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그림 그리는 마법사 - 46회
강수는 박해나를 떠올리며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한데 포트폴리오 보자는 말도 없어? 대체 박해나와 캘러리윤은 무슨 관계인 거야?’
추측하건대 박해나는 갤러리윤의 단순한 소속 작가는 아닐 것이다.
박해나가 아무리 잘나가는 유망한 화가라고 해도 고작 신인에 불과하지 않은가? 갤러리윤에 영향력을 미칠 정도는 아닌 것이다.
‘친인척인가? 쩝! 괜한 생각 말고 작품이나 구상하자.’
강수는 달력을 보았다.
‘오늘이 7일 금요일이니 정확하게 두 달 남았구나. 두 달에 5개 작품이라. 포트폴리오에서 5개 골라서 다시 그리면 되고, 문제는 개인전 작품이지. 그림동화책 작업 끝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쉴 틈이 없네. 일러스트를 안 해도 은근히 바쁘군. 참, 작품은 새 물감을 사서 그려야 하니까 마나를 채울 동안은 작품구상 하면서 수련이나 해야겠다. 우선 아트페어 출품 작품부터 골라내야지.’
강수는 포트폴리오 파일을 꺼내 15작품을 쭉 늘어놓았다. 그 가운데 아트페어 상하이에 출품할 5작품을 골라냈다.
‘좋아, 이 작품들을 재창작해서 출품하면 되고. 음, 12일에 한 작품을 그려야 하는군.’
강수는 달력에 12일마다 한 작품씩 마감한다는 의미로 사선을 그어놓았다.
나름 일정을 세운 강수는 마나를 채워 월요일에 물감을 구입 후 작업을 시작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지금쯤이면 메일이 도착했겠지?’
강수는 컴퓨터를 켜고 포털에 접속했다.
메일함을 확인하니 김이라의 이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메일을 클릭했다.
아트페어 행사에 관한 자료가 첨부되어 있었고, 해외 아트페어 참가 때문인지 이력서, 대학 졸업증명서, 작가 경력, 신상명세서, 여권 카피, 주민등록등본 등 준비해야 할 서류가 여러 개였다.
우선 문서파일로 작성해서 보낼 것은 작성해서 이메일로 보내고, 증명서와 등본 등은 민원사이트에 접속해서 출력했다. 준비한 서류는 월요일에 우편으로 보내야 한다.
‘대충 됐군.’
잡일을 마치고 음료수 한 캔을 꺼내 목을 축였다.
우웅!
이때,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강 팀장님이네. 죽돌이 때문에 전화했나?’
강수는 전화를 연결했다.
“강 팀장님, 안녕하세요?”
[하하, 이 작가님. 날도 더운데 건강은 잘 챙기고 있는지요?]
“예, 저는 추위보다 더위에 강해서요, 이 정도 더위는 괜찮네요.”
[하하, 그렇군요. 전 지금 ‘벙어리 황구 죽돌이’를 인쇄하고 있는 인쇄소입니다. 초판 1쇄는 3천 부를 찍기로 했습니다. 성적을 봐서 2쇄부터는 부수를 늘릴 수도 있을 겁니다. 3천 부에 대한 인세는 경리가 오늘 중으로 입금한다고 했습니다. 아마 지금쯤 입금했을지도 모르겠군요. 원천징수 제하면 348만 원쯤 되겠네요.]
‘헛, 348만 원이나!’
강수는 348만 원이 통장에 입금된다는 말에 살짝 흥분했다.
이 인세는 초판 1쇄에 대한 인세다. 만약 그림책이 잘 팔려 2쇄, 3쇄, 4쇄를 찍으면 매번 인세가 들어온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그림책이 서점에 깔리지도 않았는데 인세부터 챙겨주어서 기분이 좋았다.
“인세를 빨리 지급해 주시네요? 항상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앞으로 인세는 인쇄소에서 그림책이 찍히는 날 입금될 겁니다. 원고를 빨리 넘겨 주어서 내가 더 감사하죠. 그림책은 제본이 끝나는 대로 서점에 깔릴 겁니다. 그때 다시 연락드리죠.]
“예, 고생이 많으시네요.”
전화를 끊은 강수는 처음으로 받아보는 인세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하하, 이런 것 때문에 내 작품을 해야 하는 거구나. 쩝, 한데 그림책이 팔려야 추가 인세가 들어오는 거지 안 팔리면 그만이잖아?”
인세 계약의 맹점이 여기 있다.
대부분의 창작 그림동화책은 초판 1쇄 3,000부를 소진하는데 몇 달,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아예 초판 1쇄로 끝나는 그림책도 많다. 결국 팔리지 않으면 3천 부의 인세는 돈이 안 된다.
이야기 작가와 그림 작가가 3천 부 인세를 쪼갤 경우 돈은 더욱 쪼그라든다.
일러스트 작가가 그림을 매절하는 이유였다.
‘숲 속 다람쥐 가족’의 경우 벌써 3천부씩 5쇄를 찍었고, 그림책 분야 베스트셀러 1위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다. 중박을 터트린 것이다. 강 팀장은 ‘벙어리 황구 죽돌이’도 베스트셀러를 자신하고 있었다.
‘10쇄만 찍어도 인세가 3천4백이 넘네. 우와, 장난 아니네. 우하하, 더도 말고 딱 10쇄만 찍으면 좋겠다.’
그림책이 날개 돋친 듯 팔리는 상상에 빠져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던 강수가 정신을 차렸다.
‘그림책 대박 나기가 쉬운 게 아니지. 어휴, 망상은 집어치우고 스케치나 하자.’
*
롤랑은 ‘들판에 비치는 햇살’의 구매 년도와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년도가 일치한 데 기묘한 느낌을 받고 전시장에 내려가서 ‘들판에 비치는 햇살’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자신의 눈으로는 위작이라는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그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이 작품을 1936년에 구입했다는 사실은 오직 미술관 관계자만 알고 있어. 전화를 건 자는 무엇을 근거로 1936년을 정확하게 지적할 수 있었을까?’
비록 ‘들판에 비치는 햇살’의 공식적인 제작 년도는 1912년이지만 미술관에서 구입한 년도와 위작이라고 지적한 년도가 일치한 점이 영 께름칙했다.
확률은 낮지만 1936년에 누군가 위작한 작품을 미술관에서 구입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만약 ‘들판에 비치는 햇살’이 1936년에 제작된 위작이라고 가정한다면 진위 여부를 가려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과학적인 분석으로 증거를 찾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작가연구, 양식연구, 미술사적 연구 등 인문학적으로 증거를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에 잠겨있던 롤랑이 의자에서 일어나 민원진에게 갔다.
“미스터 민.”
“롤랑?”
“아까 위작이라고 전화했던 사람의 전화번호 알 수 있을까요?”
민원진의 표정에 의문의 꼬리표가 떠올랐다.
“예? 무엇 때문에 그러죠? 그 사람이 언론매체에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은 이상 위작이라고 한 전화는 법적으로 위법한 사항이 아닌데요?”
“고소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 속에서 무엇을 보고 위작이라고 했는지 흥미가 생겨서 그 사람과 얘기해보고 싶습니다.”
“아, 잠깐만요.”
자리에서 일어난 민원진은 사무 여직원에게 가서 전화기에 기록된 전화번호를 메모지에 적어왔다.
“여기 있습니다.”
메모지를 받은 롤랑이 머뭇거리다 말했다.
“미안하지만 미스터 민이 그 사람과 통화해서 내가 만나기를 원한다고 물어봐 줄 수 있습니까?”
소통이 원활하지 않으면 쌍방간에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민원진은 자신이 중개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죠.”
민원진이 즉시 전화를 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린 후 통화가 되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한가람미술관 학예사 민원진입니다. 몇 시간 전에 통화했었는데 기억하는지요?”
[예. 물론 기억하죠. 한데 무슨 일이죠?]
“선생님이 지적한 위작 건에 대해 전시 담당 매니저 롤랑 씨가 흥미롭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만나서 자세하게 얘기하고 싶어 하는데 혹시 시간을 좀 내줄 수 있는지요?”
[음, 그건··· 좋습니다. 대학로쯤에서 만나면 나갈 수 있습니다.]
“잠시만요. 롤랑, 대학로에서 만나자고 합니다. 괜찮습니까?”
롤랑이 대답했다.
“미안한데 미스터 민이 길안내와 통역을 해주면 안 될까요? 서울 지리도 잘 모르고 그 사람과 말이 안 통하면 만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러지요.”
사실 민원진도 호기심이 생겨서 같이 만나고 싶었던 참이다.
“고맙습니다. 그럼 두 시간 뒤에 대학로에서 만납시다. 내가 커피를 산다고 하세요.”
민원진이 강수에게 롤랑의 의사를 전해주었다.
“선생님, 두 시간 뒤가 어떻습니까? 롤랑 씨가 커피를 사겠다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장소는?]
“저도 같이 가니까 약속 장소는 문자로 알려드리죠.”
민원진은 대학로 카페를 검색해서 정한 후 강수에게 카페 이름과 위치를 문자로 보냈다.
“롤랑, 퇴근 시간이라 막힐 테니 준비해서 나가죠?”
“그럽시다.”
*
강수는 자신의 제보를 장난쯤으로 여기고 무시할 줄 알았다. 한데 몇 시간 만에 연락해서 만나자고 할 줄은 의외였다.
롤랑이라는 전시 담당 매니저가 자신의 말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들판에 비치는 햇빛’에 뭔가 의심스러운 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강수도 궁금했다.
‘한데 롤랑이란 사람을 만나봐야 1936년에 제작됐다는 사실을 증명할 방법이 없는데? 뭐라고 하지?’
민원진에게는 대충 보는 눈이 남다르다고 말했다.
프랑스 사람인 롤랑에게 그런 말 해봐야 먹히지 않을 것이다.
‘모네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제작한 위작이라 과학적인 조사로 위작을 밝혀내기는 쉽지 않겠지?’
고민을 해봐야 딱히 설득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별수 없군. 무조건 위작 검사를 하라고 충고하는 수밖에.’
*
대학로에 위치한 카페 풍경소리.
강수는 롤랑, 민원진과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민원진이 통역을 했다.
“화가 이강수입니다.”
“오, 화가였군요. 반갑습니다. 미라세미술관 전시 담당 매니저 얀토니 롤랑입니다.”
“민원진입니다.”
롤랑과 민원진이 명함을 내밀었다.
‘아, 나도 이제 명함이 필요하구나.’
강수는 두 사람의 명함을 챙기면서 자신도 명함을 만들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롤랑이 즉각 본론을 꺼냈다.
“미스터 리, ‘들판에 비치는 햇빛’을 위작이라고 했는데 어떤 면을 보고 위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까?”
예상했던 질문이었고, 증거를 댈 수는 없었다.
일단 민원진에게 했던 얘기를 다시 했다.
“믿지 않아도 어쩔 수 없지만 내게는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재주가 약간 있습니다. ‘들판에 비치는 햇빛’을 보았을 때 모네의 붓 터치와는 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고, 색채 역시 조금 가볍다고 느꼈지요. 솔직히 그 차이는 굉장히 미세하고 또 미묘해서 나처럼 특별하게 감각이 발달하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을 겁니다.”
롤랑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가요? 사실 위작이라는 말을 듣고 몇 번이나 유심히 작품을 살펴보았지만, 위작이라는 느낌이나 어떤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미스터 민은 어땠습니까?”
롤랑이 민원진에게 묻자 민원진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천재 소리를 듣는 박해나 조차 이상한 점을 알지 못했다. 이들이 위작을 알아볼 리 없었다.
롤랑이 강수에게 질문을 했다.
“미스터 리, 나는 초능력 같은 비현실적인 능력은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 말은 그런 류의 초능력 같군요. 혹시 그 감각이 사이코메트리 같은 능력입니까?”
이센셜아이가 물건의 정보를 얻는다는 측면에서 사이코메트리와 비슷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센셜아이는 사물을 이루고 있는 본질을 알아내는 마법이다.
사이코메트리는 드라마나, 영화, 만화에서 자주 소재로 등장하는데 물건에 남아있는 흔적과 정보를 읽어내는 초능력이라고 알려져 있다.
강수는 고개를 저어 부인했다.
“사이코메트리와 같은 초능력은 아닙니다. 그냥 남들보다 뛰어난 시각과 천부적인 감각을 지녔을 뿐입니다.”
“으음•••.”
롤랑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이강수가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옷차림은 단정했고, 외모도 호감 있게 생겨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분명히 절대음감 같이 남들보다 뛰어난 감각을 가진 사람도 존재했다.
‘하지만 뛰어난 감각 만으로 제작 년도를 알아 맞출 수가 있을까?’
그것이 못내 의문이었다.
어쨌든 이강수의 말이 사실이라면 무엇보다 ‘들판에 비치는 햇살’이 1936년에 제작된 위작일 수도 있었고, 그렇다면 미술관은 상당한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혹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까?”
“아, 그, 그게···.”
생각에 잠겼던 롤랑이 더듬거렸다.
“미스터 리가 단순히 위작이라고만 했으면 장난 전화로 넘어갔을 겁니다. 한데 1936년에 제작된 위작이라는 말 때문에 간단히 넘길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롤랑 씨. ‘들판에 비치는 햇살’이 1936년과 무슨 연관이 있군요? 그렇죠?”
롤랑이 순순히 시인했다.
“그렇긴 합니다만 그건 내부 정보라 밝힐 수 없으니 양해 바랍니다. 일단 일본 전시가 끝나면 본국으로 돌아가서 위작 검사를 해 보겠습니다.”
용무를 끝낸 롤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미스터 리를 만나서 유익했습니다. 시간을 내주어 고맙습니다.”
강수도 자리에서 일어나 롤랑의 손을 잡았다.
“위작 검사를 한다니 잘 생각했습니다. 위작은 빨리 가려내서 발표하는 것이 미술관의 명성에 흠이 되지 않을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검사 결과가 나오면 미스터 리에게 연락해 주겠습니다.”
강수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위작인지 진작인지 궁금합니다. 연락해 주면 고맙죠.”
강수는 롤랑과 악수하고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