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그림 그리는 마법사 - 37회
강수의 뇌리에 황태열에 관한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1978년생··· 냉소적··· 집요함··· 신중함··· 이기적··· 처세에 밝음··· 거짓말쟁이···.>
“으윽!”
쨍그랑!
별안간 강수가 심장을 부여잡고 탁자에 엎어졌다. 커피 잔이 바닥에 떨어져 요란하게 깨져나갔다.
순식간에 마나가 거의 고갈된 것이다.
황태열이 깜짝 놀라서 강수에게 다가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 작가! 이 작가.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왜 그럽니까?”
갑작스런 소동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었고, 점원이 달려왔다.
“무슨 일이죠?”
“모르겠네.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더니 쓰러져서 저러고 있으니.”
“구급차를 부를까요?”
“그, 그래. 구급차부터 불러주게.”
카페 점원이 스마트폰을 꺼내 119에 전화를 했다.
이때, 강수가 천천히 상체를 세웠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고, 얼굴색이 하얗게 변한 강수가 숨을 몰아 쉬며 점원에게 팔을 저었다.
“저, 전화할 필요 없습니다. 그, 그냥 이대로 좀 있으면 나아질 겁니다. 헉헉!”
“정말 괜찮습니까?”
“가끔 이럽니다. 몇 분만 있으면 정상이 됩니다. 병원은··· 알아서 가죠.”
잠시 강수의 상태를 지켜보던 점원이 강수의 얼굴에 서서히 혈색이 돌아오자 깨진 잔을 치우고 돌아갔다.
‘본질을 꿰뚫는다는 게 이런 거였어? 한데 함부로 쓸 마법이 아니구나. 마나가 고갈되기 직전이야. 그래도 이번엔 정신을 잃지는 않아서 다행이었어. 음, 그나저나 황 팀장이 거짓말쟁이라고? 하긴 윤대리가 임의로 작가를 교체했다는 것이 이상하다했어. 윤 대리에게 물어봐야겠다.’
생각을 정리한 강수가 초조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황태열에게 말했다.
“황 팀장님, 계약서는 나중에 작성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지금 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서요.”
“그, 그게···.”
심장발작으로 죽을 것 같았던 사람 앞에 두고 서명만 하면 된다는 말이 목구멍에 걸려서 나오지 않았다.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휴,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
“제가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전 조금만 더 쉬었다 병원에 들러야겠습니다.”
“아, 예. 예.”
서류를 챙긴 황태열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간곡하게 부탁을 했다.
“몸이 좋아지면 꼭 연락 주십시오. 그럼 몸 조리 잘 하십시오.”
황태열이 카페에서 떠나는 모습을 지켜본 강수가 스마트폰을 꺼내 윤 대리에게 전화를 했다.
강수는 윤철진과 통화한 후에 지난번 ‘눈 오는 날’의 취소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유가 뭐가 됐든 취소 건은 오히려 도움이 되기도 했던 일이라 전혀 감정이 없었다.
다만 이번 계약을 위해 윤 대리에게 모함을 씌운 것이 괘씸했다.
‘흠, 그랬단 말이지. 황 팀장님, 사장님이 특별히 지시한 모양인데 이번 계약은 힘들겠습니다.’
승리의 미소를 짓던 강수가 얼굴을 찌푸렸다.
‘아이고, 그나저나 마나를 채우려면 또 6일 동안 꼭두새벽부터 달려야겠구나. 뭐, 운동이 나쁘진 않다만.’
피식 실소를 지은 강수는 후련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토요일 오후 4시.
사당역 인근 골목 안쪽에 조금은 낡은 7층 건물 앞으로 남녀 3명이 걸어왔다.
염진구와 염진구의 마술모임에 따라온 강수, 민지였다. 습기가 높아 날씨는 후덥지근했고, 민지는 연신 손부채를 하고 있었다.
“다 왔다. 이 건물 지하에 모임장소가 있어.”
“지하에?”
“지하이긴 해도 안은 그런대로 깨끗하고, 에어컨이 있어서 시원할거야.”
“여기 라이브카페가 있네요?”
헐렁한 면바지에 반팔 티를 입은 민지가 3층을 가리켰다.
“라이브카페가 꽤 넓은 3층을 전부 쓰고 있어. 우리 모임하고도 관련이 많지.”
“선배네 마술모임하고 관련이 있다고요?”
“일단 들어가자. 설명해 줄게.”
음료수 박스를 든 강수와 민지는 염진구를 따라 건물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에는 주점이 있었는데 염진구는 옆에 붙어 있는 일루션이란 작은 팻말이 붙은 방으로 들어갔다.
15평쯤 되는 실내에는 회의용으로 쓰는 긴 탁자와 의자, 캐비닛, 책상과 컴퓨터, 책장 등이 깔끔하게 놓여 있고, 가장 구석에는 30센티 높이의 무대 단상이 있었다.
실내에 있던 20대와 30대의 남녀 5명이 강수 일행을 쳐다보며 진구를 반갑게 맞이했다.
“진구구나, 어서 와라.”
“형, 반가워요.”
“진구 씨 어서 오세요.”
“손님이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잘들 지내셨죠?”
인사를 하며 사람들 앞으로 간 염진구가 강수와 민지를 소개했다.
“이 친구는 학교 동기 이강수, 이쪽은 후배 홍민지입니다. 마술에 관심이 있다고 해서 같이 왔어요.”
강수가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처음 뵙습니다. 진구 친구 이강수입니다.”
“안녕하세요. 홍민지예요. 잘 부탁드려요.”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마술사 의상인 턱시도를 입은 깔끔한 인상의 남자가 인사를 받았다.
“일루션동호회 회장 노민석입니다. 잘 오셨어요. 두 분을 환영합니다.”
슈트와 투피스 정장을 입은 다른 일루션 멤버들도 각자 이름을 밝히고 인사를 나누었다.
노민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술은 배우는 재미가 있는 매력적인 취미입니다. 같이 마술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저도 마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많이 가르쳐주세요.”
“하하, 물론입니다.”
“민석 형, 두 사람은 처음이니까 제가 모임에 “민석 형, 두 사람은 처음이니까 제가 모임에 대해 간단하게 알려줄게요.”
“그래. 알았어.”
“강수야, 저기 앉아라. 민지도.”
강수와 민지가 회의용으로 쓸 만한 기다란 탁자에 앉았다.
냉장고에서 음료 캔 3개를 꺼내온 염진구가 강수와 민지에게 하나씩 밀어주었다.
“먼저 우리 동호회 일루션부터 소개할게. 일루션은 마술을 즐기는 사람들이 모인 취미 동호회야. 회원은 20명쯤인데 나처럼 대학원생도 있고, 직장인도 있고, 마술공연으로 돈을 버는 회원도 있어. 각자 자기 생활을 하면서 일루션에 참여하고 있는 거지.”
“어, 회원으로 가입해야 하는 거예요?”
“그래. 회원으로 가입하면 이 공간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 여기서 마술을 배우고, 마술에 대해 서로 의논하고, 공부하는 거지.”
“이런 공간을 유지하려면 회비가 필요하겠네?”
“맞아. 회비는 월5만원인데 사무실비하고, 회식이나 분기별 정기공연할 때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는데 써. 사실 이 공간은 사무실비가 아주 저렴해. 왜냐하면 3층 카페주인이 건물주인데 토요일마다 1시간씩 우리가 무료로 카페에서 마술 공연을 해주는 대신 사무실비는 아주 조금만 내는 거지.”
“아하. 그렇구나.”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신 염진구가 강수에게 물었다.
“어때? 할 맘 있어?”
강수가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즉시 대답했다.
“아, 물론 나는 마술을 배우려고 했으니까 당연히 회원가입을 해야지.”
“민지 넌 어때?”
“힝, 회비를 내야 하는 줄 몰랐네. 선배님, 탈퇴는 언제든지 해도 되요?”
“그럼. 취미 동호회모임에 강제적인 게 어딨어. 본인이 원하면 언제든지 그만두면 되지.”
“그렇구나. 마술은 누가 가르쳐 줘요?”
“하하. 일루션은 동호회라 마술을 가르쳐주는 강사가 있는 건 아니야. 일단 여기 있는 마술자료를 보고 스스로 연습하고 배우는 거야. 그리고 잘 모르는 건 선배들에게 물어보는 거지.”
민지가 마술을 배우는 것에 대해 감이 잡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런 거구나. 선배님, 회원가입은 천천히 생각해볼게요.”
“그렇게 해. 오늘은 처음이니까 마술기초 동영상하고 책장에 있는 마술 서적을 보면서 궁금한 게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 나는 공연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까.”
“예, 선배님.”
“그래. 알았다.”
*
10여 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 해왕식품의 서준홍 회장은 미술품 수집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그는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준 후 자신의 고향에 해왕미술관을 건립할 계획을 세웠고, 이미 부지까지 마련해 놓았기 때문에 사재를 털어 미술품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가 매년 사들이는 미술품의 액수는 상당해서 한국미술계에서는 영향력 있는 컬렉터의 한 명으로 대접받았다.
서준홍 회장은 미술잡지 외에도 주간경제지에 실리는 최이석의 미술계동향을 즐겨 읽는다. 미술계동향은 말 그대로 미술계의 흐름을 전반적으로 짚어주거나 미술계에서 이슈가 되는 사건, 새로운 작가의 참신한 작품을 소개하는 등 미술품 투자를 하는데 있어 참고할 만한 칼럼이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사무실에 출근한 서준홍은 책상 위에 놓인 주간경제를 집어 미술계동향이 실린 권말 쪽을 펼쳤다.
“신진청년화가들에게 거는 기대라···.”
이번 주는 미래가 기대되는 신진청년화가들의 전시와 작품에 대해 논평했다.
15년이 넘게 꾸준히 미술품에 투자를 해 온 서준홍은 작품활동을 시작한지 10년이 지나지 않은 신진작가들이 미술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꿰뚫고 있었다.
작품활동을 계속 한다는 보장이 없는 신진작가는 미래가 기대되는 몇몇 작가의 작품 외에는 한 마디로 투자대상이 아니었다.
‘가만, 이 전시회 팜플렛을 몇 주 전에 본 것 같은데?’
약 3주 전, 한국청년화가 12인전 초청장과 팜플렛을 대충 보고 쓰레기통에 버린 기억이 났다.
‘흠, 최 교수가 12인전에서 괜찮은 신인작가를 발견했나?’
호기심이 생긴 서준홍은 글을 읽기 시작했다.
서준홍이 익히 아는 신진작가들을 간단히 언급하고, 새로운 이름의 작가 다섯 명이 거론되었다. 그 가운데 세 명이 똑같은 전시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김종대, 이강수, 박보람이라. 세 명은 모두 선암갤러리에서 전시중인 12인전의 참여 작가들이군.’
다섯 명 가운데서도 한국청년화가 12인전에 참여한 이강수의 작품을 누구보다 자세하게 언급하며 개인전이 기대되는 작가로 평가했다.
‘허허, 이거 대단한 칭찬인데? 한번 가 봐야 하나?’
전시회 기간을 확인해 보니 한국청년화가 12인전은 14일까지지만 13일인 오늘이 관람 마지막 날이었다.
화요일은 보통 전시회가 바뀌는 관계로 관람할 수가 없다.
‘이런, 시간이 촉박하군.’
서준홍은 인터폰을 눌렀다. 인터폰에서 맑고 또렷한 여성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회장님, 박 실장입니다.]
“내 방으로 좀 와.”
[예. 회장님.]
문이 열리고 세련된 투피스 정장을 입은 30대 중반의 여성이 펜과 수첩을 가지고 들어왔다.
“부르셨나요?”
“그래. 오늘 스케줄이 어떻게 되지? 두세 시간 정도 시간을 낼 수 있나?”
비서실장 박연경이 즉시 대답했다.
“오전, 오후 취소하기 어려운 미팅이 잡혀 있어서 오늘은 시간 내기가 어렵습니다.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요?”
서준홍이 얼굴을 찡그렸다.
“흠, 그래? 어쩔 수 없지. 박 실장, 아무나 시켜서 인사동 선암갤러리에서 전시하고 있는 한국청년화가 12인전에 좀 보내도록 해.”
“선암갤러리요?”
“그래. 거기서 한국청년화가 12인전 팜플렛하고 홍보자료를 챙겨오고, 이강수, 김종대, 박보람 세 명의 작품은 사진을 출력해서 가져와.”
“예, 회장님. 다른 분부는?”
“내일 폐막이지만 오늘이 전시 마지막 날이니까 서둘러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회장실을 나온 비서실장 박연경은 즉시 옆 자리의 직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신유라 씨.”
컴퓨터 작업 중이던 신유라가 박연경을 쳐다보았다.
“예, 실장님.”
“하던 일 중지하고 지금 인사동 선암갤러리에 가서 한국청년화가 12인전 팜플렛하고 홍보자료가 있으면 챙겨 와. 그리고 이강수, 김종대, 박보람 작가의 작품을 촬영해서 a3 크기로 출력해 와. 만약 촬영이 안 된다고 하면 장영봉 큐레이터에게 회장님이 보내서 왔다고 하면 될 거야.”
메모를 한 신유라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투피스 정장이 잘 어울리는 170 정도의 키에 늘씬한 체형, 얼굴마저 아름다웠다. 웬만한 남자는 말 한마디 쉽게 붙일 수 없는 미모의 여성이었다.
“한국청년화가 12인전이요? 회장님은 신인작가에겐 별 관심 없지 않나요?”
“회장님이 관심을 갖는 것을 보면 유망주들이겠지.”
“신인진작가면 그림 값이 얼마 하지 않겠죠? 나도 재테크로 그림이나 수집해 볼까요?”
박연경이 입사한지 반년밖에 되지 않은 사회초년생 신유라를 보며 피식, 실소를 지었다.
“미술품 재테크를 아무나 하는 줄 아니? 그림 재테크는 쉽지 않아. 특히 젊은 작가는 워낙 리스크가 커서 작품 거래가 거의 없다고 하더라. 작품이 좋아 소장하려는 게 아니면 젊은 작가 작품은 재테크 하려고 사지는 않는다고 하지. 그리고 투자할 만한 그림은 한 점에 수천만 원은 하는데 여유 돈은 있어?”
“한 작품에 수천만 원이요? 아휴, 저한테 그런 여유 돈이 어딨어요.”
“여유 자금이 없으면 미술품 재테크는 꿈도 꿀 수 없어. 그래도 신진작가의 작품은 훨씬 싸긴 해. 20, 30호 한 점에 이삼백 정도니까.”
“이삼백 정도는 가능하죠.”
“딱이네. 12인전에 가서 정말 맘에 드는 작품이 있으면 한 점 사 봐. 미술작품을 거실에 걸어 놓으면 집안 분위기도 고급스러워지니까 재테크를 떠나서 괜찮을 거야.”
“무명작가 그림도 한 점에 이삼백이나 하니 그림은 아무나 소장할 수 없는 거 같네요. 실장님은 구입한 그림 있어요?”
“회장님 때문에 관심이 생겨서 소장 겸 감상용으로 몇 작품 사 봤는데 유명작가 작품이 아니라서 생각처럼 오르진 않았어.”
“몇 백도 실은 명품 사려고 모아 논 돈인데 마음에 드는 작품 있으면 한 번 고민해 봐야겠어요. 다녀오겠습니다.”
“응, 갔다 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