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50화 (50/197)

# 50

그림 그리는 마법사 - 50회

일주일 전.

강수는 두 번째 작품을 끝내고 머리도 식히고 해수욕도 할 겸 경포대 해수욕장으로 갔다.

해수욕할 준비를 해 오지 않은 강수는 상가에 들러 수영복과 수건, 선크림, 돗자리, 슬리퍼, 반소매 셔츠 등 필요한 물품을 샀다.

사각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모래사장으로 나온 강수는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홀깃거리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왜 그런지 몰랐으나 곧 몇몇 사람들이 자신의 몸 보며 부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강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은 헬스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처럼 팔뚝이 우람하거나 근육이 울퉁불퉁하지는 않았다.

강수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매일 하는 달리기와 마나회로 수련으로 인해 따로 운동하지 않아도 전신에 군더더기라곤 조금도 없는 탄탄한 몸으로 바뀌어 있었다. 또한, 182cm의 당당한 신장에 건장한 체격, 특히 아무 생각 없이 산 사각 수영복은 튼실한 심볼을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에 뭇 여성들의 은밀한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민망했으나 수영복이 본래 그런 것이니 어쩔 수 없었다.

바다에 나가 해수욕을 즐기고 파라솔 아래에서 쉬고 있는 강수 쪽으로 이십 대 중후반의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두 여성이 다가왔다.

마침 강수도 두 여인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다가 머리카락에서 붉은색이 은은하게 흐르는 20대 중반의 여성과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다른 여성은 신장이 170cm가 넘어 보였는데 헬스로 다져진 듯한 건강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둘 다 탐스러워 보이는 쭉 뻗은 허벅지, S자 몸매에 다리가 길었다.

‘몸매도 얼굴도 엄청 이쁘네.’

머리카락에서 붉은색이 은은하게 흐르는 여성을 보고 든 생각이었다.

앞으로 지나갈 줄 알았던 두 여인이 자신의 앞에 서자 살짝 놀란 강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머리카락에서 붉은색이 은은하게 흐르고 얼굴은 고양이상인 여자애가 인사를 해왔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라 강수는 당황해서 버벅거렸다.

“무, 무슨 일이죠?”

“일행이 없나 봐요? 혼자 왔어요?”

“그렇습니다만?”

“일행이 한 명만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지만 할 수 없죠. 우리도 일행 없이 왔는데 같이 노는 거 어때요?”

혼자서 따분하던 차에 미모의 두 여성이 같이 놀자니 대환영이었다.

“두 분의 초대를 받다니 영광이네요. 이강수입니다.”

“난 김주하에요. 이쪽은 이웃에 사는 친한 언니.”

모델을 해도 될 만큼 키가 크고 늘씬한 여성은 조금 차갑고 경직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귀 아래에서 커트한 단발머리였는데 감정이 배제된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임해영입니다.”

임해영은 몸매에 비해 얼굴은 개성적이고 예쁘긴 했으나 오히려 평범한 편이었다. 그녀는 묘한 눈빛으로 강수를 바라보다 강수와 눈이 마주치자 슬쩍 눈을 돌렸다.

주하와 해영은 몇 가지 소지품을 강수의 파라솔로 옮겨 왔고, 강수는 주로 주하와 붙어서 물장난을 치거나 수영을 하며 놀았다.

임해영은 근처에서 배회할 뿐 강수와 주하 사이에 끼지 않았다.

실컷 물놀이를 즐긴 세 사람은 물 밖으로 나왔다.

인제야 생각났다는 듯 주하가 대뜸 물었다.

“참, 오빠, 우리는 파라다이스베이 호텔에 있는데 오빠는 어디 묵어요?”

“어, 난 여기서 꽤 가야 해. 덕수리라고 시골 마을 이장님 댁에 묵고 있거든.”

“예?”

“풋!”

임해영이 실소를 지었고, 주하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깔깔깔. 이장님 댁? 정말 깬다. 그런데 왜 그런 곳에 묵는 거예요?”

강수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하하. 이장님 댁에 묵으니까 좀 그렀지? 실은 그림 그리거든. 오늘은 작품 하나 끝내고 머리도 식히고 바다도 볼 겸해서 온 거야.”

화가라는 말에 주하가 격하게 반응했다.

“우와, 화가였어요? 오빠가 화가인 줄은 정말 몰랐다.”

“화가?”

임해영도 의외라는 표정으로 강수를 보았다.

“하하. 내가 화가로 안 보이나?”

“그래요. 오빠는 짐승남이거든요.”

“뭐, 짐승남!”

“이런 야성적인 모습을 보고 누가 인생과 삶을 고뇌하는 예술가로 보겠어요? 사람들한테 직업 맞추라고 하면 아무도 못 맞출걸요. 아, 참,”

주하가 손바닥을 짝하고 쳤다.

“오빠.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초상화 한 점 그려주면 안 돼요? 사례는 충분히 할게요.”

보통 화가나 일러스트레이터에게 그림 그려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실례라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 그림 작업은 취미가 아니고 직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수는 그런 것에 별로 개의치 않았는데 오히려 무료로 모델을 세워놓고 인물 스케치를 한다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하하. 사례는 무슨 사례를 하겠다고? 잠깐만 기다려. 차에 스케치북 있으니까 꺼내올게.”

근처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서 스케치북과 연필, 받침대로 쓰는 화판을 가져온 강수가 주하에게 바다 쪽을 가리켰다.

“기왕이면 바다를 배경으로 그려줄게. 저쪽으로 가자.”

“예.”

세 사람은 사람이 없는 모래사장으로 갔다.

“거기 모래 위에 편하게 앉아서 날 보면 돼.”

오랜만에 모델을 세워놓고 데생하는 기분이 든 강수는 흥이 났다. 주하와 해영이 모두 개성적인 얼굴이라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그림을 그려달라는 부탁 받을 때 내키지 않으면 캐리커처처럼 특징을 잡아서 간략하게 그려 줄 수도 있지만 강수는 주하와 해영의 개성을 살려서 정밀한 초상화를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강수는 일단 주하의 얼굴 형태와 머리카락의 윤곽을 잡아주었다. 그런 후 눈, 코, 입을 세부적으로 그려 넣었다. 오목조목한 주하의 이목구비가 스케치북 위에서 서서히 뚜렷하게 형태를 이루었다.

얼굴 윤곽과 머리카락의 경계는 명암으로 처리했고 얼굴에는 명암도 잔 선도 그리지 않았다. 연필 초상화라 명암과 잔 선을 넣으면 얼굴이 검어지기 때문에 아예 생략해버렸다.

그 대신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도발적이고 섹시해 보이는 눈, 콧날이 부드러운 코, 웃음기가 흐르는 입술에 포인트를 두고 정밀하게 그렸다. 마지막으로 눈동자와 머리에 하이라이트를 처리했다.

강수는 날짜와 사인을 한 후 주하에게 초상화를 주었다.

“다 그렸다. 자, 볼래.”

“어디요.”

주하는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깜짝 놀랐다. 초상화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예뻤고, 뭔가 신비스러운 느낌마저 풍겼다.

“와, 이렇게 잘 그릴 줄은 몰랐어요. 고마워요, 오빠. 액자 해서 평생 간직해야지.”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다.”

“이번엔 해영 씨를 그려볼까요?”

“저는 괜찮아요.”

임해영이 고개를 저으며 김주하를 슬쩍 쳐다보았다.

“언니도 그려달라고 해. 강수오빠 정말 잘 그리네.”

“그럴까?”

강수는 바다를 배경으로 임해영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임해영은 쌍꺼풀이 없어서 눈이 시원스러운 반면 눈매가 매섭게 보였다. 코는 곧고 오뚝 솟았으며 도톰하고 촉촉한 입술은 의외로 육감적이었다. 다만 경직되어 있는 얼굴에서 풍기는 사무적이고 차가운 분위기가 마치 남자의 접근을 경계하고 있는 듯했다.

강수가 스케치를 멈추었다.

“저, 해영 씨.”

“예?”

“이렇게 표정을 좀 부드럽게 해볼래요? 치~~즈.”

강수의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얼굴은 웃는 상이 되었다.

“그, 그거 꼭 해야 해요?”

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같이 긴장한 표정을 하고 있으면 절대 좋은 초상화가 안 나와요. 한번 해 봐요.”

한숨을 내쉰 해영이 입을 열었다.

“치, 치~즈.”

억지 미소라 입술이 근처 근육이 바르르 떨었다.

“킥킥!”

뭐가 웃긴지 주하가 손으로 입을 막고 킥킥댔다.

“좋아요, 그렇게 하면 됩니다.”

강수는 얼굴을 붉히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해영을 진정시키고 십여 번이나 치즈를 시킨 후에야 스케치를 시작했다.

강수가 완성한 임해영의 초상화는 마치 장미같이 유혹적이고 도발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자신의 초상화를 받아 든 임해영은 속으로 놀랐다. 자신의 내면을 들킨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이건 정말··· 실물보다 너무 예쁘게 그려주셨네요. 고마워요.”

“하하. 마음에 든다니 다행입니다.”

“강수오빠, 초상화를 그려줬으니까 저녁은 내가 살게요. 우리가 묵는 파라다이스베이 호텔로 가요.”

초상화를 그리는데 꽤 공을 들여서 어느덧 해가 서산에 걸려 있었고,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강수가 고개를 저었다.

“저녁을 산다니 고맙긴 한데 난 이장님 댁에 가봐야 하는데. 너무 늦게 가면 민폐거든.”

예상 밖의 대답이었는지 김주하가 벙찐 표정을 짓더니 킥킥거렸다.

“킥킥, 오빠, 되게 쿨하다. 우리 같은 미녀가 저녁 사준다고 해도 이장님 댁으로 간다니 말이에요.”

강수가 멋쩍게 웃었다.

“하하. 미안. 시간 맞춰 들어간다고 했거든.”

“아니 괜찮아요. 서울에서 사면 되죠. 우린 내일 서울 올라가는데 오빠는 언제 올라가요?”

“음, 작업이 끝나려면 한 2주 정도는 더 있어야 할걸.”

“그럼 나중에 서울에서 한번 봐요. 그럼 먼저 갈게요”

“어, 그래.”

강수는 두 여성의 늘씬한 뒤 모습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쩝, 저녁 먹고 늦게 들어간다고 연락할 걸 그랬나?’

뒤늦게 후회가 들긴 했지만 이미 버스는 떠났다. 강수는 아쉬움을 남기고 경포대를 떠나 덕수리로 돌아갔던 것이다.

*

그 때 황당해하는 주하의 얼굴을 떠올린 강수가 피식 실소를 지었다.

‘하여튼 서울에서 밥을 산다고는 했는데 정말 연락이 올까?’

부질없는 생각을 떨친 강수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모래사장을 천천히 걸었다.

모래사장을 가득 메웠던 인파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갔고, 바닷가는 조용하게 웅크리고 있었다.

가끔 들려오는 아이들의 해맑은 목소리가 정겨웠다.

‘이제 마지막 작품만 남았구나. 생각보다 엄청 빨리 끝났네.’

‘동행’을 다음 주까지 끝내면 계획했던 것보다 3주나 일찍 출품작을 완성하게 된다.

역시 설악산으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파트보다는 집중도 잘 되고, 밥 해 먹는 수고가 들지 않아 작업하는 데 편했다.

또한 새로 산 물감은 색조의 미세한 차이까지도 물감배합을 통해 만들어서 쓸 수 있었고, 원하는 색감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어서 좋았다. 다.

모래사장의 끝, 강수는 편안한 마음으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갈매기가 끼룩끼룩 울어대며 푸른 바다 위를 떠다녔다.

‘일주일 남았구나. 서울로 올라갈 날도 멀지 않았네?’

갈매기의 자유로운 비행을 쫓던 강수는 한 번 더 시린 청록의 바다를 가슴에 담은 뒤 주차장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

빌라가 밀집해 있는 중랑구의 한 주택가 골목으로 소형차가 들어왔다.

골목의 빈 자리를 찾아 주차한 소형차에서 블루 톤의 정장을 한 30대 중반의 사내가 과일이 든 봉지를 들고 내렸다.

175cm쯤의 신장에 왁스로 머리카락을 넘겨서 이마를 시원하게 드러낸 호감 있게 생긴 인상의 사내였다. 그는 수심이 진 얼굴로 골목길을 터벅터벅 걸어갔다.

“아, 오늘도 투자 유치에 실패했구나. 이번 작품은 엎어야 하나?”

문득 사내가 탄식을 하며 붉은 벽돌로 지어진 빌라로 걸어갔다.

일이 잘 안 풀리거나 기운이 빠질 때는 누나네 집에 와서 우울한 기분을 풀고 기운을 차리곤 했다. 오늘도 답답한 현실을 잠시 잊으려고 누나네 집을 찾은 것이다.

사내의 이름은 하상덕.

올해 나이 서른넷으로 노총각이자 영화감독이다. 그는 한국영상원 영화연출과 출신 감독으로 지금까지 두 편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가족영화를 연출했다.

하상덕이 어린이 영화를 찍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국내에서 어린이 영화를 찍는 감독은 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적었고, 저예산으로 제작할 수 있어서 영화판 진출이 상대적으로 쉬웠다. 또한, 어린이 영화는 저예산으로 엄청난 수익을 노려볼 수 있는 장르였다.

그 때문에 한국영상원에서 공부할 때부터 어린이 영화 쪽으로 타깃을 정했다.

한국영상원 영화연출과 졸업 후, 하상덕은 가족이 모두 즐길 수 있는 어린이 영화, ‘날아라, 왈패’, ‘형과 함께’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했다.

흥행은 하지 못했지만, 적당히 관객이 들어서 손익분기점을 넘겼고, 제작비를 회수했다. 두 편 모두 투자자에게 손해는 끼치지 않아서 3번째 작품, ‘키드수사대’를 기획, 추진할 수 있었다.

하상덕은 내년 여름 시즌을 목표로 자신의 3번째 어린이 영화인 ‘키드수사대’의 초고를 완성해서 영화기획사와 투자회사, 투자자를 찾아다녔지만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한국 정서 특성상 어린이가 악당을 쫓아 범인을 잡는다는 설정이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들어 투자자가 난색을 표명한 것이다.

여름방학 시즌 개봉에 대한 우려도 한몫했다.

여름방학 시즌을 노리는 가족용 어린이 영화는 애니메이션이 대세고, 특히 할리우드 애니메이션과 디즈니 영화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상덕이 3개월 동안 모은 투자금은 예상 제작비의 20% 정도인 2억이었다. 약 2억의 투자금은 크라우드펀딩까지 포함한 금액인데 이대로 자금줄이 막히면 투자금은 돌려주고 ‘키드수사대’는 포기해야 한다.

하상덕은 빌라 2층, 202호의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누나, 나 상덕이야.”

현관문이 열렸고, 하상덕은 실내로 들어갔다.

“외삼촌!’

5살쯤 되는 귀여운 여자아이가 하상덕에게 달려와 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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