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그림 그리는 마법사 - 38회
한국청년화가 12인전 전시 폐막 전날인 13일 월요일.
강수는 오전에 마나회로 수련을 끝내고, 하산해 점심을 사먹었다. 그리고 전시회 마지막 날인만큼 수염도 깎고, 머리에 왁스도 발라 단정하게 넘겼다. 옷은 면바지에 바람이 잘 통하는 반팔 남방을 입고 곧바로 인사동 전시장으로 향했다.
종각역에서 내린 강수는 인사동 거리를 지나 선암갤러리 2층으로 올라갔다.
예상한대로 작품 ‘초대’는 빨간 딱지가 붙어있지 않았다.
팔리지 않은 것이다.
작품이 아무리 좋아도 개인전 한 번 열지 않은 작가, 게다가 작품 가격도 4백만 원씩이나 하는 작품을 구매할 관람객은 없었다.
‘종대한테 좀 미안한데. 그러기에 좀 기다려 보라니까 말을 안 듣더니. 쩝.’
4백만 원에 ‘도시의 일몰’을 구입한 종대에게 괜히 미안해졌다.
이때,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의 여인이 선물바구니를 들고 강수 부스로 다가왔다.
무심코 여인에게 시선을 준 강수가 몸을 움찔하며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렸다.
‘설마 날 찾아온 건 아니겠지?’
강수 앞에 다가온 미모의 여인은 박해나였다.
강수의 생각과는 다르게 박해나가 무심한 목소리로 강수에게 말했다.
“내가 그렇게 꼴 보기 싫은가요? 보자마자 얼굴을 돌리니 말이에요.”
강수가 고개를 돌려 박해나를 바라보았다.
“예? 아뇨? 그렇지 않은데요. 설마 날 찾아왔으리라고는 예상치를 못했을 뿐입니다.”
박해나는 민망하지도 않은지 강수의 눈을 빤히 마주보았다.
서로의 눈빛이 얽혔다.
강수는 박해나의 눈빛이 매우 순수하고 깨끗하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눈빛은 마음의 창이라고도 한다.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가공되지 않은 원석의 원초적인 느낌을 눈빛에서 느낄 수 있었다.
문득 박해나가 한마디 툭 던졌다.
“놀랍네요.”
“예? 놀랍다뇨?”
“아녜요. 혼잣말이에요. 한데 전시회 기간 동안 그림자도 보이지 않더니 오늘은 용케 왔네요?”
강수가 멋쩍게 웃었다.
“하하. 폐막 전날이잖아요.”
“전시 마지막 날이라 왔군요. 그나마 양심은 있네요. 자요, 받으세요.”
박해나가 빨간 홍옥이 잔뜩 든 바구니를 내밀었다.
강수가 엉겁결에 사과 바구니를 받았다.
“이게··· 뭐죠?”
“사과요.”
“사과? 이걸 왜 내게?”
“일전에 그림도 보지 않고 댁에게 함부로 얘기한 걸 사과하고 싶었어요.”
“아!”
“사과를 받았으니 딴말하지 말아요.”
“하하. 사과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뭐, 사과한다면야 사과도 받았으니 받아들여야죠. 참, 해나 씨의 작품 ‘혈맥’ 연작은 감명 깊게 봤습니다. 섬세하고 정밀하게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놀랍도록 처절하고, 강렬하게 감정을 파고들더군요. 굉장한 작품입니다.”
“고마워요. 나도 며칠 전에 댁의 작품을 감상했어요. 그리고 장 선배가 연줄로 참여시키지 않았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사과하고 싶었구요.”
강수가 사과를 들어 보였다.
“충분합니다.”
“기회가 되면 같이 작업하고 싶네요. 나중에 연락해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뜻밖의 제안에 강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야 시간이 허락하면 얼마든지···.”
“알겠어요. 그럼 다음에 연락하죠.”
볼 일이 끝났는지 박해나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서 걸어갔다.
“아, 저, 연락처는?”
강수의 질문에 박해나가 돌아보며 말했다.
“장 선배가 알려줬어요.”
“예에.”
강수가 허탈한 얼굴로 박해나의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박해나는 분명히 가까이 하기 쉽지 않은 여성이었다.
어디 나갔다 왔는지 종대가 반갑게 웃으며 다가왔다
“강수야, 왔냐. 임마, 출근 좀 해라. 무슨 일이 바쁘다고 전시장에 나오질 않어. 어? 탐스러운 홍옥이네? 누가 갖고 왔냐?”
“어떤 여성이.”
“여성? 설마 내가 모르는 여자냐?”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종대야, 그 동안 일반 관람객은 좀 왔어?”
“문화탐방에서 간단히 소개도 해줬고, 일간지에서도 기사를 내주어서 그런지 생각보다는 제법 온 편이야.”
“참, 아까 보니까 네 작품 한 점 팔렸더라.”
“짜식아, 그러니까 이백 정도에 내놨어야지. 척박한 미술계의 현실을 무시하면 안 된다고. 나는 25호쯤 되는 거 삼백에 책정하지 않았냐?”
강수가 환하게 웃으며 종대의 어깨를 툭 쳤다.
“하하, 네 말이 맞다. 아무튼 역시 네 작품은 알아봐 주는구나. 축하한다.”
“참나, 한 점도 팔리지 않았으면 지연 씨한테 체면 구길 뻔했다니까. 한 점이라도 팔려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아, 그리고 오전에 엄청난 미인이 와서 네 작품이랑, 내 작품, 박보람 작가의 작품을 촬영해 갔다.”
“엄청난 미인? 작품을 촬영했다고?”
“키도 크고 몸매도 쭉 빠져서 첨엔 모델인줄 알았다. 나한테 누구냐고 묻더니 작품을 찍어도 되냐고 묻기에 얼마든지 촬영하라고 했지. 그리고 슬쩍 작품을 왜 촬영하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자신이 모시는 회장님께서 미술품 컬렉터인데 우리 세 명에게 관심이 있다나. 직접 오고 싶어도 시간을 낼 수 없어서 직원인 자신이 팜플렛하고 작품 사진을 찍으러 왔다고 하더라. 운이 좋으면 컬렉터께서 네 작품을 구매할 지도 모르지.”
“그런 일도 있었어? 내 작품은 아니고 네 작품을 사가겠지. 전시 끝나고 보자.”
“그래.”
종대는 자신의 부스로 걸어갔다.
*
서준홍 회장이 퇴근한다는 문자를 받고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50대 중반의 운전기사 이춘범은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것을 보고 차 밖으로 나와 뒷문 앞에 섰다.
하이힐을 신어 늘씬한 박 실장과 신장은 비슷하지만 풍채가 좋은 서준홍 회장이 다가왔다.
이 씨가 웃으며 서준홍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어, 그래.”
서준홍은 이 씨가 열어준 뒷좌석으로 들어갔다.
박 실장이 들고 있던 봉투를 서준홍에게 건네주었다.
“회장님, 12인전 세 작가의 작품과 팜플렛, 그리고 제가 따로 조사한 프로필입니다.”
“수고했어, 박 실장. 그만 올라가 봐. 이 기사, 출발하지.”
“옛, 회장님.”
이 씨가 차 문을 닫고 운전석에 올라타 사이드브레이크를 풀었다.
벤츠 S650은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갔다.
승용차 뒷좌석에 앉은 서준홍은 실내등을 켜고 박 실장이 준 봉투를 집었다.
‘어디 세 사람의 작품을 살펴볼까?’
서준홍은 봉투를 열어 인쇄물은 옆에 두고, a3크기로 최고의 품질로 인쇄된 세 작가의 작품을 꺼냈다.
서준홍은 한 장 한 장 프린트 된 작품을 살피기 시작했다.
서준홍의 입가에 의뭉스런 미소가 걸렸다.
‘허허, 박보람은 데미안 허스트의 영향을 받았나?’
현대미술의 거장인 데미안 허스트는 브릿아트의 선두주자로 ‘죽음과 대면하는 인간의 모순된 욕망과 허위의식’이라는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죽은 동물의 사체인 상어, 양, 말 등을 오브제로 썼다.
데미안 허스트를 세상에 알린 초창기 대표작의 하나는 ‘살아 있는 이의 마음 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이라는 해석하기조차 모호한 긴 제목을 가진 작품이다.
1991년 첫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으로 죽은 상어의 사체를 포름알데히드를 가득 채운 유리수족관에 넣어 전시해 논란을 일으켰다.
사체를 이용한 예술작품?
세간의 논란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예술적 시도라고 격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파괴하는 광기 어린 행위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많다.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작가이면서 세계적으로 돈을 가장 많이 버는 생존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12인전에 출품한 박보람의 작품은 해체1, 2, 3, 4다.
해체1 ‘가족’은 가족의 해체다.
4명의 가족이 각자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좌측을 보고, 우측을 보고 있다. 특이한 점은 그림 속 사람의 몸도 분해되어 있다는 점이다.
해체2 ‘숫닭’은 100여 개의 조각으로 해체된 숫닭이 교묘하게 또 다시 숫닭의 형체를 구성하고 있는 기묘한 그림이다.
해체3 ‘빨간 해와 소나무’는 분해된 붉은 해와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는 풍경화다.
해체4 ‘연인’은 입체적으로 해체된 두 남녀가 부둥켜 안은 그림이다.
두 연인은 격렬하게 서로를 안고 있지만 당장이라도 바닥에 무너져내려 한 무더기의 육편(肉片) 덩어리가 될 것만 같다.
서준홍은 초현실적인 섬뜩한 그림에 충격 받은 듯 고개를 내저었다.
‘정상은 아닌 것 같은데? 이 여자의 정신세계가 궁금하구나···. 다음 작품은 김종대군.’
서준홍은 김종대의 작품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독특하고 강렬하군.’
김종대의 작품은 야생화여인시리즈로 ‘진달래 여인’, ‘수련꽃 여인’, ‘망초꽃 여인’, ‘붉노랑상사화 여인’ 등 4작품이다.
제목의 꽃이 배경이었고, 또한 그 꽃의 꽃잎으로 여인을 형상화했다.
꽃으로 탄생한 여인들은 꽃 속을 뛰기도 하고, 꽃 속에 누워 잠들어 있기도 하고, 꽃 위를 날기도 하고, 깜찍한 포즈를 취하고 있기도 했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꽃의 여인들이었다.
‘김종대. 이 친구도 참신하군. 이제 이강수인가?’
최이석 평론가가 칭찬을 아끼지 않은 친구였다.
‘눈물’, ‘초대’, ‘도시의 일몰’을 차례차례 살펴보았다.
첫눈에 색감이 특이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색이 중첩되고 어우러져 이미지의 아우라가 강렬하게 분출하는 고흐의 열정적인 색감이 연상되었다.
‘이 친구는 고흐의 영향을 받은 것인가?’
세 작품은 일관된 주제를 표현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인간을 그리고 있었다.
깊은 슬픔을 간직한 흑인 소년이 무심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의 작품은 ‘눈물’이다.
최이석 평론가가 공을 들여 평가한 작품이었다.
확실히 인상적인 작품이지만 인쇄물이라 그런지 최이석 평론가가 감탄했던 감정의 울림은 많이 느껴지지 않았다.
또 하나의 작품은 ‘도시의 일몰’.
쓰러지는 도시의 일몰 속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시인.
그들의 표정과 모습에서 즐겁고 희망에 가득 찬 긍정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현대를 살아가는 도시인들을 담아냈구나. 주제만큼이나 작품이 밝고 희망차군.’
세 번째 작품 ‘초대’는 ‘도시의 일몰’의 연장선과도 같은데 평화로운 일상 속에 초대되어 그림 속 인물들과 휴일의 공원을 산책하는 듯한 편안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다.
‘음, ‘초대’는 평화로운 분위기가 꼭 작품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군. 확실히 최 교수의 안목대로 세 사람 모두 뛰어나고, 독특한 자기만의 예술 언어를 갖고 있어. 원화로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지경이야.’
서준홍은 세 명의 프로필을 읽고 생각에 잠겼다.
개인전을 가진 친구는 김종대가 유일했다. 박보람과 이강수는 단체전만 참여를 했다.
미국이나 유럽의 미술계는 개인전 한 번으로 이슈 몰이를 하면서 스타작가로 한순간에 부상하는 경우가 있지만 한국미술계는 그런 잠재력이 부재하다.
젊은 작가가 국내에서 중견, 원로 선배 화가들을 재치고 인정을 받기는 쉽지 않다.
젊은 나이에 인정받으려면 아예 처음부터 외국에서 활동해 명성을 얻는 편이 빠를 것이다.
작품판매현황을 보니 ‘눈물’은 판매불가, ‘도시의 일몰’이 4백, ‘망초꽃 여인’은 3백에 판매되었고, ‘빨간 해와 소나무’는 250에 판매되었다.
나머지 8개 작품은 오후 5시 현재 판매되지 않았다.
미술계에서는 무명이나 다름없는 신진작가의 작품은 보통 일가 친척이나 지인이 구입해 간다. 물론 일반인이나 컬렉터가 구입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한두 작품 팔리는 것은 대단한 일은 아니다.
12인전에 출품된 작품은 신인답게 가격이 무척 낮았다.
‘일단 한 작품씩이라도 구입을 해 놔야겠군. 뭐가 좋을까?’
서준홍은 이강수의 ‘초대’, 김종대의 ‘붉노랑상사화 여인’, 박보람의 ‘수탉’을 사기로 정했다.
가격이 낮아서 팔리지 않은 작품을 전부 구입해도 되지만 차후 개인전을 지켜보면서 구입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 기사, 선암갤러리로 연결해.”
“예, 회장님.”
실내 스피커에서 신호음이 울렸다. 잠시 후 신호가 끊기고 예의 바른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서 회장님, 장영봉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장 선생, 반갑소. 나야 항상 안녕하지. 최 교수가 12인전을 좋게 평했더군.”
[아, 주간경제에 실린 글을 보셨군요.]
“그래. 특히 신인작가 세 명을 거론하며 기대되는 작가라고 해서 가보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못 갔지. 장 선생이 보기엔 어떤가? 최 교수 평처럼 기대주들인가?”
[저도 최 교수님의 평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저 역시 이들 세 명이 한국화단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킬 차세대 작가로서 성장해 나갈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직원이 출력해 온 작품을 살펴보았는데 확실히 괜찮더군. 그래서 말이지 몇 작품 구입하려고 한다네.”
[원하시는 작품을 말씀해 주시면 판매 여부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작품은 이강수의 ‘초대’, 김종대의 ‘붉노랑상사화 여인’, 박보람의 ‘수탉’을 구입하도록 하지.”
[회장님, 잠시만요···.]
서류를 뒤적이는 소리가 나고 곧 장영봉이 판매 상황을 얘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