아줘야 해. 근데 할아버지가 관심을 보일 정도로 대단한 초상화였나?’

주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2층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

북한산에 올라가 마나회로 수련을 끝내고 아파트로 돌아온 강수는 갤러리윤에 보낼 다섯 작품을 작업실에 쭉 펼쳐 놓았다.

포장하기 전에 작품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동행, 40호. 캔버스 사이즈는 110*65cm.

자갈이 깔린 물 빠진 해변, 뒤의 배경은 바다가 아스라이 펼쳐져 있고, 소쿠리를 머리에 인 할머니가 포구를 향해 해변을 걷고 있다. 그리고 소쿠리 위에는 물새 한 마리가 할머니와 함께 길을 가듯이 날고 있다.

동행은 서해 섬으로 그림 소재를 찾으러 갔을 때 우연히 건진 작품이다. 섬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다가 오후 늦게 물이 빠진 바닷가에서 소쿠리를 머리에 이고 가는 할머니를 발견하고 셔터를 눌렀다.

나중에 민박집에서 사진을 확인해보니 소쿠리 위에서 물새가 비행하고 있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물새가 할머니 머리 위를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우연한 장면이 강수의 가슴에 진한 울림을 선사했고, 작품으로 탄생했다.

달이 있는 동네는 산동네에 뜬, 상현달로 변해가는 초승달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달의 크기를 화면의 절반을 차지하게 극단적으로 크게 그렸다.

내 안에 크는 섬은 하늘과 바다의 경계조차 모호한 지점에서 형태마저 흐릿하게 지워져 가는 하나의 섬을 그린 작품이다. 섬에는 앙상하게 메마른 한 그루의 나무와 그 위에 앉아 있는 작은 새 한 마리, 하얀 바위와 그 옆에서 자라는 관목을 그렸다.

서울에서 살며 느낀 고독과 외로움을 표현한 작품이다.

기억의 끝은 유년의 아련한 기억 한 자락, 팔랑리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노는 아이들을 그렸다.

다섯 작품의 공통점이라면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색조와 색감이 화면을 지배하는 작품이란 점이다.

작품 하나하나 강수가 의도했던 색감과 분위기, 느낌을 주었다. 특히 물감을 섞어 만든 색이 풍부한 색조를 띠었고, 독특한 분위기와 섬세한 표현을 담아냈다.

강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보기엔 전부 괜찮은데 아트페어에서 어떤 평을 받을까?’

아트페어는 수많은 작가의 다양한 작품이 집합해서 경쟁하는 미술 시장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오브제와 파격적이고 다양한 설치미술, 혁신적인 방식으로 제작한 미술품이 쏟아져 나오는 세계 미술의 흐름 속에서 순수회화인 자신의 작품이 얼마나 대중의 호응을 받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관람객의 평가가 어떻든 이 정도면 됐어.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 표현하고 싶은 감정을 담았으니 만족해. 관람객이 지갑을 열고 내 그림을 구입한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건 희망사항이겠지.’

강수는 작품이 손상되지 않게 에어캡으로 완벽하게 포장한 후, 용달을 불러 갤러리윤에 작품을 보냈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꺼내 갤러리윤 수석 큐레이터 김이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에서 사무적인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갤러리윤 김이라입니다.]

“안녕하세요. 이강수입니다.”

[네, 말씀하세요.]

“아트페어 상하이에 출품할 다섯 작품을 방금 용달로 보냈습니다. 약 1시간 정도 후면 도착할 겁니다.”

[생각보다 작품을 빨리 보냈군요. 고마워요. 그림을 수령하고 나서 연락 하겠어요.]

“네, 수고하세요”

드디어 목전에 닥친 가장 큰 작업을 일단락했다.

작품이 자신의 품을 떠났으니 이제 평가는 전적으로 관람객의 몫이다.

‘과연 몇 작품이나 팔릴까?’

사실 아트페어는 2000년대 들어 유행처럼 번져나가 수많은 도시에서 개최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아트페어가 성행하면서 아트페어는 미술품을 판매하는 대표적인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모든 아트페어가 성공하지는 못한다.

시즌마다 새로운 아트페어가 열렸다가도 대중의 무관심 속에 허망하게 사라지는 아트페어가 부지기수다. 허울 좋은 아트페어에 참가해 봐야 작품은 팔리지 않고, 참가비만 깨지는 것이다.

또한, 아트페어 홍수 속에서 신생 아트페어는 명망 높은 갤러리를 유치하기 위해 공을 들이지만, 프리미엄 아트페어의 경우는 그와 반대로 부스를 차지하기 위한 갤러리의 경쟁이 치열하다. 특히 전 세계 유수의 갤러리가 참여하는 최고의 아트페어의 하나인 ‘아트 바젤’의 경우 전시자 표찰을 받으려면 선정위원회의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아트페어 상하이는 아트 베이징과 함께 유수의 갤러리와 명망 있는 작가가 참여하며 급성장하고 있었다.

전 세계의 유명 작가가 참여한 아트페어에서 자신의 작품이 어떤 평가를 받고 몇 점이나 팔릴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후, 몇 주 후에나 판매 결과가 나올 텐데 벌써 설레네?’

강수는 실소를 지으며 엘리베이터 홀로 걸어갔다.

우우웅!

이때,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어? 김주하네? 설마 밥을 사겠다고 전화 한 건가?’

“여보세요? 이강수입니다.”

[강수오빠, 저 주하에요. 기억나요?]

“하하. 초상화까지 그려준 미인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어? 당연히 기억나지.”

[호호, 그럼 내가 밥 사겠다고 한 것도 기억하겠네요?]

“그것도 기억나지. 그래서 밥 사려고 전화한 거야?”

[네. 약속했잖아요. 내일 점심에 시간 있어요?]

“마침 작업이 끝나서 시간은 많아.”

[호호. 그럼 내일 스카이파크 호텔 스카이라운지 레스토랑 퍼플뮤즈로 1시까지 오세요. 예약해 놓을 테니까 내 이름 대면 될 거예요.]

‘스카이파크 호텔? 거긴 최고로 비싼 곳인데?’

강수가 스카이파크 호텔을 가보지는 않았지만 비싸기로 치면 수위를 다투는 곳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강수가 의외라는 목소리로 말했다.

“스카이파크 호텔? 주하야, 거기 내가 듣기로 굉장히 비싼 곳이라 아무나 못 가거든. 무리하는 거 아니니?”

[호호. 허세 부리는 거 아니거든요. 내일 봐요.]

“어? 그래.”

김주하는 24살이라고 했다. 여동생 같은 주하에게 밥을 얻어먹을 생각은 없었으나 초상화를 그려주었고, 스스로 식당을 예약한다고 하니 계산은 상황 봐서 누가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휴, 얼굴도 몸매도 예쁜 애가 부잣집 딸? 헐, 세상 참 불공평하네?’

강수는 헛웃음을 삼키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

다음날.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남산 기슭에 있는 스카이파크 호텔에 도착한 강수는 주차요원에게 키를 건네주었다.

말로만 들었던 호텔에 처음 와 본 강수는 출입문을 향해 걸어가며 조경수가 잘 가꾸어진 주변 경치를 둘러보았다.

‘스카이라운지에 올라가면 전망이 볼만하겠구나.’

콘크리트 건물로 뒤덮인 도심에서 나무가 우거진 공원에 온 것만 같았다.

스카이라운지 퍼플뮤즈에 올라온 강수는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가의 테이블에 안내 받았다.

강수는 저 아래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쉽게도 창밖은 오늘따라 공기가 흐려서 시계가 좁았고 사물도 선명하지 않았다.

‘매연 때문인가?’

인기척 소리에 돌아보니 김주하와 임해영이 다가왔다.

김주하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목걸이에 가슴이 브이 자로 패인 심플한 디자인의 진보라 색의 반팔 원피스를 입었고, 임해영은 네이비 색 정장을 입었다. 기본적으로 몸매와 얼굴이 예쁘니 뭘 입어도 돋보이고 아름다웠다.

“안녕하세요?”

“예, 반갑습니다.”

임해영이 깍듯이 인사를 했고 강수는 미소로 답했다.

“강수오빠가 먼저 왔네.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 나도 방금 왔어.”

“날이 맑으면 멀리까지 볼 수 있는데 오늘따라 날도 흐리고 공기가 탁해서 경치가 별로인데요? 앉으세요.”

“그래.”

주하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오빠, 식사는 런치 정식 시켰는데 괜찮죠?”

“어? 괜찮고말고.”

점심이라지만 런치 정식은 23만 원에 육박하는 비싼 메뉴였다. 음식값은 자신이 계산해 볼까 생각해 본 강수였으나 얻어먹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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