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35화 (35/197)

# 35

그림 그리는 마법사 - 35회

카드를 꺼내 놓고 탁자를 치운 염진구는 좌중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인 것을 속으로는 기꺼워하면서도 내색하진 않았다. 일부러 강수 앞에 앉은 것도 기회가 오면 갈고 닦은 마술을 뽐내고 싶어서였다.

“좀 갑작스러워서 준비한 것이 많지는 않지만 평상시에 하던 간단한 카드마법을 보여줄게.”

차라라락!

염진구가 포커 카드를 오른손에 들고 살짝 휘더니 약간 밑에 있는 왼손으로 카드를 튕겨 보냈다.

포커 카드는 흡인력에 빨려 들어가듯이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몇 번 간단하게 손을 푼 염진구가 카드마술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홍민지에게 한 벌의 카드에서 임의로 카드를 빼내게 한 후 그 카드를 맞추거나, 강수가 골라낸 카드를 카드 중간에 넣고 기합을 주자 맨 위로 올라와 있기도 했다.

기초 카드마술에서 점차 고급 기술을 선보이자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와, 잘한다.”

“아예 마술사로 전업해라.”

환호성이 터지자 근처 탁자에 있던 사람들도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염진구를 바라보았다.

염진구는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을수록 짜릿한 느낌이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듯한 쾌감을 느꼈다.

‘크으. 바로 이 맛이지.’

평범한 외모와 평균 신장에도 못 미치는 키는 염진구에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주었다.

학창시절, 외모 때문에 여자애들에게 무시당할 때는 자신을 낳은 부모가 미웠고, 자신의 존재가 증오스럽기까지 했다. 고통스러웠던 학창시절에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있었다면 미술이었다.

그림은 학교의 그 누구보다 뛰어났다. 결국 염진구는 그림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고 자랑스럽게도 홍우대 미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중, 고등학교 시절에 받았던 상처를 보상받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기분도 잠깐이었다.

동기들과 자신을 비교하다 보니 또다시 열등감에 빠지고 말았다.

대부분의 동기들은 그림도 잘 그렸지만 자신보다 키가 크거나, 체격이 건실하거나, 얼굴이 잘생겼다. 그림 밖에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었던 염진구는 절망 속에서 다시 그림에 파고들었다.

자신의 친구이자 동반자는 오직 그림뿐이었다.

좌절을 씹으며 그림에 열중할 때 고등학교 동창회가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홍우대 회화과에 입학했기 때문에 전혀 꿀릴 것이 없었던 염진구는 동창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평범하게 생긴 서용익이란 친구가 마술을 연기하며 좌중을 휘어잡는 광경을 보았다. 그 때 염진구의 정수리를 뚫고 한줄기 전율이 지나갔다.

염진구는 서용익에게 마술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이 뭔지 물었고, 인터넷 카페에 가입해서 시작해보라는 조언을 얻었다. 집에 돌아온 염진구는 즉시 카페에 가입하고, 오프라인 모임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마술에 입문한 것이다.

좌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염진구는 끓어오르는 희열을 느끼며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마술을 준비했다.

지금 펼치려는 마술은 엄청난 연습 끝에 성공한 자신의 최고 마술이었다.

염진구는 수십 명이 모여 있는 좌중을 둘러본 후 말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보여 드리겠습니다.”

염진구가 품에서 하얀 색의 천을 꺼내 펼쳤다.

폭 13센티, 길이 65센티 정도 길이의 기다란 천이었다.

“보다시피 일반적인 천입니다.”

옆에 앉은 민지에게 만져보라고 손짓을 했다. 홍민지가 천을 만져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천 맞아요.”

염진구는 천을 반으로 접고 좌중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을 다시 반으로 접었다. 결국 천은 작아져서 최후로 접었을 때는 포커카드 크기로 접혔다. 그 순간 염진구의 손에 있던 천이 한 벌의 카드로 변했다.

“와!”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카드 한 벌을 반으로 분리해 양 손에 쥐고 손가락을 움직이자 양 손에서 카드가 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라서 펼쳐졌다.

원 핸드 패닝이라는 기술이었다.

염진구가 패닝된 카드를 모으고 양 손을 합쳐서 쭉 벌리자 처음의 하얀 천이 양 손 사이에서 나타났다.

본래의 천으로 돌아간 것이다.

아마추어가 펼치기에는 굉장히 고급 마술이었다.

짝짝짝!

휘익-

“우와, 진짜 마술사네.”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즐거워하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감사합니다. 간단하나마 마술 시범을 마치겠습니다.”

염진구가 사방으로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주위에 몰려서 염진구의 마술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진구야, 굉장하다. 네 수준이면 마술사해도 되겠다.”

“하하, 아냐. 나는 아마추어지 프로 마술사하고는 거리가 멀어.”

옆에서 연신 우와, 하며 감탄을 하던 민지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와, 진구 선배님, 멋있었어요. 대단해요. 완전 마술사 같았어요.”

“하하, 고맙다.”

얼음공주 정미도 변함없는 표정으로 한 마디 던졌다.

“수고했어요, 선배.”

“어, 그래.”

이때, 서빙 직원이 생맥주 다섯 잔과 마른 오징어 등 몇 가지 안주를 가져왔다.

민지가 대뜸 눈을 크게 뜨고 서빙 직원을 쳐다보았다.

“이건 뭐죠? 우리가 안 시킨 건데요?”

“마술을 잘 봤다고 몇몇 손님들이 시켜준 겁니다.”

“어머, 그래요?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호호. 마법을 하니까 이런 부수입도 생기는구나. 매너 있는 사람들도 있네.”

마술을 흥미롭게 지켜본 강수가 염진구를 불렀다.

“진구야, 마술은 어디서 배웠냐?”

“어? 왜?”

“실은 나도 마술에 관심이 좀 있는데 취미로 배워볼까 해서.”

“그래? 요즘 마술 아마추어 동호회가 많이 있어. 인터넷 카페도 있고, 오프라인에도 몇 군데 있다. 관심 있으면 내가 나가는 마술 모임에 나가볼래?”

“아, 그럼 좋지. 언제 모이냐?”

“매주 토요일에 모임을 갖는데 회원 전부가 모이는 건 아니고 시간 날 때 자유롭게 나가면 돼. 모임에 나온 회원들끼리 정보도 공유하고, 자신이 익힌 마술도 시현할 기회가 있어.”

“그거 괜찮은 모임 같다. 넌 언제 나가냐? 나 좀 데리고 가라.”

“난 한 달에 두 번 정도 참석해. 다음 주에 나갈 건데 같이 갈 거면 시간하고 장소를 문자로 알려줄게.”

“좋아. 전시회 작품 끝나고 요즘 시간 많다. 같이 갈 테니 문자 줘라.”

“알았다.”

잠자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홍민지가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선배님, 나도 마술 배우고 싶은데 끼워주면 안 돼요?”

홍민지를 바라보는 염진구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표정이 밝아졌다.

“안 될 건 없지만 마술을 보는 거하고 배우는 건 좀 많이 다른데.”

“물론 쉽진 않겠죠? 그래도 한번 도전해볼게요.”

“알았다. 다음 주에 같이 가자.”

홍민지가 정미를 꼬드겼다.

“정미야, 너도 같이 가자. 어때?”

정미는 마술에 별 관심이 없는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난 보는 것으로 만족하거든. 너나 가서 많이 배워.”

“치, 기집애 하고는.”

강수가 마술을 배우려는 이유는 마법을 마술로 자연스럽게 포장하기 위해서였다. 강수가 검색해서 알아본 마술은 트릭과 눈속임, 손기술, 과학의 원리와 최첨단 기술까지 총동원된 종합공연예술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강수가 본 영상으로 마술을 판단하면 마법과 다르지 않았다.

마술을 이용하면 마법을 마술이라고 착각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마법을 펼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겠지만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기만 해도 괜찮았다.

*

선암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12인전을 살펴보던 국운대 미대 교수이자 미술평론가 최이석은 가장 마지막에 전시된 세 작품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한참을 세 작품의 앞에 서 있던 최이석은 탄성을 내뱉었다.

“허, 이거 물건인데?”

그의 관점에서 평가하자면 한국화단을 이끌고 갈 박해나, 김이연, 장동운의 작품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뛰어난 작품이었다.

명찰에서 작가를 확인한 최이석은 머리를 갸웃했다.

‘이강수?’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작가였다.

최이석은 팜플렛에서 이강수를 찾아보았다.

‘음, 홍우대 회화과 18년 졸. 춘천청년문화제 단체전, 수원 수원성문화제 단체전 등 두 번 참가? 홍우대를 졸업한 이력 외엔 경력은 전무하다시피 한데 이런 굉장한 작품을 출품했어?’

궁금증을 견디지 못한 최이석은 스마트폰을 꺼내 홍우대 미대 교수로 재직 중인 친구 김익현 교수에게 전화했다.

신호가 끊기고 대뜸 칼칼한 목소리가 최이석의 귀청을 울렸다.

[최 교수, 웬일인가?]

“통화 괜찮은가?”

[괜찮아. 얘기하게.]

“혹시 18년에 졸업한 이강수라고 알고 있나?”

[18년에 졸업한 이강수를 아냐고? 음··· 그런 학생이 있었지. 한데 왜 그러나?]

“실은 선암갤러리에서 개최한 한국청년화가 12인전에 관람을 왔는데 이강수 작가의 작품이 신선한 충격을 줘서 말이지. 한데 팜플렛에 나온 경력은 단체전 두 번 분이라서 학부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궁금해서 전화 했다네.”

[한국청년화가 12인전? 이강수 작품이 자네가 충격을 받을 정도로 그렇게 뛰어나단 말인가?]

“단지 내 관점으로 그렇다는 얘기일 뿐이야. 사람마다 선호하는 경향이 다르니까.”

[허허. 아무리 관점이 달라도 최 교수의 눈에 들 정도면 보통이 아니란 것은 뻔하지. 이강수는 좀 특이했어. 이 친구는 테크닉이 매우 뛰어난 친구였다네.]

“테크닉이?”

[이 친구가 맘만 먹고 그리면 사진처럼 정밀하게 그리는 굉장한 재능을 가졌어. 하이퍼리얼리즘을 그리면 제격일 정도야. 문제는 그 틀을 깨고 더 큰 세계로 나가지 못했다네. 즉, 조형성과 창의성, 예술성의 부재가 이 친구의 문제라네. 이건 나만이 아니라 대부분 교수들의 공통된 지적이야. 이강수도 그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일러스트 쪽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알고 있네. 사실 종대에게 한국청년화가 12인전에 참가한다는 얘길 듣긴 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 한데 자네가 높게 평가하니 제자의 작품이 어떤지 나도 궁금해지는군.]

“김 교수 말대로라면 이강수는 그 틀을 깨고 나온 것 같네. 12인전에 전시된 작품 가운데 눈 여겨 볼 작품이 여럿 있으니 와서 확인해 보게나.”

[그래? 최 교수가 추천을 하니 가 봐야겠군.]

“고맙네, 김 교수. 그럼 정례모임에서 보세.”

[알겠네.]

최이석은 스마트폰을 가방에 넣고, 다시 이강수의 작품을 감상했다.

고개를 끄덕인 최이석은 다음 주 주간경제에 기고할 칼럼 <미술계동향>으로 최근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청년 화가들을 다루기로 마음먹었다. .

*

“엄마, 나 이 책 사 줘요.”

어린이 그림책 부분 베스트셀러를 모아 놓은 진열대로 달려온 꼬마아이가 둘레둘레 진열대를 살펴보더니 그림책을 한 권 냉큼 집어서 삼십 대 후반의 여인에게 내밀었다.

“어디 보자.”

꼬마의 엄마는 아들이 내민 그림동화책을 들고 표지와 제목부터 살폈다.

“숲 속 다람쥐 가족. 베스트셀러 1위 책이네? 찬솔아, 이 그림책 어디가 좋아?”

“아림이가 토리도 모른다고 놀리잖아. 토리가 뭐냐고 했더니 그림책 보면 나온다고 했어.”

“토리?”

“응, 여기 파란 눈 다람쥐가 토리야.”

“으응, 토리가 정말 깜찍하고 귀엽구나.”

그림책을 뒤적이며 내용을 살펴본 아이 엄마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야기도 재밌겠는데. 좋아, 이 책으로 하자.”

여인이 책을 아들에게 건네주었다.

“이야, 신난다.”

그림책을 품에 안고 기뻐하는 아이의 손을 잡은 여인이 계산대로 갔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50대 초반의 고급스러워 보이는 양복을 입은 중년인이 그림책을 집었다.

‘글, 함초롱. 그림, 이강수. 으음.’

중년인은 해오름출판사 사장 양승조였다. 그는 인터넷서점사이트에서 그림책 부분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숲 속 다람쥐 가족’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직접 대형서점에 나온 것이다.

그 자리에 서서 그림책을 전부 읽은 양승조는 그림책을 덮었다.

‘글도 좋고 그림도 맛깔스럽구나. 하긴 그러니까 베스트셀러에 올랐겠지.’

쓱쓱 힘들지 않게 그린 것 같은데도 캐릭터에서 생동감이 넘쳤다.

‘이강수라···.’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우리 그림책도 그린 작가 같은데?’

해오름출판사는 규모가 꽤 큰 중견출판사로 사장인 양승조가 일러스트 작가를 전부 기억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양승조는 매장에 설치된 검색대에서 자신의 출판사에서 나온 그림책을 훑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강수가 그린 그림책을 다섯 권이나 발견한 것이다.

‘좋아, 잘됐군. 황 팀장에게 당장 이강수 작가를 섭외하라고 해야겠다.’

양승조는 계산대에서 ‘숲 속 다람쥐 가족’을 계산하고 잰걸음으로 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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