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그림 그리는 마법사 - 48회
북한산 자락, 강수의 작은 수련 공간.
마나하트에 마나를 채운 강수가 눈을 떴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후후, 갈수록 마나가 빨리 차네. 바람직한 현상이야. 이런 속도로 빨라지면 곧 하루 만에 완충할 날도 멀지 않겠어.’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 강수는 1서클 마법을 하나씩 캐스팅하며 훈련을 했다. 꾸준히 훈련한 때문인지 캐스팅 속도가 꽤나 빨라졌다.
요즘은 일에 쫓기느라 아직 해석하지 못한 1서클 마법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마법사가 되기 위해 불태웠던 열의도 1서클 마법사가 된 후에는 목표를 성취했다는 만족감에 젖어 약간 가라앉은 상태였다.
지금은 마법을 익히는 것보다 마나하트를 2서클로 성장시키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간단하게 1서클 마법의 캐스팅을 연습을 끝낸 강수는 배낭을 멨다.
하산해서 곧바로 우체국으로 간 강수는 미리 챙겨둔 서류를 갤러리윤에 등기로 부쳤다.
‘이제 밥 먹고 물감을 사러 갈까? 물감을 사면 본격적으로 아트페어 출품작을 그려야지.’
가벼운 마음으로 점심을 사 먹은 강수는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학부시절 애용했던 죽산화방에 도착한 강수는 전문가용 중에서도 고가의 물감을 살펴보았다.
가격대가 60mL 기준 2만 원 선이었다.
자신이 써 왔던 물감보다 거의 두 배가 비쌌다. 그동안 최고급 물감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일러스트를 하면서 그렇게 비싼 물감을 사용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좋아, 어디 비싼 가격만큼이나 물성이 좋은지 확인해보자.’
강수는 브랜드별로 하나씩 이센셜아이를 캐스팅해서 물성 정보를 확인했다.
골디 클라스9
-아크릴 수지 합성원료. 내구성 96%, 내광성 92%, 색 발현율 96%.
림란트사
-아크릴 수지 합성원료. 내구성 95%, 내광성 94%, 색 발현율 97%.
타냐아트
-아크릴 수지 합성원료. 내구성 96%, 내광성 91%, 색 발현율 95%.
마야홀 시리즈d
-아크릴 수지 합성원료. 내구성 97%, 내광성 93%, 색 발현율 97%.
4개사의 물감 가운데 가장 물성이 좋은 물감은 마야홀 시리즈d였다.
‘쳇, 확실히 비싼 물감이 더 낫구나. 돈값을 하는 거겠지. 이센셜아이를 두 번을 더 쓸 수 있으니까 품질이 비슷한지 확인해봐야겠지?’
강수는 마야홀사의 물감 두 개를 더 확인해 보았다. 품질은 변함없이 비슷했다.
‘마야홀 물감을 사면 되겠다. 60미리는 작으니까 435짜리를 사는 게 낫겠지?’
앞으로 아트페어 상하이의 출품작도 그려야 하고 개인전 작품도 그려야 한다. 대용량이라 가격도 60미리에 비하면 저렴해서 435짜리를 구입하는 것이 나았다.
강수는 바구니에 24가지 색을 골라 담아 계산대에 갖다 놓고, 붓과 바니쉬, 연필, 제소 등 작업에 필요한 물건을 모두 구입했다. 캔버스는 규격품을 사지 않고 각각의 작품에 맞는 치수를 적어서 주문했다.
대략 30호 크기 3개와 40호 크기 2개였다.
엄청난 양의 물건에 계산대 직원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작업 하실 게 많나 보네요. 일단 물감만 264만 원이고, 나머지 물품이···.”
계산대 직원이 열심히 바코드를 찍었다.
물감은 개당 11만 원이다. 총 264만 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할 엄청난 물감 가격이었지만 통장에 여유자금이 있어서 그런지 부담되지 않았다.
“총 2백93만 7천 원입니다.”
강수는 카드를 내밀었다.
“일시불로 해주세요.”
“예? 예.”
강수는 붓과 연필 등 자질구레한 물건만 배낭에 넣었다.
“나머지는 택배로 부쳐주시겠어요?”
“아, 예. 주소 적어주세요.”
강수는 메모지에 주소를 적어 직원에게 건네주었다. 죽산화방은 인터넷쇼핑몰도 운영하고 있어서 고객이 원하면 택배로 부쳐준다.
“캔버스와 같이 받으실 건가요?”
어차피 캔버스가 도착해야 작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예, 같이 보내주세요.”
“캔버스 제작 때문에 모레 오전에 발송하면 목요일에는 도착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계산을 끝낸 강수는 배낭을 메고 죽산화방에서 나왔다.
강수는 흐뭇한 기분으로 스마트폰을 꺼냈다.
‘종대, 범일이, 동석이한테 아트페어 상하이에 참가한다고 하면 꽤 놀라겠지?’
강수는 종대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수구나. 웬일이냐?”
“알려줄 뉴스가 하나 있어서.”
“뉴스? 혹시 여자 생겼냐?”
“그건 아니고. 나 아트페어 상하이에 참가한다.”
“뭐? 아트페어 상하이? 농담하냐?”
“농담 아냐. 갤러리윤 소속으로 참여하게 됐어.”
“우와, 정말이냐? 거기 아무나 참가하지 못하는데. 네가 거길 어떻게 참가하게 됐냐?”
“전화로 얘기하긴 그렇고. 지금 작업실이냐?”
“그래. 안 바쁘면 일루 와라. 날도 더운데 해 떨어지면 근처 호프집에서 생맥주나 한 잔 하자. 범일이도 부를 테니까.”
“알았어.”
*
석관역 근처 주택가.
음료수 박스를 든 강수가 단독주택의 반지하에 있는 종대의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15평쯤 되는 공간은 이젤, 캔버스, 물감 등 화구로 가득했고, 실내에서는 유화의 기름냄새가 은근히 풍겼다.
“종대야, 나 왔다.”
문소리에 뒤돌아본 종대가 웃는 얼굴로 강수를 맞았다.
“강수 왔구나. 어서 와라.”
강수가 음료수 박스를 건넸다.
“잘 마실게. 앉아. 뭐 마실래?’
“차가운 거로 아무거나. 동석이는 학원 갔나 보다?”
“그래. 7시 넘어서 올 거다.”
종대는 동기 동석이와 작업실을 같이 쓰고 있었다.
꿀꺽, 꿀꺽!
강수는 종대가 건네준 차가운 음료수를 단숨에 비웠다.
강수가 작업대에 걸려있는 30호(91x65cm) 크기의 캔버스에 반쯤 채색되어 있는 그림을 보며 말했다.
“개인전 준비하느라 바쁘구나.”
“장 선배가 독촉해서 내년 6월쯤 계획하고 있어. 작업하느라 정신없다. 근데 아까 아트페어 상하이에 참가한다는 얘기는 뭐냐?”
궁금증을 참지 못하겠는지 종대가 대뜸 아트페어 참가에 관해 물었다.
“말 그대로지.”
“아니, 어떻게 참가하게 됐냐고. 적어도 중견 작가쯤은 돼야 명함을 내밀 수 있을 건데.”
“그게 좀 이해가 안 간다. 실은 박해나 씨가 추천해서 참가하게 됐는데 나도 믿기지 않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박해나가 추천했어? 아니, 박해나가 참가한다면 이해는 된다지만 박해나가 추천했다는 건 뭐냐?”
“갤러리윤 관계자하고 친분이 있다고 하던데? 참가할 의향이 있으면 자신이 추천해 준다고 해서 당연히 참가하겠다고 했지. 그랬더니 3일 후에 갤러리윤의 큐레이터가 연락해와서 참가하게 된 거다. 나도 그 이상은 몰라.”
“음···. 갤러리윤의 오너가 박윤재인데 숨겨 논 자식인가?”
“숨겨 논 자식? 허. 너 소설 쓰냐?”
“농담이다. 그것보다 박해나가 왜 널 추천한 거냐?”
“그녀가 말하길 저번 전시회에서 내 작품이 괜찮아서 추천한다더라.”
“아, 네 작품이 훌륭한 것은 인정하지. 하지만 고작 작품 3점 보고 추천한 것은 말이 안 돼. 내 동물적인 육감은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고 봐.”
“다른 이유? 그게 뭔데?”
“너한테 관심 있는 것 아닐까?”
“하하. 헛소리 마라. 박해나가 날 언제 봤다고 관심을 두겠어? 고작 전시회 때 한 번 본 것뿐인데.”
‘음, 세 번이었나? 그래 봐야 그게 그거지.’
“첫눈에 반한다는 말이 있지 않냐? 남녀 사이에 필이 꽂히는 데는 1초면 충분하다고 하더라.”
강수는 박해나와 첫 만남을 떠올리고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하. 네가 박해나와 나의 첫 만남을 못 봐서 그런 말을 하는구나.”
“왜? 해나 씨 하고 무슨 사연이 있었어?”
“큭큭큭!”
강수는 혼자 웃고 나서 박해나와 만났던 사연을 얘기해주었다.
“으음,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강수야, 넌 박해나를 여자로 볼 때 어떻냐?”
“뭐? 그건 왜 물어?”
“그냥. 예술가 박해나가 아니라 여자로서 박해나는 어떤지 말해 봐.”
“나는 애교 있고 부드러운 성격의 여자가 좋아. 박해나는 좀 차갑고 깐깐한 데다 까칠한 것 같더라.”
“임마, 박해나가 꾸미지 않고 털털해서 그렇지 키, 얼굴, 몸매 어디 한 군데 빠질 곳이 없다. 어디 그것뿐이냐? 젊은 층에서는 제일 잘나가는 예술가지. 박해나는 재벌 집 자식하고 어울리지 너한테는 과분해.”
“맞아. 그건 동감한다.”
“그러니까 그딴 거 따지지 말고 박해나 하고 잘 사귀어봐라.”
“뭐? 종대야,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 나하고 해나 씨는 사귀고 자시고 할 게 없는 사이거든.”
“너한테 관심 없는데 아트페어에 추천했겠냐? 그 관심이 단순히 그림에 대한 관심인지 이성에 대한 관심인지 애매한 거지. 뭐, 네가 알아서 할 일이긴 하다만.”
“알았다, 알았어. 작업하던 중인가 본데 작업해라. 난 작품 구경할 테니까.”
“아냐. 그렇지 않아도 머리 좀 식히려고 했다. 어떻게 종일 작업만 하냐. 머리 아프다. 참, 종희 씨 기사 봤냐?”
종희와 헤어진 뒤 마나회로 수련과 작업에 쫓겨 뉴스도 못 보고 정신없이 보냈다. 연예계 소식은 거의 모른다.
“아니. 왜 무슨 기사가 떴는데?”
“무슨 기사냐 하면, 종희 씨가 윤상일 감독 신작 ‘몬스터를 막아라’에 박수범과 함께 캐스팅됐더라.”
“윤상일? 윤상일이면 그 '해적왕'으로 단번에 천만 감독이 된 사람?”
“그래. 천만 감독으로 화려하게 데뷔했다가 내리 2편을 죽 쑨 감독이야.”
“잘됐네. 윤상일 감독이면 저력 있으니까 이제 히트할 영화를 낼 때가 되지 않았을까? ‘몬스터를 막아라’가 성공하면 종희는 완전히 정상급 여배우로 뜨겠구나.”
“영화가 히트를 하면 그러겠지. 한데 ‘몬스터를 막아라’의 최대 투자자가 어딘 줄 알아?”
강수가 흠칫하더니 종대를 쳐다보았다.
“설마?”
종대가 씁쓸하게 웃었다.
“유성홈쇼핑이야.”
순간적으로 강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굳은 얼굴을 푼 강수가 어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웃음은 허탈하고 공허한 기운이 가득했다.
“하하하. 그 전무란 자식도 화끈하다. 종희를 확실하게 밀어주네. 종희가 남자 하난 잘 잡았네.”
“네가 알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거다.”
“종대야, 헤어진 지가 몇 개월이야. 이젠 아프지 않으니까 너도 걱정할 필요 없어. 하여튼 고맙다.”
“그래서 말인데 박해나 정도면 종희 씨와 견주어도 꿀리는 게 없지 않냐? 잘 해봐라.”
“하하. 알았다. 네 말마따나 해나 씨면 나한테 과분하지.”
강수와 종대는 잡담하며 친구들을 기다렸다.
저녁 7시 30분쯤 티에 청바지를 입고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내려온 이동석과 반팔 남방에 신사복 바지를 입은 깔끔한 스타일의 직장인 장범일이 종대 작업실에 나타났다.
야생마 같은 모습의 이동석이 활짝 웃으며 강수를 부둥켜 안았다.
“어이, 잘나가는 이강수.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까지 왔냐?”
“친구들 얼굴 보러 왔지. 왜 왔겠어.”
“잘 왔다. 요즘 영양보충이 필요한데 치맥 좀 사라.”
“하하. 치맥이야 배 터질 만큼 사 주마.”
강수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즐겁게 웃으며 호프집으로 갔다.
*
창가에 서서 서류를 들고 쭉 훑어본 박윤재는 고개를 흔들며 혀를 찼다.
“쯧쯧. 이게 뭔가. 고향은 양구 팔랑리. 2012년 홍우대 회화과 입학, 군 복무 후 3학년에 복학. 2018년 졸업. 일러스트 작가로 활동. 형식적인 단체전 2번 참가. 얼마 전에 한국청년화가 12인전에 참가. 눈물, 초대, 도시의 일몰 발표. 삽화가로서의 경력은 화려해도 화가의 경력은 일천하고.”
박윤재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오늘따라 비가 올 것처럼 하늘이 흐렸다.
‘소나기가 오려나? 더위가 가시게 한바탕 비라도 쏟아지면 좋겠군.’
박윤재는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책상에는 칼러 인쇄물이 있었다. 바로 강수의 그림 3점이었다.
박윤재는 의자에 앉아 강수의 그림을 한 장씩 감상했다.
초대, 눈물, 도시의 일몰.
‘음, 극적인 반전이라면 최이석 평론가가 이강수의 작품을 과하게 칭찬했다는 점. 해나가 이 친구를 인정했다는 점이지.’
박윤재는 자신의 딸, 해나의 천부적인 재능과 그녀의 안목을 믿고 있었다. 이강수를 아트페어 상하이에 참가시킨 것도 그 믿음에서 비롯한다.
자신의 자식이라서 믿는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고, 해외에도 진출해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삽화를 그리던 친구가 갑자기 회화를 잘 그리는 경우는 매우 드문 케이스란 말이지? 이렇게 회화를 잘 하면서 지금까지 삽화를 그리고 있었어? 왜지?’
비록 칼러인쇄용지에 출력한 그림이지만 화면 속 인물들은 생동감 넘쳤고, 은은하고 깊이 있는 색감은 매우 뛰어났다.
인쇄물의 그림도 상당한데 원화는 더욱 뛰어난 그림일 것이다.
자신이 보고 있는 그림이 일개 삽화가의 그림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고, 그의 상식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해나처럼 재능이 넘치는 인재는 싹부터 남다르다. 어디에서건 낭중지추처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이 친구의 등장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선하군. 미술계에서 이런 급작스러운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데 말이지. 이건 꼭 신성의 출현 같지 않은가?’
그림을 훑던 박윤재가 문득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하여튼 미술계에 재미있는 일이 생겼어. 어디 이강수란 친구가 신성으로 떠오를지 유성처럼 반짝이다 사라질지 지켜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