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49화 (49/197)

# 49

그림 그리는 마법사 - 49회

후덥지근한 더위가 가시지 않은 초저녁.

연식이 꽤 오래된 검은색 SUV가 중산아파트 단지 내로 진입해서 5동을 향해 굴러갔다.

5동 앞 지상 주차장에 정차한 SUV에서 강수가 내렸다. 강수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며칠 동안 인터넷에서 중고차를 검색한 뒤 구입한 중고 SUV였다. 야외로 자유롭게 화구를 들고 나가기 위해 덩치가 큰 SUV를 샀다. 차량 가격의 절반인 350만 원은 현금으로, 나머지 절반은 할부로 끊었다.

비록 중고지만 마이카를 갖게 됐다는 사실만으로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다.

강수는 자꾸만 웃음이 나오는 걸 참으면서 집으로 올라갔다.

강수는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 탁자에 앉았다.

‘이제 그림 그리려 어디든지 맘대로 갈 수 있겠다. 시골집도 가고 싶을 때 언제든지 갈 수 있고.’

강수는 자동차에 대한 욕심이 많지 않았다.

서울은 대중교통이 편리해서 자동차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한 푼이라도 빨리 돈을 모아서 집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표가 더 강렬했기 때문이다.

음료수를 마저 마신 강수는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는 거실로 들어갔다.

강수는 이젤 앞에 섰다.

자동차를 사겠다고 돌아다닌 탓에 4일을 허비했지만, 어차피 캔버스와 물감이 어제 도착했다. 나흘 동안 마음에 드는 차를 구입했기 때문에 시간이 아깝지는 않았다.

‘강가부터 스케치해 볼까?’

강수는 이젤에 걸어 놓은 40호 크기의 캔버스에 ‘강가’를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연필을 쥔 강수의 손이 거침없이 캔버스에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강가’는 채색을 다시 해서 선배 장영봉에게 좋은 평을 받았던 작품이다. 강수는 기존의 ‘강가’에서 크게 두 가지의 변화를 주었다.

첫 번째는 25호 규격을 40호 크기로 바꾸었고, 두 번째는 앉아있는 두 연인 대신 강가에 서서 상류 쪽을 바라보는 옆 모습의 남자로 바꾸었다.

연인 대신 남자로 바꾼 것은 종희와 해어진 뒤 심경의 변화가 반영된 때문이다. 두 연인의 영속한 사랑도 아름답겠지만 한 남자가 홀로 삶을 성찰하는 모습이 더 끌렸다.

강가의 스케치는 거칠고 투박했다.

선은 드로잉 하듯 자연스럽게 형태를 이루었다. 강줄기나 갈대도 거침없이 쭉쭉 그었다. 강가에 서 있는 인물은 얼굴의 윤곽이 뚜렷하고 표정이 나타날 정도의 근경으로 부각했다.

스케치 된 남자의 모습은 지나온 삶을 반추하는 듯하기도 했고,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하는 것 같기도 했다.

‘강가’를 보는 사람의 정서에 따라서 남자의 모습은 다르게 다가갈 것이다.

강수는 전체적으로 구도와 형태만 잡고 거칠게 스케치를 끝낸 ‘강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 그리는 ‘강가’는 감각적인 붓 터치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표현할 계획이었다.

이미 머릿속에는 어떻게 색을 입힐지 입체적으로 형상화되어 있기 때문에 러프 스케치였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우우웅!

스마트폰을 보니 종대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식, 어떤 차를 샀는지 궁금한 모양이군.’

“종대냐?”

“그래. 차 산다며? 샀냐?”

“샀지. 검은색 중고 SUV야. 13년식이긴 한데 운전해 보니까 괜찮더라.”

“하하. 축하한다. 캔버스를 실으려면 역시 큰 차가 낫지. 그럼 강원도는 언제 갈 거냐?”

“아트페어에 출품할 작품 아이디어 스케치 좀 하고 갈지 아니면 내일이라도 당장 떠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급한 것은 아니니까.”

“이제 차도 샀겠다, 심심하면 이쪽으로 몰고 와라.”

“알았어.”

“끊는다.”

‘싱거운 녀석.’

강수는 달력을 보았다.

19일에 사선이 그어있었다.

‘오늘이 14일. 남은 시각이 6일··· 내일 일루션에 갔다 와도 남은 날이 5일. 이미 한번 채색했던 그림이기도 하고, 시간은 충분하겠구나.’

어떤 방식으로 채색할지 머릿속에 그려져 있기 때문에 채색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일루션에 가는 토요일을 제외해도 5일 동안 집중해서 채색하면 ‘강가’는 끝낼 것 같았다.

강수가 스케치한 캔버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음, ‘강가’를 끝내고 시골 집에 들러야겠다. 그리고 설악산 근처로 가서 나머지 네 개를 그리자.’

포트폴리오에서 선별해 놓은 4개의 작품은 동행, 달이 있는 동네, 기억의 끝, 내 안에서 크는 섬.

지난 며칠 동안 네 작품 모두 간단하게 구도는 잡아 놓았다.

무엇을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창작의 고민이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강수는 생각보다 빨리 출품작을 끝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딩동, 딩동!

이때, 초인종이 울렸다.

‘벙어리 황구 죽돌이!’

강 팀장이 제본한 그림책을 서점에 깔리기도 전에 자신에게 택배로 보내준 것이다.

택배기사에게 택배를 받은 강수는 흥분되는지 몸을 살짝 떨었다.

증정용 그림책은 많이 받아 왔지만 이번에는 의미가 남달랐다. 바로 자신의 첫 창작 그림동화책이었으니까.

두근거리는 마음과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박스를 개봉했다. 박스에는 다섯 권의 따끈따끈한 그림책이 들어 있었다.

표지는 종구와 종구 아빠가 죽돌이 집을 만드는 모습이다. 그림책을 한 장 한 장 꼼꼼하게 살펴본 강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인쇄 품질이 생각보다 잘 나온 것이다.

‘얼마나 팔릴까?’

무엇보다 판매량이 제일 궁금했다.

‘기왕이면 2쇄, 3쇄 찍어서 인세가 팍팍 들어오면 좋겠다. 그러면 아버지한테 농사일 그만하라고 해도 되는데. 가만, 월 생활비가 얼마 정도 필요할까?’

두 분이 생활하려면 적게 잡아도 월 백만 원 이상은 필요할 것 같았다.

‘매달 이백만 원이면 넉넉하겠지?’

월 이백만 원을 떠올리자 한숨이 나왔다.

“어휴, 인세가 다달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쉽지 않겠구나.”

무엇보다 정기적으로 수입이 들어와야 하는데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인세로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꼭 돈 많이 벌어서 제가 모실게요···. 빨리 채색이나 하자.’

*

해왕식품 회장 비서실.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온 박연경이 뭔가를 읽고 있는 신유라를 힐끔 쳐다보았다.

“뭘 보고 있어?”

“아, 그림책이요.”

“웬 그림책?”

“실장님도 한번 보세요.”

신유라가 그림책을 건네주었다.

전체적으로 빠르게 훑어본 박연경이 신유라에게 그림책을 돌려주었다.

“어린이가 보는 그림인데 이걸 왜 샀어?”

“작가가 이강수잖아요. 역시 화가답게 그림이 좋지 않아요?”

“화가 이강수? 아, ‘한국청년화가 12인전’에 참여했던 작가. 그런데?”

“선암갤러리에 자료 챙기러 갈 때 실장님이 신인작가 작품은 좀 싸다면서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으면 구입해 보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제가 이강수 작가의 ‘초대’라는 작품을 샀거든요.”

“오, 그랬어? 몇 호짜리, 얼마에 샀어?”

“25호쯤 되는 건데 사백이요.”

“흠, 그렇게 싼 건 아니네. 그림책도 이강수라는 작가 작품이라 산 거야?”

“네. 제가 요즘 그림에 관심이 많거든요.”

“오, 이강수라는 작가한테 관심이 많은가 보네. 이젠 그림책까지 사고.”

“호호. 제 관심은 남자로서의 관심이 아니라 예술가 이강수에 대한 관심이에요. 실은 주말에 언니 집에 가는데 언니가 용진이 줄 그림책 하나 사 오라지 뭐예요. 그래서 서점에 갔는데 신간 코너에 이 책이 딱 있지 않겠어요? 이강수 작가의 그림동화책이라 무조건 샀죠. 읽어보니까 내용도 감동적이고 그림도 참 좋은데요. 아주 잘 산 것 같아요.”

박연경이 피식 웃었다.

‘그럼 그렇지. 콧대가 높아서 무명화가가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어?’

신유라의 미모는 소문이 나서 사내에서도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자신이 알기만 해도 서너 명의 남자들이 대시를 했다가 단칼에 퇴짜를 맞았다. 모두 능력있는 사원이었기 때문에 여자 직원들 사이에서 질시와 미움을 받고 있기도 했다.

‘흥, 금수저를 잡고 싶은 모양인데 쉽지 않을 걸.’

박연경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외모는 받쳐줄지 몰라도 출신이 평범해서 금수저의 연애 상대로나 적당할 뿐 배필감으로는 부족했다.

‘적당히 ‘사’자 직업을 가진 능력 있는 남자나 만나는 것이 금수저보다 속 편할 텐데. 뭐, 아직 젊으니까 한참 놀다가 현실을 직시하고 나서야 적당한 남자와 만나겠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

끼익!

강수는 시골 집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강가’를 완성해 놓고 화구를 챙겨서 시골 집으로 내려온 것이다.

“어머니, 저 왔어요.”

부엌문이 열리고 김순옥 여사가 활짝 웃으며 나왔다.

“아이고, 내 새끼, 무사히 왔구나. 운전하는데 힘들지는 않았어?”

“길이 막히면 짜증날 뿐이지 운전은 힘들지 않아요. 어머니, 나와서 차 구경하세요.”

“그려, 어디 우리 아들 차 좀 보자.”

강옥순 여사가 강수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대문 옆에 검은색 SUV가 육중한 모습을 뽐내며 서 있었다.

“차가 엄청 크다.”

“헤헤. 화구를 싣고 다녀야 해서 일부러 큰 차를 샀어요.”

“응, 잘했다. 중고차라고 하더니 차가 깨끗하다.”

“전 차주가 깨끗하게 탔어요. 그래도 세차장에서 때 빼고 광 좀 냈어요.”

“강수야, 운전 조심해야 혀. 사고 나면 큰일이니까.’

“예, 어머니. 과속하지 않고 조심히 탈게요.”

“그려. 어여 들어가자.”

*

영호문고.

영호문고는 종로 3가에 위치한 수백 평 규모의 대형서점이다.

무지개출판사 강승호 팀장은 영호문고 어린이 책 분야 신간코너에 진열된 ‘벙어리 황구 죽돌이’와 베스트셀러 코너의 ‘숲 속 다람쥐 가족’을 번갈아 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숲 속 다람쥐 가족’은 꾸준히 팔리면서 베스트셀러 1위를 지켰고, ‘벙어리 황구 죽돌이’는 서서히 팔리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벙어리 황구 죽돌이’가 출간된 지 2주가 지났다.

지금 속도로 팔리면 다음 주 베스트셀러 진입이 확실했다.

‘우리 출판사 책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두 권이나 진입하는 일은 처음인가? 하하. 경사구나.’

중대형출판사의 경우 책을 많이 출간하기도 하고 출판사 파워로 인해 2권이 동시에 베스트셀러 순위에 진입하기도 한다. 하지만 직원 10명 내외의 소형 출판사는 일년에 한 권도 베스트셀러 내기가 쉽지 않다.

“강 팀장님, 납품 끝났습니다.”

20대 후반의 영업팀 사원 배철형이 강승호에게 다가왔다.

강승호는 오프라인 판매 상황을 점검 차 배철형을 따라 나온 것이다.

“아, 그래. 수고했다.”

“강 팀장님, 죽돌이가 잘 나가는데요? 재고도 천부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인터넷 주문도 점차 증가 추세라 재고관리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하. 그렇지 않아도 다음 주 베스트셀러에 진입하면 2쇄 오더 넣을 생각이야.”

“아, 예. 진짜 두 권이나 베스트셀러 10위에 오르는 일이 생길까요?”

“하하. 그렇게 될지 다음 주에 확인해 보자구. 점심시간 됐지?”

“예.”

“밥 먹고 들어가자.”

두 사람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밖으로 나갔다.

*

쏴아아-

파도는 영겁의 시간 동안 지치지 않고 모래사장으로 끝없이 밀려들고 하얀 물거품을 남겼다.

강수는 동해 낙산 해수욕장 모래사장에 서서 하늘과의 경계조차 모호하게 한없는 바다의 끝을 바라보았다. 진청색과 에메랄드 빛이 조화를 이룬 바다의 색은 신비롭고 원대한 힘을 간직하고 있었다.

“아빠, 이거 봐. 조개껍질이야.”

휴가철은 끝났으나 주말이면 아직도 늦은 휴가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젊은 남녀의 웃음소리와 꼬마 아이들의 목소리가 가끔 파도 소리에 섞여서 들려왔다.

강수는 팔랑리 시골집에서 하루를 보내고 바로 강원도 설악산 인근 덕수리 마을로 갔다. 덕수리 마을 이장집을 찾아간 강수는 그림 작업을 하기 위해 월 70만 원에 하숙할 수 있는 집이 있는지 문의를 했는데 이장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자기 집의 빈방을 내준 것이다.

강수는 아파트에서 생활했던 때처럼 오전에는 산에 올라가 마나회로를 수련했고, 오후에는 그림에 매진했다. 이장집에서 하숙한 지 어느덧 3주가 흘렀고, 매주 한 작품씩 세 작품을 끝냈다.

한 작품을 끝낼 때마다 기분전환 삼아 송지호나 경포대 등 해수욕장으로 가서 해수욕도 하고 머리도 식혔다. 낭만적인 바닷가에서 혼자 보내야 하는 점이 약간 아쉬울 뿐 즐겁고 재미난 나날이었다.

문득, 강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지난주 경포대에서 만났던 두 여성, 주하와 해영을 떠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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