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36화 (36/197)

# 36

그림 그리는 마법사 - 36회

40대 초반의 금테 안경을 쓴 사내, 황태열은 책상 앞에 놓인 그림책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방금 전 사장에게 불려가 그림책과 함께 이강수를 섭외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다. 사장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강수를 잡으라는 명을 내렸다.

얼마 전, 윤 대리에게 ‘눈 오는 날’의 작화가로 미팅이 예정되어 있었던 이강수를 교체시켰다. 그때 일로 감정이 상해 있는 윤 대리에게 이강수 섭외를 맡기기가 꺼림칙했다.

물론 윤 대리가 이강수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잘 둘러댔지만 만에 하나 윤 대리가 입을 잘못 놀리면 자칫 불똥이 자신에게 튈 수도 있었다.

윤 대리가 아니더라도 이강수 섭외야 어려울 것이 없었다. 출판 불황이 장기화 되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일감을 준다고 하면 감지덕지 할 테니까.

‘윤 대리가 이 작가와 친하지만 아무래도 세은이가 낫겠다.’

결정을 내린 황태열은 모니터 앞에서 조판작업을 하고 있는 편집원 임세은을 불렀다.

“임세은 씨, 잠깐 볼까?”

“예, 팀장님.”

황태열은 책상 옆으로 온 임세은에게 이강수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은 메모지를 내밀었다.

“이강수라는 작화가인데 이번에 기획한 ‘내 친구는 뭉게구름’의 작화가로 제격일 것 같다. 세은 씨가 연락해서 미팅 날짜를 잡아봐. 미팅은 빠를수록 좋으니까 내일이나 모래도 괜찮아.”

임세은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 팀장님. 작가 섭외는 윤 대리님이 하지 않았나요?”

황태열이 미소를 지으며 양해를 구한다는 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윤 대리는 내가 따로 시킨 일이 있어서 그래. 이번 건만 임세은 씨가 수고 좀 해줘요. 지금 연락해 봐요.”

“··· 예.”

메모지를 들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임세은이 통화를 끝내고 황태열의 책상으로 다가왔다.

“팀장님, 전화 통화 해 보았는데요.”

그림책을 훑어보고 있던 황태열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 미팅 날짜가 언제지?”

“저, 이 작가가 일러스트는 그리지 않는다고 미안하다며 거절했는데요.”

“··· 뭐?”

황태열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임세은을 바라보았다.

“일러스트 작가가 일러스트를 그리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얘길 해봐.”

“저도 이상해서 왜 일러스트를 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앞으로 회화나 자기 작품을 할 거라며 다른 사람 그림은 그리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뭐? 회화를 그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의 황태열이 짜증을 냈다.

“아니, 이 친구가 배가 불렀나 보네. 일러스트를 하다가 무슨 회화를 그려? 회화를 아무나 그리는 줄 아나. 혹시 우리 작품 하기 싫어서 둘러댄 핑계 아냐?”

“예? 그게 무슨 말이죠?”

“아냐, 됐어. 일봐요.”

임세은이 자리로 돌아가자 황태열의 얼굴이 구겨진 종이처럼 와락 일그러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씨팔, 이 자식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회화를 그린다는 거야? 이걸 어떻게 구워 삶어? 역시 윤 대리에게 맡겨야 하나? 아니면 내가 직접 만나봐?’

사장은 이강수를 섭외해서 그림책 작업을 할 것으로 당연시하고 있었다. 더구나 사장이 직접 일러스트 작가를 지목해서 섭외하라는 지시도 기억이 가물거릴 만큼 드문 일이었다.

이강수가 회화 쪽으로 방향을 돌렸기 때문에 일러스트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떠나서 섭외를 못했다고 보고하면 욕 얻어먹는 것은 둘째고, 저돌적인 사장 성격상 직접 나설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일이 발생했다간 사장 눈 밖에 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아, 재수 없으려니까 별 시답잖은 일이 생기는구나.’

결국 황태열은 이강수를 직접 만나서 설득하기로 마음먹었다.

*

“후우, 후우!”

거친 숨을 토하며 어둠이 깔려 있는 새벽 등산로를 뛰어서 오르는 사내가 있었다. 어디부터 뛰기 시작했는지 그의 전신은 이미 땀으로 젖어서 후줄근했다.

등산로 한 지점에서 뜀박질을 멈춘 사내는 등산로를 벗어나 무성한 수풀과 잡목을 헤치고 산길을 걸었다.

등산로를 벗어나면 길을 잃기 십상이었으나 사내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갔다.

5분쯤 산비탈을 걸었을까?

사내의 앞에 수목과 부러진 나뭇가지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사내, 이강수는 마나회로 수련을 위해 새벽부터 수련장소를 찾아왔다.

강수가 이른 새벽부터 마나회로 수련에 매진하는 이유는 고갈된 마나하트에 마나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오늘이 6일째였고, 마나하트에 5/6쯤 마나가 채워졌다. 만약 하루 종일 마나회로를 수련하면 3일이면 마나하트에 마나를 가득 채울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심호흡을 몇 번 한 강수는 땀으로 젖은 조깅복을 벗고 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강수는 전시회 개막식만 자리를 지켰을 뿐 그 이후로 전시장에 나가지 않고 수련에 열중했다.

단체전이라 굳이 전시장을 지키고 있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강수는 평상시대로 가부좌를 하고 앉아 마나회로 수련에 돌입했다.

날이 순식간에 밝았고 해는 중천으로 떠오르며 뜨겁게 달아올라 대지를 달구었다.

바야흐로 성하의 계절, 7월인 것이다.

산 속임에도 불구하고 태양의 열기는 피해가지 못했다. 후덥지근한 열기가 진득하게 북한산마저 접수했다.

풀벌레와 산새만 가끔 울던 산 중에 요란하게 알람이 울렸다.

마나회로수련을 마친 강수가 가볍게 몸을 풀면서 일어났다.

“휴, 겨우 마나가 가득 찼네. 이제 ‘이센셜아이’을 캐스팅 해볼 수 있겠지? 뭐, 마나 소비가 많다고는 해도 2서클 마법이니까 캐스팅은 할 수 있겠지.”

강수는 어제 2서클 마법 가운데 하나인 ‘이센셜아이’의 마법수식을 해석할 수 있었다.

각 서클의 마법은 마법수식의 난이도와 사용되는 마나량에 의해 분류를 해놓았다.

1서클 마법사라도 두뇌가 뛰어나면 2서클이나 3서클의 마법수식을 해석하고, 깨우쳐서 얼마든지 캐스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상위 마법수식을 깨우치고도 마음대로 펼칠 수 없는 이유는 마나량과 효율성 때문이다.

보통 1서클 마법사가 2서클 마법을 캐스팅할 경우 한 번만 펼쳐도 절반에 가까운 마나를 소모하고, 심한 경우 마나고갈을 당하기도 한다. 때문에 자랄 행성 마법사는 절대 상위 마법을 펼치지 않는다.

강수가 깨우친 ‘이센셜아이’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마법이었다.

‘이센셜아이’는 본래 5서클 마법으로 5서클의 고위마법사가 되어야 펼칠 수 있지만 투팍탈이 2서클 마법사도 사용할 수 있게 본래의 효력과 기능을 크게 축소시켜서 간략하게 개량해놓은 것이다.

그대신 조심해야 될 점이 한 가지 있었는데 마법의 특성상 마나의 소비량이 다른 2서클 마법보다 많다는 점이었다.

강수가 2서클 마법인 ‘이센셜아이’를 해석한 이유는 본질을 꿰뚫는다는 특이한 효력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마법인지 모호하지만 아무래도 다른 마법보다는 실용적이고, 현실적으로 쓰임새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이센셜아이? 어떤 마법인지 궁금하단 말이지. 이걸 어떤 것에 써볼까? 참, 오늘 황 팀장이랑 약속이 있지. 배도 고프고 슬슬 내려가 보자.’

어제 해오름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었다.

작품 의뢰라 거절했는데 황팀장이 직접 전화를 해서 잠깐만 시간을 내달라고 우는 소리를 해서 어쩔 수 없이 수유역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강수는 조깅복과 쿠션방석을 챙겨서 하산을 시작했다.

*

“정말 안 됩니까?”

재차 확인하는 황태열은 애처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예. 제 그림 그리는데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일러스트는 당분간 그리지 않을 겁니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면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똑 같은 말로 더 이상 시간 끌기가 싫은 강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황태열이 의리와 그간의 정리를 내세우며 한 작품만 그려달라고 끈질기게 부탁을 해왔지만 일러스트는 조금도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또한 자신보다 뛰어난 일러스트 작가가 넘쳐나는데 왜 굳이 자신에게 매달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숲 속 다람쥐 가족’ 때문이라면 더욱 이해가 안 됐다. ‘숲 속 다람쥐 가족’은 글이 재밌기도 하고, 시기적으로 뭔가 우연히 맞아 떨어진 것이지 자신의 그림 때문에 히트한 것이 아니었다.

황태열은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 작품만 맡아달라고 막무가내로 사정하니 곤혹스럽기만 했다.

강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기미를 보이자 당황했는지 황태열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황태열이 문득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휴, 이러면 윤 대리만 불쌍하게 됐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강수가 흠칫 놀라며 의문의 눈빛으로 황태열을 바라보았다.

“윤 대리만 불쌍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죠?”

강수가 완고하게 거절하자 황태열은 인정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아, 그게··· 윤 대리가 저번 작품 ‘눈 오는 날’을 그리기로 했던 이 작가님을 임의로 다른 작가로 교체를 했거든요. 그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예? 윤 대리님은 기획회의에서 결정 난 사항이라고 했는데요?”

“아닙니다. 이 작가님에게 사정이 생겨서 작품을 할 수 없게 됐다면서 다른 작가를 추천해서 그 작가로 교체를 했습니다. 그때는 유야무야 넘어갔지요. 하지만 이번 섭외는 사장님께서 직접 지시한 사항이라 이 작가님을 섭외하지 못하면 그런 내막을 보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윤 대리가 임의로 교체를 했다고?’

의문이 들었지만 당장 알아볼 수는 없었다.

“한데 윤 대리님이 무슨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씀인지요?”

황태열의 속마음은 조마조마했으나 침울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이 작가님 섭외는 사장님께서 직접 지시한 사안입니다. 윤 대리에겐 미안하지만 아마도 다른 직장을 알아봐야 하지 않을 까요?”

“예? 작가 교체하고 섭외하고 무슨 연관이 있다고 사직까지 합니까?”

“사실 막말로 원래대로 이 작가님이 ‘눈 오는 날’을 그렸으면 지금쯤 서점에 깔렸을 겁니다. 한데 그림책은 아직도 작업 중이고, 이 작가님 섭외조차 실패하면 윤 대리가 책임을 질 수밖에 없죠.”

강수는 해오름출판사의 그림책 작업을 하면서 윤 대리에게 신세를 많이 졌다.

윤 대리가 무슨 이유로 ‘눈 오는 날’ 일러스트를 취소했는지 모르지만 오히려 강수에게는 한국청년화가 12인전에 출품할 작품을 창작하는데 있어 부담을 줄여준 셈이기도 했다.

암만 생각해도 자신 때문에 퇴직까지 당하면 너무 미안한 일이었다.

황태열은 초조한 심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는 이강수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수단을 썼는데도 먹히지 않으면 패장이 되어 빈손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 일만은 생기지 않기를 빌었다.

이때, 강수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한 작품 맡으면 윤 대리님한테 별 일이 생기지 않겠네요.”

“지난 일을 거론할 필요가 없으니까 당연히 문책받을 일이 없죠.”

“좋습니다. 그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황태열의 표정이 밝아졌다.

“예, 무슨 조건입니까?”

“기획팀과는 작품의 전반적인 스타일과 방향에 대해 한번만 의논을 하겠습니다. 스케치 검토나 그림 수정, 중간 검토는 일체 하지 않겠습니다. 이 조건이 싫으면 전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예?”

황태열은 어이가 없어 멍하니 강수를 바라보았다.

한 마디로 자신의 그림에 대해 간섭하지 말라는 얘기였다.

황당한 조건에 순간적으로 가슴 속에서 열이 뻗쳤으나 무엇보다 이강수를 섭외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황태열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미친 놈. 네 따위가 뭐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달어? 사장만 아니었어도.’

황태열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이 작가님 실력이면 수정은 필요 없을 겁니다. 그럼 계약서를 준비해 왔으니 작성을 하죠.”

황태열이 잽싸게 서류가방에서 계약서 2부를 꺼내 탁자에 펼쳤다.

“사장님의 특별 지시라 화료는 이전의 계약에서 했던 금액 기준으로 10% 인상했습니다. 괜찮습니까?”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은 강수는 크게 차이도 나지 않는 화료 때문에 신경전을 벌이기가 싫었다.

어쨌든 10%라도 화료가 인상됐기 때문에 동의했다.

“예. 알겠습니다.”

계약서 내용을 간단하게 살펴보고 품에서 만년필을 꺼낸 강수가 날짜를 적어 넣었다.

2020년 7월 7일.

계약서에 날짜를 적어 넣고 사인을 하려다 무심코 힐끔 황태열을 보았다.

꺼름칙하게도 황태열은 득의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계약을 하게 된 것을 기뻐하기보단 승리자나 먹이를 잡아챈 맹수의 느긋한 여유의 느낌을 받았다.

‘젠장, 왜 저렇게 느끼하게 웃는 거야? 왠지 기분이 나쁜데. 뭐지?’

황태열이 표정을 수습하고 물었다.

“왜 그러시죠? 계약서에 잘못된 내용이라도 있습니까?”

강수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고.”

‘당신의 속마음이 뭔지 찜찜해서 그래. 가만, 이센셜아이!’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마법.

사람에게도 통할지 불확실하지만 실패해도 마나만 소모될 뿐이었다. 마나는 며칠만 노력하면 다시 채울 수 있었다.

‘밑져야 본전이다. 그렇지 않아도 무엇을 테스트할지 몰랐는데 당신한테 써봐야겠어.’

강수는 눈을 살짝 내리깔고 황태열을 바라보며 속으로 마나수식을 영창했다.

영창이 끝난 후, 작은 목소리로 캐스팅을 했다.

“이센셜아이!”

“··· ?”

강수의 뇌리에 황태열에 관한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1978년생··· 냉소적··· 집요함··· 신중함··· 이기적··· 처세에 밝음··· 거짓말쟁이···.>

“으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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