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그림 그리는 마법사 - 41회
아빠 회사가 부도를 면해서 한시름 놓았지만 선예의 마음은 그리 편하지 못했다.
강수에게 전인규의 사주를 고백해야 할지 아니면 그 사실을 숨겨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은 것이다.
‘고백하면 제일 속 편한데. 그건 정말 너무 싫어.’
강수에게 적지 않은 호감이 생겨버린 선예로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숨기고 싶은 과거였다.
하지만 전인규가 강수에게 적의를 가진 것이 약간 불안했다. 자신은 업소는 물론이고 전인규와도 관계를 끊었지만, 그자가 강수를 또 괴롭힐지 어떨지 알 수가 없었다.
전인규와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는 “그럼 됐다”고 가볍게 넘어가서 그런가 보다 했다. 또한 집안이 어려워서 다른 일에 신경 쓸 심적 여력도 없었다.
한데 아빠 회사가 회생하고 나니 이제 강수에게 신경이 쏠렸다.
‘도대체 강수오빠는 전 전무랑 무슨 원한을 쌓은 거지? 두 사람은 어울릴 수가 없는 사람들인데? 아무튼, 뭔가 경각심을 갖게 강수오빠한테 경고를 해줘야 하나?’
달리 생각해보면 유성 그룹 직계나 되는 사람이 강수에게 계속 관심을 가질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사주했을 때도 즉흥적으로 재미 삼아 일을 벌이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강수오빠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는 게 낫겠지?’
경고하더라도 강수가 자신이 한 일을 알아서는 안 된다.
그래야 강수와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가 있을 것이다.
벤치에 앉아 상념에 잠겨있는 선예에게 훤칠한 외모의 남자가 다가가 어깨를 흔들었다.
“선예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상념에 빠져있던 선예가 고개를 들었다.
타이트한 나시티에 반팔 남방을 걸쳐서 복근과 탄탄한 팔 근육이 고스란히 드러난 상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답게 시원한 마스크에 전신이 수영으로 탄탄하게 다져진 상남자는 동기이자 과대표 한종규였다.
“그냥, 도서관에서 책만 보려니까 답답해서.”
“답답할 땐 속을 뚫어주는 시원한 탄산음료가 제격이지. 내가 살 테니 매점이나 가자.”
“됐어. 미주한테 눈총받고 싶지 않으니까 혼자서 가.”
“미주 눈총을 왜 받아? 음료수 한 캔 하는 거뿐인데.”
종규를 힐끔 올려다본 선예가 일어났다.
“좋아, 그럼.”
자리에서 일어난 선예의 위아래를 훑은 종규가 장난을 걸었다.
“너 무슨 고민 있냐? 한동안 못 본 사이 살이 전보다 빠진 것 같다. 해결사가 속 시원하게 해결해줄 테니까 무슨 일인지 얘기해 봐.”
“흥, 미쳤냐? 고민을 너한테 상담하게. 웃기고 있어.”
“으음, 뭔가 고민이 있긴 있나 본데?”
“이게. 누굴 놀려.”
짝!
선예가 종규의 팔을 손바닥으로 때리고 걸음을 옮겼다.
“헛물켜지 말고 나한테 관심 끊어라.”
“하하. 야, 누가 너한테 관심 둔다고 그래.”
종규가 웃음을 터트리며 선예를 따라갔다.
어느덧 계절은 7월의 중순으로 접어들었다.
*
7월 20일 월요일.
계절이 계절인지라 찌는듯한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홀로 태양만이 신이 나서 열기를 내뿜었다.
이글대는 땡볕에 지쳤는지 가로수도 축 처졌다.
어김없이 더운 여름과 함께 휴가철이 왔고, 사람들은 일상에서 어디론가 떠나고자 하는 본능으로 분주해지는 계절이다. 도시인이 일에서 해방되는 짧은 여름휴가는 생존의 영역에서 벗어나 휴식의 문을 두드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장마가 끝나면서 도시의 여름은 본격적으로 타오를 것이다.
수련을 마치고 땀에 절어 집으로 돌아가던 강수는 음료수를 마시려고 편의점에 들렀다. 냉장고에서 캔을 하나 들고 계산대에 선 강수는 한쪽에 놓인 복권을 발견했다.
‘복권이네. 도대체 어떤 사람이 복권에 당첨되는 걸까?’
강수도 서울에 올라온 후, 로또나 즉석복권을 몇 번 사보았다. 살 때마다 꽝이 나와 돈만 날린 강수는 이내 흥미를 잃고 말았다.
복권이라는 것이 확률 게임이다.
주사위 두 개를 굴려서 합한 수를 맞추기도 어려운데 수백만 분의 일의 확률은 누가 맞추는지 그저 부럽기만 했다.
계산을 치르고 나가려던 강수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이센셜아이가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마법인데? 혹시 즉석복권에도 적용되려나?’
갑자기 이센셜아이가 즉석복권에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궁금증과 함께 흥미가 일어났다.
‘마나도 채웠겠다 한 번 써 볼까?’
1매당 500원짜리 즉석복권은 보통 수십 장이 뭉쳐 있다.
이센셜아이는 마나고갈 직전까지 마나를 소모한다. 정신을 잃지는 않아서 별 문제가 되진 않지만 약간의 불편을 초래할 것이다.
그것 때문에 쓸지 말지 갈등했지만 결국 궁금증 때문에 이센셜아이를 써보기로 했다.
강수는 곧장 수유역 근처 복권방으로 가서 의자에 앉아 로또 용지에 번호를 칠해 놓고, 은근슬쩍 즉석복권 뭉치에 이센셜아이를 펼쳤다.
복권에 대한 정보가 뇌리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0원, 0원, 0원··· 500원, 0원, 0원, 0원, 1000원, 0원, 0원··· 500원, 0원, 0원, 0원··· 0원.
즉석복권 수십 장의 정보가 빠르게 뇌리로 흘러들어 왔으나 유의미한 정보는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전국에 깔린 수백만 장 가운데 1, 2장만 5억짜리다. 서울에 있는 모든 복권판매점을 돌아다녀도 1등을 찾을 확률조차 얼마 되지 않는다.
50대 후반의 복권방 주인이 즉석복권을 노려보고 있는 강수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가 보기엔 강수가 조금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인 것이다.
“크윽!”
별안간 강수가 책상에 엎어지며 짤막하게 신음을 토했다.
카페에서 황태열에게 펼쳤을 때와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마나가 고갈되지는 않았지만 과다한 마나 사용으로 인해 살짝 쇼크가 온 것이다.
복권을 노려보던 손님이 갑자기 책상에 엎어지자 주인이 무슨 일인가 싶어 강수 옆으로 다가왔다.
“젊은이, 왜 그래? 괜찮아?”
대답을 할 수 없는 강수는 탁자에 엎어져서 쇼크가 풀리기를 기다렸다.
주인의 얼굴에 짜증이 묻어났다.
“아니 이 친구가 뭘 잘못 먹었나 갑자기 왜 이래?”
심장 쇼크가 처음보다 빨리 풀렸다. 강수가 고개를 들고 어눌하게 말했다.
“괘, 괜찮아요. 그, 금방 조아집니다.”
“쯧쯧, 젊은 나이에 벌써 몸이 고장 나서야··· 건강에 신경을 좀 쓰게.”
주인이 혀를 차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상당히 빠르게 정상을 회복한 강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쪽 팔리다. 빨리 나가자.’
강수는 로또를 사서 얼른 복권방을 나왔다.
즉석복권에 이센셜아이를 테스트해 본 강수는 이센셜아이의 쓰임새가 다양함을 알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굉장히 쓸모있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이센셜아이는 마나 고갈 직전까지 마나를 잡아먹는다.
이센셜아이를 마음 놓고 쓰려면 우선 마나하트부터 2서클로 만들어야 한다.
‘현실에서 쓸만한 마법 가운데 이센셜아이는 2서클, 치유마법은 3서클, 마법을 인챈트 할 수 있는 아이템 제작은 4서클이나 되어야 가능하니 먼 얘기지. 그나마 1서클 마법은 스포츠나 격투기에서 쓰면 무적일 텐데···.’
정상급 프로 운동선수는 막대한 돈을 번다. 때문에 1서클 마법사가 된 후, 잠시 스포츠를 생각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마법을 사용하면 카메라에 의해 마법이 파악되고 만다.
투수를 한다면 야구공을 뿌리고 브링크마법으로 야구공을 포수 미트에 순간이동 시키면 된다. 공 9개로 스리아웃을 시킬 수 있다.
문제는 야구공이 중간에 사라져서 포수 미트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다.
마법을 쓰면 흔적이 남는다.
마법을 써서 운동으로 돈 벌기는 애초에 그른 것이다.
권투나 격투기가 그나마 가능성이 있지만 역시 실드마법을 쓰면 실드에 막히는 부분 때문에 문제를 제기할 것이고 마법이 발각될 것이다. 실드를 조절해서 피부에 실드를 형성하면 되겠지만 그것이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안타깝긴 했지만 스포츠는 진작에 접었다.
‘무엇보다 이센셜아이를 맘대로 쓰려면 하루빨리 2서클부터 만들어야겠어···. 그런데 왜 예지마법은 없지? 그런 게 있었으면 경마나 토토, 로또로 돈을 긁을 수 있었는데. 예지마법 없는 게 아쉽군.’
아무리 마법수식을 뒤져봐도 예지마법은 없었다. 입맛을 다신 강수는 이센셜아이라도 맘대로 쓰게 하루에 2시간씩 수련시간을 늘리기로 마음 먹었다.
‘목표는 2서클. 내일부터 한 시간 일찍 일어나고 열두 시 반까지 수련이닷!’
*
인적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수풀과 나무로 우거진 북한산 자락.
스마트폰의 알람 소리가 산중의 정적을 깨드렸다.
마나회로 수련을 마치고 눈을 뜬 강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나하트에 마나를 채우는 시간이 꽤 단축되었다. 하루 두 시간씩 수련시간을 늘렸기 때문에 단축은 당연했지만, 시간을 계산해보면 이전에 비해 약 8시간이나 빨라졌다.
정확한 이유는 알 길이 없고, 마나하트가 마나를 끌어당기는 힘이 강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나가 빨리 축적되면 될수록 좋은 일이지. 아예 하루 만에 완충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새로운 결심을 한 강수는 새벽 5시에 일어나 마나회로를 수련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새벽부터 오전 수련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그림동화책의 스케치에 전념했다.
주요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정하고, 황구 죽돌이 캐릭터를 완성했다. 그리고 마을의 개들, 죽돌이와 사랑을 나누는 암컷, 마을 사람들, 사냥꾼 등등 캐릭터를 그렸다.
마을 배경을 스케치하던 강수가 의자를 뒤로 빼고 스케치를 검토했다.
‘음, 수와리를 갔다 오는 게 낫겠는데.’
‘벙어리 황구 죽돌이’ 배경은 어차피 시골 마을 이기 때문에 자신의 고향 팔랑리를 배경으로 그릴 수도 있었지만 역시 죽돌이가 살았던 수와리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 더 실감 날 것 같았다.
‘부모님도 뵐 겸 내일 갔다 오자. 그런데 집엘 가면 선을 보라고 할지도 모르는데?‘
어버이날 부모님에게 선을 보겠다고 한 후, 참한 아가씨가 있으니 한번 내려오라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었다.
전시회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는데 이번에 내려가면 선보는 자리에 끌려갈지도 몰랐다. 선보는 것이 귀찮다고 수와리만 들렀다 간 나중에 부모님에게 무슨 원망을 들을지 몰랐다.
‘집에는 밤 늦게 들어가고, 아침 일찍 도망쳐 나와야겠다.’
고민하던 강수는 나중에 부모님의 꾸중을 듣더라도 아침도 먹지 않고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
“할머니, 카트 이리 주세요. 제가 내려 줄게요.”
배낭을 멘 강수는 수와리 정거장에서 짐이 잔뜩 실린 할머니의 핸드카트를 내려주었다.
강수는 오전 수련을 조금 일찍 끝내고 서둘러 출발해서 오후 3시경에 수와리에 도착한 것이다.
사람 그림자라곤 없는 황량한 시골 도로에 두 사람을 내려놓은 버스는 요란한 엔진음을 토해내며 더 깊은 산골로 떠나갔다.
얼굴이 검고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가 따가운 햇볕을 가릴 양으로 모자를 썼다.
할머니의 입에서 노쇠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마워, 총각. 못 보던 총각인데 어디서 왔어?”
“서울이요. 할머니는 댁이 어디세요?”
“그야 수와리지.”
“저도 수와리 가요. 제가 끌고 갈게요. 카트 주세요.”
“착한 청년이구만. 고맙네, 그랴. 근데 서울에서 궁벽한 시골에 무슨 일인 감?”
“실은 저도 옆 동네 팔랑리가 고향이에요. 지금은 서울에서 살고 있는데 취재할 것이 있어서 왔어요.”
“취재? 방송국에서 일하는 감? 뭘 취재하는데?”
“방송국 직원은 아니고요. 제가 그림동화책을 그리는데 황구 이야기를 그려 보려고요.”
“황구 이야기?”
“예. 한 7, 8년 전에 죽돌이라는 개가 이 마을에 살지 않았나요?”
할머니가 작고 흐린 눈으로 강수를 올려다보았다.
“잉? 죽돌이를 알어?”
“예. 어머니가 사냥꾼 총에 죽돌이가 죽었다고 얘길 해주셨거든요.”
“홀홀, 그것참. 죽돌이를 알다니.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가? 죽돌이는 내가 잘 알지. 젊은 부부 집에 죽돌이가 살았거든. 사진도 있는 걸.”
사진이라는 말에 강수가 반색했다.
“예? 죽돌이 사진이 있어요? 제가 볼 수 있을까요?”
“못 볼 게 뭐 있나? 죽돌이 사진은 젊은 부부가 맴이 아파서 못 보겠다며 날 주고 갔지.”
얘기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할머니 집에 도착했다.
할머니가 대문을 따고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와. 날도 더운데 시원한 수박 한쪽 먹어.”
“예, 감사합니다.”
강수는 할머니를 따라 마당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