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그림 그리는 마법사 - 52회
연예인들은 언론과 대중의 관심, 팬의 인기를 얻어 막대한 돈을 번다. 대중한테 잊히고 인기가 추락했다고 우울증에 걸려 자살까지 하는 연예인도 있지 않은가?
사실 언론이나 대중의 관심이 쏟아지고, 더불어 인기를 얻으면 돈은 알아서 굴러온다고 봐도 된다.
대중의 관심은 득실이 있지만, 실보다 득이 되면 됐지 우려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아파트에서 추락한 여성을 구했을 때 언론에 당당하게 내가 구했다고 나섰으면 어땠을까?’
그 당시만 해도 모자 추락과 등산복 남자 등이 포털 실시간검색 순위에 올랐었다. 그때 숨지 않고 언론에 나왔다면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초능력자로 명성을 떨칠 수도 있었을 텐데.’
자신의 마법은 트릭이 아니라 초능력과 똑같다.
초능력을 눈으로 확인한 시청자들은 열광할 것이고, 전 세계의 유일무이한 초능력자로 대중 앞에 화려하게 등장한다.
순식간에 전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초능력자로 명성을 날리면 간단하게 성공하지 않을까? 더구나 초능력자가 그림을 그린다? 그것도 미술평론가가 칭찬할 정도로 완성도 높은 그림을 그린다? 따질 것도 없이 초대박이지. 성공의 길을 눈앞에 두고 허튼짓하고 있었나?’
사실 강수가 지금까지 가장 걱정했던 것이 자랄인의 지구진입이었다.
자랄인의 지구진입을 배제하면 마법을 사용해서 성공은 빛과 같은 속도로 거머쥘 수가 있다.
초능력자로 명성과 인기를 얻으면 모르긴 해도 유명연예인처럼 사생활이 자유롭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점은 감수해야 할 부분이다.
여전히 우려되는 점이 있다면 자신의 능력에 관심을 갖게 될 각종 기관의 반응이다. 물론 마술사나 엔터데이너쯤으로 여기고 관여하지 않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어쨌든 전 세계 수많은 기관의 반응은 도저히 추측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안전을 생각한다면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힘을 갖추었을 때 움직이면 된다.
‘이제 자랄인이 지구에 오든 말든 상관하지도 말자. 그들을 상대하는 건 내가 아니라 경찰이나 군대일 테니까. 그리고 성공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경제적으로 빈곤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풍족하게 살지도 못했다. 당장 농사일로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편히 모시고 싶었다.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성공하고 싶었지만, 마법사가 된 지 아직 3개월도 안 됐다.
‘휴, 조금만 참자. 성공은 맘먹기에 달려 있으니까. 일이 년 더 못 참겠어?’
자신이 처한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고, 나름 자각한 강수는 불현듯 거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손만 뻗어도 산을 무너뜨리고 한 발만 내딛어도 한강을 훌쩍 건널 것 같았다.
비록 지금은 서울에 집 한 채 가지지 못한 신세일지라도 자신은 언제든지 거대한 부와 명성, 성공을 일궈낼 수 있는 마법사인 것이다.
자신의 마법은 스포츠 선수처럼 전성기가 지나면 상실하는 제한적인 능력이 아니다. 오히려 수련하면 할수록 날마다 성장하고 있는 차원이 다른 능력이다.
결국, 강수는 추락 사건이 있었을 때 대중 앞에 섣부르게 나대지 않고 조용히 지내온 것이 잘한 일이라고 자평했다.
어느덧 4시 10분 전이다.
무지개출판사에 5시까지 도착하려면 지금 출발해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진로에 대해 약간이나마 감을 잡은 강수는 후련하고 홀가분한 기분을 느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
“어서 오세요, 이 작가님.”
전수민이 사무실로 들어오는 강수를 환한 미소로 맞았다.
“전 대리님, 반갑습니다.”
“와, 이 작가님 못 본 사이 몸이 엄청 좋아졌네요? 운동하세요?”
“하하. 별다른 운동은 안 하고 등산하고 달리기만 했는데 이러네요.”
“달리기도 엄청난 운동이죠. 이 작가님처럼 저도 달리기 좀 해야 할까 봐요. 참, 벙어리 황구 죽돌이가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진입했어요. 축하드려요.”
“이게 다 편집기획팀이 애써준 덕분이죠. 인사가 늦었지만 제가 팀원들에게 근사한 곳에서 한번 쏘겠습니다. 전 대리님, 먹고 싶은 거 있으세요?”
“어머, 그럼 너무 고맙죠. 음, 저는 일식이 좋긴 한데.”
“그럼 일식집으로 정하죠. 말 나온 김에 오늘도 괜찮은데 전 대리님 시간 있으세요?”
“예, 저는 괜찮아요. 상배도 일식집 간다면 눈에 불을 켜고 따라올 걸요.”
“하하. 그럼 강 팀장님 시간만 확인하면 되겠군요?”
“네. 팀장님은 방금 온 손님하고 회의실에 계세요. 이쪽으로 오세요. 차는 뭐로 드릴까요?”
“커피면 돼요.”
강수와 전수민이 회의실로 들어갔다.
회의실에는 강승호와 깔끔한 정장 차림의 30대 사내가 일어나서 이강수를 맞았다.
“강 팀장님, 안녕하세요?”
“하하. 이 작가님, 오랜만에 보는군요. 이쪽으로 오시죠.”
30대 사내, 하상덕이 악수를 청했다.
“영화감독 하상덕입니다.”
“처음 뵙습니다. 이강수입니다.”
전수민이 강수 앞에 커피를 놓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하상덕이 강수에게 ‘벙어리 황구 죽돌이’ 그림책을 내밀었다.
“죽돌이 이야기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사인 좀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아, 예. 물론입니다.”
강수는 속지에 날짜와 ‘영화감독 하상덕님에게’라고 간단한 멘트를 적은 후 사인을 해서 돌려주었다.
“감사합니다.”
강승호가 본론을 꺼냈다.
“하 감독님, 벙어리 황구 죽돌이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조카한테 그림책을 읽어주면서 가족이 모두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영화 판권을 사고 싶습니다.”
“영화 판권료는 얼마를 생각하는지요?”
“물론 영화 판권료는 형편만 되면 최고로 쳐서 드리고 싶습니다. 일단 제 경력에 대해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하상덕은 한국영상원 영화연출과를 졸업하고 어린이 영화를 만들어 온 자신의 경력과 현재의 처지를 솔직하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 우리나라 영화계의 자금 투자는 스타 캐스팅과 상업성이 보장되는 영화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저예산영화나 독립영화, 실험영화는 오히려 과거보다 자금 조달이 더 어려워지고 있지요. 더구나 영화사가 아닌 개인이 투자회사나 투자자에게 제작비를 투자 받는 것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리 좋은 시놉시스라고 해도 리스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어린이용 가족영화를 한 편 제작하려면 저예산으로 만든다고 해도 최소 5억에서 10억이 필요합니다.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닙니다. 제가 제작한 두 편의 영화도 친인척에게 받은 투자금이 절반이나 될 정도였으니까요. 그래도 두 편의 영화는 어렵게 제작비를 마련해서 찍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래 제작하려 했던 키드수사대는 제작비 10억을 목표로 모금했고, 현재 2억을 조달했습니다. 이것을 죽돌이로 대체할 생각입니다. 제작비는 역시 10억이 목표입니다.”
강승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판권료는 제시하지 않고 자신의 경력과 어려운 처지만 늘어놓고 있었다.
“감독님 얘기는 잘 들었습니다. 한데 감독님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 뭐지요?”
“아, 예. 그래서 제가 이 작가님께 제안을 하나 하려고 합니다.”
“무슨 제안을 하겠다는 겁니까?”
“다시 말하지만 저는 두 편의 어린이 영화를 제작, 감독했고, 흥행하지는 못했지만, 손익분기점을 넘겼기 때문에 투자자에게 손해를 입히지도 않았습니다. 죽돌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 절대 실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말을 끊은 하상덕이 강수에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드리는 제안은 다름이 아니라 판권료를 영화 제작에 투자해 주셨으면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하상덕의 의도를 파악한 강승호가 말을 가로채며 버럭 짜증을 냈다.
“아니 판권을 구입하겠다고 하더니 결국 판권을 그냥 달라는 얘기나 다름없네요. 일단 판권료부터 밝히고 투자를 논하는 것이 순서 아닙니까?”
강승호의 반응을 예상했는지 하상덕은 그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예. 죄송합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강수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영화에 투자한다면 판권료는 얼마입니까?”
강수의 부드러운 미소에 하상덕의 얼굴에 화기가 돌았다.
“영화에 투자해 주신다면 판권료는 오천만 원입니다. 투자하지 않고 현금을 원하시면 제가 드릴 수 있는 금액은 이천오백만 원입니다.”
강승호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강수를 쳐다보았다.
현금으로 받는 것과 투자를 했을 때의 차이가 꽤 컸다. 다만 투자는 원금보장이 되지 않는 위험이 따른다.
강수는 조금 전 자신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자각을 통해 기존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하고 있었다. 처음과는 달리 영화판권으로 줄다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상대방이 얼마를 제시하든 그대로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강수의 이런 판단은 사고방식의 변화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무엇보다 돈은 당장 궁하지 않았다.
강수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감독님 영화에 판권료를 투자하겠습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강수의 대답에 두 사람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예?”
“아, 감사합니다.”
“감사는 제가 해야죠. 영화가 성공하면 제 수익이 늘어날 텐데요.”
사실 하상덕은 협상이 잘 안 되면 삼천에 플러스알파까지 예상하였다. 저예산영화를 제작한 경험상 ‘벙어리 황구 죽돌이’의 제작비를 회수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투자를 결정하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닌데 이 작가님은 뭔가 다르시네요. 영화 흥행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강승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작가 배짱이 굉장하군. 원래 저런 사람이었나? 역시 사람은 부딪쳐봐야 아는 거야.’
강승호가 파일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계약서는 준비했으니 작성하도록 하죠.”
“예.”
강수는 투자금 오천만 원 계약서에 사인하고 계약서 한 부를 받았다.
하상덕은 제작비 10억의 절반인 5억만 조달해도 제작에 들어갈 것이고, 그때 연락하겠다며 환한 미소를 지으며 경쾌한 걸음으로 사무실을 나갔다.
강수가 강 팀장에게 말했다.
“강 팀장님, 제가 오늘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시간 있습니까?”
“예에? 저녁을 이 작가님이 산다고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장님께서 이 작가님께 식사 대접 한번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녁은 제가 사야죠.”
“강 팀장님, 벙어리 황구 죽돌이를 창작하는데 편집기획팀의 도움을 많이 받아서 제가 팀원에게 한턱내려는 겁니다. 오늘은 저한테 양보하시죠.”
“아, 우리 팀원한테 쏘는 거군요. 알겠습니다. 그 대신 다음엔 제가 좋은 데로 모시겠습니다.”
강수와 편집기획팀원은 6시경 출판사를 나와 고급 일식집을 찾아갔다.
네 사람은 스페셜 디너와 추가 회까지 단품으로 시켜가며 실컷 회를 즐긴 후 헤어졌다.
*
짙은 자주색의 랜드로버 레인지로버가 한남동 주택가의 골목길로 진입했다. 차는 담장으로 둘러싸인 단독주택의 주차장 앞에 섰다.
곧 주차장 문이 천천히 열렸고 차는 안으로 들어갔다.
주차장은 의외로 넓었는데 주차구획이 10개였고, 네 대의 차량이 주차해 있었다.
빈 곳에 주차한 차량에서 두 여인이 내렸다.
바로 김주하와 임해영이었다.
조수석에서 내린 김주하가 임해영에게 말했다.
“수고했어요. 이제 퇴근해도 돼요.”
“예, 아가씨. 골프가방 갖다 놓고 퇴근하겠어요.”
“그러세요.”
트렁크를 열고 골프가방을 꺼낸 임해영이 구석에 있는 박스를 발견하고 김주하를 불렀다.
“주하 아가씨, 잠시만요.”
계단을 올라가던 김주하가 멈춰서 임해영을 쳐다보았다.
“뭐죠?”
“여기 초상화 넣어둔 박스가 있네요? 아직 액자 하지 않았나 봐요?”
“아 참, 나 좀 봐. 깜박 잊고 있었네. 이리 주세요.”
골프가방을 어깨에 멘 임해영이 트렁크를 닫고 박스를 주하에게 주었다.
“해영 언니, 우리가 경포대에서 올라온 지 얼마나 됐지?”
“음, 2주는 넘었죠.”
“그럼 이강수도 올라왔겠네? 전화해 볼까? 아니면 전화 올 때까지 기다려?”
“왜요? 정말 밥을 사려고요?”
“글쎄, 산다고 했으니까 사야 하지 않을까요?”
싱긋 미소를 지은 김주하는 박스를 받아 들고 위로 올라갔다.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단독주택 부지는 굉장히 넓었다.
넓은 정원에는 나무와 아름다운 꽃, 진기한 수석이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했고, 한쪽은 약 30평 넓이의 잔디밭이 자리했다. 땅값만 백억 대가 넘을 것이다.
주하와 임해영은 2층에 테라스가 있는 현대적인 감각으로 지어진 3층 주택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