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44화 (44/197)

# 44

그림 그리는 마법사 - 44회

“아트페어 상하이요?

강수가 무슨 소리냐는 듯한 얼굴로 박해나를 바라보았다.

박해나는 변함없는 표정으로 강수의 눈빛을 마주 보았다.

“아트페어면··· 좀 갑작스럽네요. 한데 내가 어떻게 아트페어 상하이에 참가할 수가 있죠?”

“갤러리윤 소속 작가로 참가하게 될 거에요. 강수 씨는 내가 추천하는 것이고요.”

강수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갤러리윤은 국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규모와 오랜 전통, 고가의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굴지의 갤러리다. 미술계에서는 존재감조차 없는 자신을 아트페어 상하이에 참가시킬 것 같지는 않았다.

“갤러리윤에서 무명화가인 날 참가시켜 줄까요?”

“갤러리 관계자와 친분이 좀 있어요. 갤러리 측에서는 내 안목을 꽤 신뢰해요. 때문에 내가 추천하는 거죠.”

‘뭐지? 갤러리윤 큐레이터와 친분이 있는 건가? 아무리 친분이 있어도 그렇지. 자신이 추천하면 당연히 된다는 것처럼 얘기하네?’

“아, 그럼 나는 참가 의사만 결정하면 된다는 건가요?”

“맞아요. 근래 들어 상하이는 미술 시장의 빅마켓으로 급부상하고 있어요. 이번 아트페어는 상하이시에서도 적극적으로 후원한다고 하네요. 세계 유수의 갤러리와 유명 작가들이 다수 참여할 테니 아트페어에 참가하면 강수 씨에게 좋은 경험이 될 거에요.”

“만약 내가 참가한다면 작품은 몇 점이나 준비해야 하죠?”

“7, 8점 정도면 좋겠지만 그보다 적어도 상관없어요.”

상상조차 못 했던 제안이지만 생각할 것도 없이 무조건 참여하는 것이 옳다. 아니 절이라도 하면서 감지덕지할 판이었다.

모르긴 해도 아트페어 상하이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중견작가들이 줄 섰을 것이다.

다만 아트페어 상하이에 참여시켜 줄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박해나의 자신만만한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

또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이라면 자신이 갤러리윤 소속으로 참여한다고는 하지만 국내에서조차 무명화가란 점이다.

‘해외에서는 날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데 아트페어 참여가 무슨 의미지? 음, 작가 경력에 한 줄 늘기는 하겠군.’

강수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한 얼굴로 박해나가 말했다.

“나는 내 촉을 믿어요. 강수 씨 작품은 해외에서 호평받을 거예요. 참여 여부는 천천히 생각하고 일주일 안으로 연락 주면 돼요.”

“아, 그런가요?”

주스로 목을 축인 강수는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해나 씨,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아트페어 상하이 정도면 나 같은 무명 말고도 참여하고 싶어 하는 유명 작가가 많을 것 같은데요? 굳이 날 추천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네요.”

“맞아요. 참여를 원하는 작가가 많다고 알고 있어요. 특별한 이유보다 그냥 신인작가에게도 아트페어 상하이에 참여할 자리가 하나 남아 있는 거죠. 그 자리를 강수 씨가 차지하는 것이고요. 그리고 굳이 내 추천이 아니더라도 저번에 판매하지 않은 ‘눈물’만 갤러리윤에 보내도 흔쾌히 한자리 내줄걸요?”

의문에 대한 해답은 아니지만 이해 못할 내용은 아니었다. 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같은 무명화가가 그런 영광스러운 자리를 마다한다면 바보겠죠. 무슨 성적을 기대할 순 없겠지만 그냥 참가한다는데 의미를 두겠습니다.”

일주일이나 두고 참가 여부를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강수는 참가 의사를 밝혔다.

“잘 생각했어요. 내 감으론 강수 씨가 좋은 성적 거둘 거 같네요.”

박해나가 잔에 남은 주스를 마저 마시고 이어 말했다.

“갤러리윤 쪽에 강수 씨 전화번호를 줄게요. 갤러리윤에서 며칠 내로 연락할 텐데 그때 일정에 대해 의논하면 돼요. 작가는 작품 외에 크게 신경 쓸 부분은 없다고 하니까 부담 갖지 않아도 될 거에요.”

“참, 해나 씨도 참가하는 거죠?”

“물론이에요. 주스가 맛있네요. 잘 마셨어요.”

“별말씀을요.”

박해나는 얘기하는 줄곧 거의 표정이나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 첫 만남부터 느꼈지만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가 분명하다는 생각을 했다.

강수와 박해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럼 또 봐요. 아, 그리고 혹시 포트폴리오 보자고 하면 ‘눈물’을 가지고 가세요. 그게 속 편할 거예요.”

기존의 포트폴리오는 절대 갤러리윤에 보여줄 작품이 아니었다.

강수도 그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예, 그러죠.”

묵례로 작별인사를 한 박해나는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원피스를 하늘거리며 걷는 늘씬한 몸매가 주변에 있는 뭇 남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저 키에 몸매면 모델을 해도 성공하겠네···. 아, 뭔 생각을 하는 거냐?’

강수는 실소를 지으며 해나의 늘씬한 뒤 모습에서 눈길을 돌렸다.

사실 아트페어 상하이에 참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박해나가 심심해서 장난을 친 건가?’

생각해 보면 미술계의 신데렐라나 다름없는 박해나가 자신을 불러내 장난을 치는 것이 더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다.

그래도 확신이 서지는 않았다.

갤러리윤에서 연락이 와 봐야 알 것 같았다.

‘박해나가 제정신인지 아닌지 기다려보면 알겠지···.’

강수는 박해나와 나누었던 대화를 되새기면서 천천히 남부터미널 쪽으로 걸어갔다.

‘만약 아트페어에 참가하게 되면 어떤 작품을 출품해야 하나?’

최소 4, 5작품은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10월에 개최한다고 했으니 당장 아트페어에 출품할 작품을 준비해야 한다.

‘뭘 그릴까?’

아트페어에 출품할 작품을 고민하던 강수는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갤러리윤에서 연락이 올지 안 올지 모르는데 괜히 머리 굴리지 말자.’

갤러리윤 큐레이터가 확답하기 전까지는 아트페어의 참가는 미정이다. 작품은 참가가 결정된 후에 고민해도 늦지 않다.

머리에서 고민을 털어버린 강수는 빠른 걸음으로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

아파트에 도착한 강수는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가며 습관적으로 우편함에 시선을 한번 주었다. 우편함에는 하얀 편지봉투 하나가 잘 보이게 꽂혀 있었다.

강수는 편지봉투를 꺼냈다.

-이강수 씨에게.

발신자는 없고 봉투에는 자신의 이름만 적혀 있었다.

‘뭐지?’

봉투를 찢어 편지지를 꺼내보았다.

A4 용지에는 단 두 줄만 프린트되어 있었다.

-전인규를 알고 있는가?

-설사 전인규를 몰라도 전인규를 조심하시오.

밑도 끝도 없는 황당한 문구였다.

‘전인규? 유성홈쇼핑의 그 전인규? 이게 뭐야? 누가 장난 편지를··· 가만.’

강수는 전인규와 일면식도 없었다.

전인규와 조금이라도 연관성을 찾는다면 종희가 매개체다. 자신은 종희의 옛 애인이고 전인규는 현재 애인이든 뭐든 될 것이다.

‘종희와는 끝난 지 몇 개월이나 지났는데? 이게 내가 조심해야 할 이유가 되는 거야?’

이리저리 염두를 굴려봐도 편지 내용은 물론이고 발신자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근데 이건 누가 보낸 거지?’

역시 자신에게 경고 문구를 보낼 만한 사람이 한 명도 떠오르지 않았다.

문득,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하, 웬 미스터리? 어쨌든 전인규는 종희와 관련된 자가 분명하니까 뭘 조심하란 건지는 몰라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강수는 경고 문구에서 기묘한 기분을 느끼며 아파트로 올라갔다.

*

무지개출판사 강승호 팀장은 ‘벙어리 황구 죽돌이’의 원화를 탐욕스러운 눈으로 살펴보며 괴상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흐흐흐, 이 작품 장난 아니다. 이야기도 그림도 아주 죽여준다.”

옆에서 같이 원화를 훑어보고 있는 전수민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수와리에 가서 취재하고 나서 에피소드를 조금 추가하고 바꾼 것뿐인데 이야기 흐름이 훨씬 매끄럽고 흥미로워 졌잖아요. 그림도 이야기하고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래. 역시 현장에 가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취재의 힘을 무시 못 하지. 이 작가가 제대로 일을 했다.”

전수민이 원화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음, 강 팀장님, 아빠가 개집 만들고 있는 걸 꼬마가 보고 있는 이 장면이요.”

“그 장면? 왜?”

“요 부분만 떼어내서 표지로 쓰면 좋겠는데요.”

“흠, 괜찮군. 일단 스캔부터 하자.”

강승호는 무슨 보물을 다루듯이 원화를 조심조심 포장해서 박스에 넣었다.

“허상배.”

“예, 팀장님.”

“이 원화, 총알처럼 이지스캔에 갖다 줘. 그리고 사장님께 나한테 전화하라고 전해. 스캔작업에 관해서는 내가 얘기할 테니까.”

“옛.”

20대 중반의 기획팀원 허상배가 박스를 들고 드럼스캔을 뜨기 위해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나갔다.

강승호가 느끼하게 웃으며 전수민을 바라보았다. 뱀을 보고 얼어 비린 개구리처럼 불길한 기운을 느낀 전수민이 흠칫 몸을 움츠렸다.

“전 대리.”

“예?”

“이지스캔에서 스캔 파일 보내오면 오늘 중으로 레이아웃, 색 보정, 조판 다 끝내.”

전수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더니 느닷없이 피식, 웃었다.

“뭐야, 왜 웃어?”

“팀장님도 참. 농담이죠?”

강승호가 눈알을 부라렸다.

“내가 농담하는 거로 보여.”

“팀장님, 스캔만 해도 몇 시간이 걸릴 텐데 지금 시간을 보세요. 그건 불가능해요.”

“다른 일 다 접어. 무조건 이 건부터 끝내자고. 음, 내일 오후 3시까지 시간을 주지. 그 정도면 괜찮지?”

전수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요. 그 대신 스캔 파일을 7시 전에 받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시간 내에 끝내기 힘들어요.”

“그건 걱정 마. 스캔이 하나씩 끝날 때마다 보내라고 하면 돼.”

“어휴, 퇴근은 자정이나 돼야 하겠네. 내가 미쳐.”

“맛있는 거 시켜 줄 테니까 좀 참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잖아.”

“이 작가님 작품 아니면 안 했다고요. 이 작가님 작품이라 참고하는 거지.”

머리가 아픈지 전수민이 찌푸린 얼굴로 쫑알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전수민이 짜증을 내든 말든 강승호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연타석 홈런을 치게 생겼는데 야근이 문제야. 일 없는 것보단 낫지. 암, 그렇고말고.”

*

예술의 전당에서 박해나를 만나고 온 뒤 며칠 동안 강수는 자신의 첫 개인전을 위해 자료도 찾아보고 내키는 대로 몇 가지 구상을 해보았으나 아직 주제를 정하지 못했다.

15점의 기존 작품을 수정한다 해도 전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와 맞물려서 수정해야 한다. 그래야 작품이 따로 놀지 않는다.

강수는 아직 그 주제를 정하지는 못했다.

‘주제를 정해야 어떻게 수정하고 뭘 그릴지 떠오를 것 같은데. 음···.’

보통 개인전은 작가가 표현하려고 하는 특정 주제 혹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 또는 어떤 틀을 깨는 실험적인 시도같이 일관성 있는 작품 세계를 보여줘야 한다.

현대미술의 특징과 흐름은 설치미술, 포스트 모더니즘, 다다이즘, 추상미술, 초현실주의 미술, 비디오아트, 다양한 오브제의 사용 등 순수회화의 형식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어떤 장르이든 그것은 그것대로 의미와 가치가 존재한다. 무엇이 낫다고 단언할 수 없다. 작가 취향이나 세계관에 기초해 형식은 얼마든지 파괴, 변형되고 있다.

하지만 강수는 물감으로 창조하는 궁극적인 색채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갤러리윤에서는 연락이 없네?’

3일이 지났지만 갤러리윤에서 아직 연락이 오지 않았다.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했으나 은연중에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풋, 박해나가 무슨 생각으로 날 만났는지 모르겠다만 내가 큐레이터라도 무명화가는 참가시키지 않겠다. 가만, 모네.’

강수는 모네의 ‘들판에 비치는 햇빛’이 떠올랐다.

뭔가 색채에서 미묘하게 거슬리는 것을 느꼈던 작품이다.

마치 모네의 모든 기법을 물려받은 제자가 그린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으음, 마나도 다 채웠는데 가서 이센셜아이로 확인해 봐?’

‘들판에 비치는 햇빛’이 모네의 진품일 경우에는 그저 헛걸음한 셈으로 치면 된다.

‘만에 하나 모네의 진품이 아니면?’

그 사실을 미라세미술관에서 모르고 있다면 문제가 복잡해질 공산이 있다.

‘진품이든 아니든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지. 미라세미술관에서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고. 단지··· 내가 제대로 본 거 맞을까?’

호기심은 때때로 쓸데없는 일에 간섭하게 한다.

강수는 다른 이유를 떠나서 자신의 안목에 대해 검증을 하고 싶었다.

‘모네 작품이 진품이든 아니든 알 게 뭐야. 확인만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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