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그림 그리는 마법사 - 51회
빛나를 안은 하상덕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빛나야, 삼촌 보고 싶었어?”
“응. 보고 싶었어요.”
“얼마큼?”
빛나가 팔을 들어 머리 위에 원을 만들었다.
“이마안큼!”
“하하. 삼촌은 빛나 보다 열 배는 더 보고 싶었는데.”
“나도. 나도.”
하상덕은 빛나를 내려놓고 다가온 누나에게 물었다.
“매형은 아직 안 왔어?”
“오늘 회식이래. 술 한잔하고 오겠지. 넌 저녁 먹었니?”
“아니.”
“차려줄 테니까 먹고 가.”
“그러지 뭐.”
“빛나야, 외삼촌하고 놀고 있어. 엄마 밥 좀 차릴 테니까.”
“응, 알았어.”
빛나가 하상덕을 손을 잡고 소파로 끌었다.
“외삼촌, 그림책 읽어줘요.”
“그림책?”
“빛나가 요즘 매일 읽는 그림책이야. 밥 차릴 동안 네가 좀 읽어주고 있어라.”
“그래, 알았어.”
빛나가 그림책을 가져와 하상덕 옆에 앉았다.
“제목이 벙어리 황구 죽돌이네.”
“응, 황구 이름이 죽돌이야.”
빛나가 그림책을 펼쳤다.
“외삼촌, 여기부터 읽어주면 돼요.”
“어디 볼까?”
하상덕이 빛나가 가리키는 부분을 읽기 시작했다.
-종구 아빠와 대머리 아저씨는 차에서 커다란 종이박스를 꺼냈습니다.
-박스가 무거웠는지 종구 아빠와 대머리 아저씨는 낑낑대면서 종이박스를 마당에 들고 와서 바닥에 내려놓았지요.
-종구 아빠가 인사를 했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머리 아저씨가 말했어요.
“아니야. 불쌍한 황구를 맡아서 키워주는데 내가 더 고맙다네. 마음의 상처가 깊은 녀석이니까 잘 보살펴주게나.”
“예. 신경 많이 쓰겠습니다.”
“그럼 난 가 보겠네.”
-마당에서 황구를 기다리고 있던 종구가 아빠한테 쪼르르 달려갔어요.
“아빠, 황구는 어디 있어요?”
“황구는 바로 이 상자 안에 있단다.”
“여기요?”
-종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종이박스를 바라보았어요. 종이박스를 만져보고, 귀도 바싹 대 보았어요.
-종구는 종이박스 안에서 숨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어요.
“와, 이 안에 있구나!”
하상덕은 빛나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면서 가슴이 살짝 뛰는 기분을 느꼈다. 그의 뇌리에는 이야기와 그림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이때, 하상덕의 누나인 하미영이 주방에서 소리쳤다.
“상덕아, 밥 먹어.”
“외삼촌, 엄마가 밥 먹으래요.”
“응? 아, 그래. 빛나야, 잠깐 기다려. 외삼촌은 밥 좀 먹을게.”
하상덕은 주방으로 가 식탁에 앉으며 물었다.
“누나, 이 그림책 어디 책방에서 샀어?”
“그건 왜 물어?”
“참고할 게 있어서 나도 사려고.”
“동네 책방에서는 안 팔아. 인터넷이나 대형서점으로 가야지.”
“아, 당장 필요한데. 할 수 없네. 스마트폰으로 찍어 가야지.”
하상덕은 미역국에 밥을 말아 물 마시듯이 후루룩 해치우고 일어났다.
“상덕아, 무슨 밥을 그렇게 먹니? 그렇게 먹으면 속 버린다.”
“알어. 지금 할 일이 생겨서 그래.”
거실로 나온 하상덕은 빛나에게 남은 이야기를 읽어준 후 눈빛을 빛내며 결론을 내렸다.
‘에피소드를 몇 가지 추가해서 살만 더 붙이면 영화로 만들기엔 최적의 이야기다. 판권을 사야 해.’
‘벙어리 황구 죽돌이’는 가족 영화가 보여줘야 할 미덕을 전부 가지고 있었다.
철창 안에서 고통 받는 벙어리 죽돌이. 죽돌이와 종구 가족의 만남. 철창 밖 새로운 세상을 동경하는 죽돌이, 종구집에서 나가 동네 개들에게 짖는 법을 배우고, 암컷을 만나 사랑하는 죽돌이, 주인공 종구와 죽돌이의 우정과 모험, 사냥꾼의 등장, 죽돌이에게 닥친 위기와 극복, 죽돌이 새끼의 탄생과 미래에 대한 희망까지.
당장 시나리오를 쓰고 싶어 안달이 난 하상덕은 스마트폰으로 그림책을 전부 찍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하상덕은 소파에서 사과를 깎는 누나에게 말했다.
“누나, 나 간다.”
“사과 좀 먹고 가지?”
“아냐, 급하게 볼 일이 생겼어. 우리 이쁜이 빛나야, 외삼촌 또 올게.”
“응, 다음에도 죽돌이 읽어 줘.”
“그럼, 또 읽어주고말고.”
누나의 집에서 나와 방 두 칸짜리 자신의 빌라로 차를 몰고 달려온 하상덕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즉각 책상에 앉았다.
그의 뇌리에는 ‘벙어리 황구 죽돌이’의 시나리오로 꽉 차있었다.
하상덕은 시놉시스부터 써 내려갔다.
시놉시스는 ‘벙어리 황구 죽돌이’ 이야기를 간략하게 요약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간단하게 시놉시스를 완성한 후, 등장인물의 성격과 외모의 특징을 정리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나리오의 얼개를 짜기 시작했다.
*
뽀로롱, 뽀로롱.
산새 소리만 간혹 들려오는 설악산의 인적이 끊긴 깊은 산중.
퍽! 퍽! 퍽! 퍽! 퍽!
무엇인가 연속으로 폭발하는 소리가 산중의 정적을 뒤흔들었다.
강수가 캐스팅한 아이스애로우가 연속으로 아름드리나무에 박히면서 난 소음이었다.
“하하. 연사 속도가 더 빨라졌네.”
강수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엔 블링크 연속 5회다.”
연속마법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데 자신의 몸이 이동하는 블링크는 다른 마법보다 더 어렵다. 머리에서 잡념을 비우고 정신을 집중한 강수는 속으로 마법수식을 영창하고 블링크를 캐스팅했다.
강수의 몸이 1m 앞으로 순간이동 했고, 다섯 번을 연속으로 이동했다. 순간이동 후 다음 순간이동까지 약 0.8초의 딜레이가 있었다.
이전에 비교하면 엄청나게 빨라진 속도였다.
“후, 성공했네. 마지막으로 점핑마법을 캐스팅해보자.”
강수는 얼마 전에 허공으로 솟구치는 점핑마법을 해석했다.
어떻게 보면 이동마법을 이용해 공중으로 이동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중력 때문인지 효율이 낮았다. 그에 반해 점핑마법은 효과적으로 1m를 점프할 수 있었다. 다만 연속 캐스팅은 딜레이 시간 때문에 할 수 없었다.
“점핑!”
캐스팅과 함께 강수의 몸이 1m 위로 쑥 솟구친 후 내려왔다.
“성공! 가만, 이거 5미터쯤 점프하면 어떻게 되는 거냐? 그냥 추락이네.”
5m는 만만하게 볼 높이가 아니다. 잘못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다.
“에이, 그땐 뭔가 방법이 있겠지.”
어차피 5m를 점프하려면 서클이 올라가야 하므로 지금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점핑마법을 몇 번 펼친 후 캐스팅 훈련을 끝낸 강수는 배낭을 챙겼다.
강수는 산짐승의 침입을 막기 위해 썩은 나무를 주위에 대충 쌓아 놓은 수련장소를 벗어나 하산하기 시작했다.
강수는 며칠 전부터 마나하트의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마나하트는 작은 조생귤 크기에서 더 커지지는 않았지만, 마나하트 둘레에 서클이 형성되고 있었다. 서클이 완전하게 형태를 갖추면 2서클 마나하트가 완성된다. 이제 2서클 마법사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2서클만 완성해도 치유마법을 쓸 수 있어. 이센셜아이를 쓸 때처럼 마나 소모가 심해서 정말 조심해야겠지만 어쨌든 한 번이라도 쓸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하위 마법사가 상위 마법을 쓸 수는 있다. 다만 마나 고갈로 인해 쇼크가 발생할 수 있다는 위험이 상존할 뿐이다.
강수는 3서클 마법인 치유마법이 효력이 어느 정도일지 무척 궁금했다.
아픈 사람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은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지고무상한 능력이다.
오죽했으면 종교계에서는 기적을 행한다고 말한다. 만약 우황청심환 같은 환약을 만들어서 치유마법을 인챈트하면 불법의료행위에 걸릴 일도 없이 고가에 팔 수도 있을 것이다.
마법에 관해 이런저런 염두를 굴리면서 산에서 마을로 내려온 강수는 스마트폰을 꺼내 매너모드를 해제했다.
문자가 2통 와 있었다.
‘누구지?’
문자를 확인해 보니 무지개출판사 강승호 팀장이 전화가 안 된다며 연락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강 팀장님이 무슨 일로?’
강수는 강승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작가님!]
“강 팀장님, 안녕하세요? 문자 하셨네요?”
[예. 하상덕이란 영화감독이 벙어리 황구 죽돌이 판권을 사겠다고 이 작가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전화했는데 연결이 안 돼서 문자 남겼습니다.]
“판권이요? 벙어리 황구 죽돌이를 영화로 만들겠다는 건가요?”
[그렇죠. 하상덕 감독이 얼마를 제시할지는 모르겠지만 최소 삼사천은 받을 수 있을 겁니다.]
“··· 삼, 사천만 원이요?”
[그렇죠. 그것도 최소로 잡은 겁니다. 베스트셀러 소설의 영화 판권이 보통 오천은 하니까요. 어떻습니까? 하상덕 감독을 만나봐야죠?]
생각지도 않았던 영화판권료는 공돈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서울로 달려가서 만나고 싶었지만, 아트페어 상하이 출품작부터 마무리를 지어야 속이 편할 것이다.
“물론 만나야죠. 다만 지금은 설악산 근처에서 작업 중이라 3일 뒤에나 시간이 날 것 같습니다.”
[아, 그럼 약속 날짜를 언제 잡을까요? 하상덕 감독이 빨리 만나고 싶어 해서요.]
‘저도 당장 만나고 싶네요.’
‘동행’의 작업 상황을 떠올린 강수가 대답했다.
“이틀 정도면 작업이 끝나니까 수요일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수요일 오후 5시쯤이면 괜찮겠네요.”
[그럼 수요일 5시에 약속 잡겠습니다. 계약서를 작성하려면 사무실이 나으니까 장소는 우리 출판사가 어떻습니까?]
“예, 그럼 저야 감사하죠.”
[알겠습니다. 그렇게 연락 하겠습니다. 아, 참. 그리고 ‘벙어리 황구 죽돌이’는 2쇄 인쇄 들어갔습니다. 인세는 오늘 중으로 입금될 예정입니다.]
“벌써 2쇄요?”
[하하. 베스트셀러에도 진입했고, 인터넷에서 구입한 독자들의 후기 평이 좋아서 판매 속도가 빨라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숲속 다람쥐 가족 못지않은 성적을 낼 것 같습니다. 그럼 수고하시고, 혹시 변동사항 있으면 연락 주십시오.]
“예에.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강수의 얼굴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겠는지 실룩거렸다.
“2쇄 인세에다 영화 판권이라고?”
돈이 들어오는 즐거운 소식을 두 가지나 전해 들은 강수는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하하. 이거 엄청난데? 그림동화책을 또 그려봐?”
흥이 절로 난 강수는 그림동화책 소재가 될 만한 이야기를 생각해보았다.
염두를 굴려도 마땅히 떠오르는 이야기가 없었다.
“아, 그릴만 한 이야기가 없네. 이래서 이야기 작가가 필요하구나. 에이, 동화는 천천히 생각하고 그림이나 마무리하자.”
강수는 이장님 댁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
수요일 오후 3시경.
아트페어 상하이에 출품할 작품을 전부 끝낸 강수는 서울 아파트로 돌아왔다. 아파트 실내로 들어와 보니 바닥은 예상한 대로 먼지가 수북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환기하기 전에 먼지를 먼저 쓸어내야겠는데.’
바닥에 내려앉은 먼지를 공중으로 다시 날리지 않고 깨끗하게 닦아내려면 물걸레질이 최고다.
마른걸레를 물에 적신 후, 엎드려서 걸레질하던 강수가 투덜댔다.
“청소마법 같은 게 있으면 좋겠구만. 마법주문 한방으로 청소를 끝낼 수가 있잖아?”
자랄 행성은 전쟁만 하고 있는지 실생활에서 쓸만한 마법은 별로 없고 죄다 전투와 관련된 마법이었다. 제국에서 마법사의 지위는 귀족에 버금간다. 마법사가 빗자루를 들거나 주방에서 요리할 일이 없다. 마법은 필요에 의해서 연구하고 개발한다.
‘하긴 자랄 행성은 오크가 무한 번식해서 골칫덩어리고, 들판과 산에는 온갖 괴수들이 바글댄다고 했지. 생존을 위해 방어나 공격마법이 발전할 수밖에 없었겠지···. 한데 나도 마법사잖아.’
물걸레질하며 생각해보니 자신은 마법사였다. 비록 1서클 마법사에 불과하지만 1서클 마법만 해도 현실에서는 사기적인 능력이 분명했다.
“아, 젠장!”
문득 바닥에 엎드려 물걸레질이나 하는 자신이 무척 한심하단 생각이 들었다.
‘뭐 하는 짓이냐? 인류 최초의 마법사인데. 1서클 마법 능력만 마음껏 펼쳐도 돈 버는 것이야 일도 아니고 구질구질하게 살지 않아도 되잖아?’
강수는 물걸레질을 끝내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자신이 왜 능력을 숨기고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처음엔 투팍탈의 경고 때문이었지.’
투팍탈은 자랄 행성의 캬미차야 제국이 차원이동마법진을 완성해서 자신을 추격해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캬미차야 제국이 지구로 진입해 온다면 자신이 투팍탈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느니 그들의 타깃이 된다.
‘내가 그들의 상대가 될 수는 없으니 조심했던 것인데···.’
하지만 투팍탈을 만난 지 벌써 다섯 달이 흘렀다.
자랄인의 평균신장과 체격은 투팍탈처럼 거구여서 지구로 진입해 오면 쉽사리 발각될 것이고, 뉴스와 포털에 도배되어 세상은 떠들썩할 것이다.
지금, 세상은 너무 조용했다.
‘자랄인의 지구진입을 너무 당연시한 게 아닐까? 어쩌면 투팍탈의 추격을 포기했을 수도 있고, 차원이동마법진을 완성 못 할 수도 있어. 설사 지구에 진입한다고 해도 경찰과 먼저 충돌하겠지? 정 안 되면 군대가 동원될 텐데 날 무슨 수로 찾을 수 있겠어?’
5개월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강수는 그동안 자신이 투팍탈의 경고 때문에 지나치게 신중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마나하트를 완성해 마법사가 된 지도 불과 두 달이 좀 지났을 뿐이고, 그림 작업에 치여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기도 했다.
또 한 가지 우려했던 점은 자신의 능력이 대중에게 공개되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두려운 감이 없지 않았다.
‘참나, 그게 뭐 대수라고? 바보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