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그림 그리는 마법사 - 34회
전시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박해나, 김이연, 장동운 같이 이미 화단과 평단(評壇)에서 검증 받은 신진작가의 참여가 이슈가 되었는지 전시회 첫날부터 여러 매체에서 온 기자가 취재를 하고 갔다.
취재 대상은 새로운 신진작가의 발굴이라는 전시 취지가 무색하게 박해나 등 3인으로 집중되었다. 장래가 유망한 신진작가가 주목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3인 외에 몇몇 작가가 인터뷰 요청을 받았으나 강수를 찾는 기자는 한 명도 없었다. 팜플렛에 소개된 청년 작가 중 개인전조차 개최하지 않은 작가였기 때문에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강수에게 세 명의 청년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작품활동과 알바를 병행하고 있는 대학동기였다.
세 친구들이 악수를 청하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이강수, 오랜만이다. 대체 이게 얼마만이냐?”
“너 본지 이 년도 넘은 것 같다.”
“뭐 이리 얼굴 보기가 힘들어. 잘 지냈냐?”
강수가 한 명씩 악수를 나누며 반갑게 맞이했다.
“나야 잘 지냈지. 어서 와라. 반갑다.”
“종대한테 연락 받았다. 너도 작품 출품했다면서? 이건가?”
“그래. 여기 세 작품이야.”
세 명이 강수의 작품을 훑어보면서 탄성을 질렀다.
“야, 일러스트 한다면서 언제 또 이런 작품까지 그렸냐? 대단하다.”
“오, 작품 좋다. 몇 년 못 본 사이 화풍이 엄청 변했다.”
“이 작품은 뭔가 굉장한데. 눈빛이 꼭 내 폐부를 뚫는 것 같다.”
세 친구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건지 의례적인 건지 모를 칭찬을 한 후 종대 작품이 전시된 부스로 갔다.
동기 외에 선배, 후배들도 여럿 찾아왔다.
“선배님, 이러다 확 뜨는 거 아녜요?”
“유명 작가가 되면 아는 채라도 해 주세요.”
밝은 얼굴로 인사치레인지 모를 칭찬을 하고 금방 자리를 떴다.
이렇듯 전시장에는 적지 않은 동기와 동문선후배가 찾아왔으나 간단히 안부인사와 덕담을 하고 종대 작품이 설치된 부스로 가서 종대와 어울렸다.
그들은 강수가 아니라 종대의 연락을 받고 왔다가 덤으로 강수 부스를 들린 것이다. 때문에 강수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강수는 제대하고 복학 후, 후배와 강의를 들었다.
동기 가운데 같은 3학년은 강수보다 한 달 먼저 제대한 종대가 유일했고, 4학년에는 장범일과 이동석이 남아 있었다. 그 외 동기들은 휴학을 했거나 졸업을 했다.
강수와 친한 동기는 이렇게 셋이었으나 종대는 셋 중에서도 각별한 절친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강수는 종대와 대부분의 강의를 같이 들었기 때문에 3, 4학년을 붙어 다니며 그림은 물론이고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의 문제에 대해 토론을 벌이며 우정을 돈독히 했던 것이다.
캐주얼한 스타일의 옷차림을 한 노년의 신사가 종대와 함께 강수의 부스로 다가왔다.
청색의 콤비 자켓에 청바지를 입고 비비화 운동화를 신은 노년의 신사는 다름 아닌 자신만의 반추상 세계를 구축한 교수 심두섭이었다.
‘심 교수님!’
강수는 앞으로 달려가 넙죽 인사를 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아, 강수군.”
“그 동안 찾아 뵙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살다 보면 그럴 수 있지 뭐가 죄송해. 그리고 나는 말이야 제자들이 쓸데없이 인사나 한다고 찾아오는 것보다 이렇게 작품으로 불러주는 것이 더 좋다네. 어디 강수군 작품 좀 볼까?”
심 교수가 강수의 작품에 시선을 주었다.
강수는 약간 긴장했다.
재학시절 심 교수는 강수에게 기교는 만점이지만 주제를 표현해 주는 색감과 조형성이 부족하다고 쓴소리를 많이 했었다.
순수회화 쪽으로는 발전이 없다고 보았는지 나중에는 강수에게 하이퍼리얼리즘이나 아예 상업미술 쪽이 낫겠다고 직언을 했다.
가차 없는 비평으로 강수를 벼랑으로 몰아붙인 심 교수는 강수에게는 까다롭고, 어려운 스승이었다. 지금도 심 교수에게 어떤 평가를 받을지 긴장한 낯빛을 하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심 교수의 감상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심 교수는 생각보다 오랫동안 강수의 작품을 감상했다.
마침내 작품에서 눈을 뗀 심 교수가 미소를 지으며 강수의 어깨를 다독였다. 예상하지 못한 심 교수의 행동에 강수가 움찔 했다.
“강수군.”
“예, 교수님.”
“예전의 자네 작품하고는 완전히 달라졌어. 주제가 직관적으로 표현됐을 뿐만 아니라 눈물 같은 작품은 절망과 구원, 용서와 용기 같이 중의적인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어. 순수회화가 바로 이런 그림이지. 내가 굳이 뭐라고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참 좋아. 장족의 발전을 했어. 앞으로의 작품활동이 기대된다네. 개인전을 열면 꼭 내게 연락해.”
“예, 감사합니다.”
강수는 심 교수의 작품 평가에 살짝 놀랐다.
‘내가 심 교수님에게 칭찬을 다 받다니! 나만 괜찮아 보이는 것이 아니었어!’
가슴이 기쁨으로 뿌듯하게 차올랐다.
심 교수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그나저나 오늘은 발걸음 한 보람이 있어. 종대 작품도 마음에 드는데 강수 네 작품마저 나를 놀라게 했으니 말이지. 기분 최고다.”
종대가 맞장구를 쳤다.
“하하. 강수가 교수님 칭찬을 몇 년 만에 듣는 거죠? 하도 오래 전 일이라 말이죠.”
과거가 생각났는지 심 교수가 멋쩍은 듯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진작에 이렇게 그렸으면 얼마나 좋았어.”
“참, 교수님, 관람시간이 곧 끝나면 뒤풀이가 있습니다. 참석 하실 거죠?”
심 교수가 품에서 봉투를 하나 꺼냈다.
“젊은이들 술자리에 내가 끼어서 뭐해. 두 제자가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출품했으니 마음이 아주 뿌듯하군. 나는 자네들의 작품을 감상한 것으로 만족해. 뒤풀이는 젊은이들끼리 부담 없이 갖도록 하게. 이건 뒤풀이에 보태 쓰고.”
심 교수가 금일봉을 하사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입이 찢어진 종대가 넙죽 허리를 숙여 금일봉을 받았다.
*
오후 6시가 넘어가자 전시장에 하루 일과를 마친 직장인들도 찾아오기 시작했다
강수는 앞에서 종대와 함께 꽃다발을 들고 오는 날씬한 몸매의 여성을 보고 반갑게 맞이했다.
몸매에 어울리는 화사한 옷을 입은 여성은 종대와 동거하고 있는 송지연이었다.
“지연 씨, 어서 오세요. 오랜만이죠? 반갑네요.”
“안녕하세요. 전시회 축하 드려요. 이거 받으세요.”
“하하. 고맙습니다.”
강수가 송지연이 내미는 꽃다발을 받았다.
“사실 이렇게 전시회 참가할 수 있었던 게 다 종대 덕분이죠. 제가 친구 하나는 잘 둔 것 같습니다.”
“그럼, 나만한 친구는 어디 가도 만나보기 어려울 꺼다.”
강수에게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인 종대가 송지연을 작품 도시의 일몰 앞으로 잡아끌었다.
“자기, 이리와. 아까 전화로 얘기한 작품이 바로 이 ‘도시의 일몰’이야. 이거 놓치면 나중에 엄청 후회할 테니까 지금 잘 보고 결정해.”
“치, 알았어.”
중소기업인 GL전자에 다니는 송지연은 예술적인 감수성이 풍부한 여성이었다. 예술에 대한 공통분모가 있어서 종대와 같이 사는 지도 몰랐다.
도시의 일몰을 살펴보는 송지연의 입이 살짝 벌어지며 놀란 표정으로 변해갔다. 송지연은 눈물을 감상하고는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송지연의 반응을 주시하던 종대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만족에 겨운 얼굴로 말했다.
“자, 직접 보니까 소감이 어때?”
“자기가 얘기한 작품이 ‘도시의 일몰’이었지?”
“그래. 눈물은 판매하지 않겠대. 그래서 도시의 일몰을 찍었지.”
“좋아, 나도 맘에 들어. 자기, 우리 이 작품 구입하자.”
“정말이지. 하하. 역시 우리 지연 씨는 작품 보는 눈이 있다니까.”
강수가 자신의 작품을 구입하려고 하는 두 사람을 난감한 얼굴로 번갈아 보며 쳐다보았다.
“저, 지연 씨, 지금 구입하면 사백이나 하는데 정말 구입하려고 그래요? 이 작품 안 팔리면 종대한테 백만 원에 넘기기로 했거든요. 솔직히 살 사람도 없을 텐데 좀 기다려보는 게 어때요?”
“음···.”
뭔가 생각하던 송지연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훌륭한 작품은 그림에서 빛이 나요. 그 빛을 알아보는 사람이면 기꺼이 사백을 지불하지 않겠어요? 그럴 바에야 종대오빠 말대로 제값 주고 먼저 사는 게 나아요.”
“그럼, 그럼. 본래 미술 작품은 거실에 걸어 놓으면 집안의 품격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해주어서 좋고, 매일매일 아름다운 작품을 감상해서 좋고, 한 10년쯤 지나면 열 배의 가치를 형성할 수도 있어서 좋은 거지.”
“후후, 꿈보다 해몽이 좋다만 어쨌든 내 작품을 구입해 준다니 고맙다.”
이렇게 강수의 ‘도시의 일몰’은 종대가 구입하게 되었다.
*
한국청년화가 12인전 전시 첫날은 12명이나 되는 참여 작가의 지인들이 찾아와 좁지 않은 전시장이 사람들로 넘쳤다.
박해나의 작품이 전시된 첫 번째 부스, 김이연의 작품이 전시된 두 번째 부스, 장동운의 작품이 전시된 세 번째 부스는 유독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다들 자신의 작품 옆에 붙어 손님맞이에 분주했고, 성황리에 전시 첫날이 지나갔다.
오프닝이 열리는 수요일 저녁 인사동 주변 음식점과 술집은 뒤풀이 하는 화가와 미술관계자들로 붐빈다. 종로2가 뒷골목에 위치한 벤스호프도 뒤풀이를 하는 사람들의 환호성으로 떠들썩했다.
종대와 강수가 53여 명의 동문선후배가 모인 자리에서 인사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자리까지 빛내주신 동문선후배님, 특히 바쁜 와중에도 찾아와 축하와 금일봉을 하사하신 선배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럼 인사말은 이것으로 마치고 즐겁고 흥겨운 시간을 보내도록 하죠.”
짝짝짝짝!
박수와 함께 환호성이 터졌다.
“종대야, 작품 좋다. 앞으로 쭉쭉 질주해라.”
“축하합니다. 선배님.”
“강수 선배님도 축하해요.”
사람들의 환호성과 축하를 받으며 종대와 강수가 500cc생맥주잔을 높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모두 건배하죠. 잔을 들어주세요.”
삼십여 명이 잔을 들었다.
“홍우대 회화과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위하여!”
쨍!
종대와 강수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강수는 술을 적당히 마시는 편이지 즐기거나 폭음하지 않는다. 예외가 있다면 종희의 이별통보를 받고 나서 몇 번 폭음한 정도다.
하지만 자리에 앉은 강수는 동기와 선후배가 다가와 덕담과 함께 따라주는 축하주를 마다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소주 다섯 잔을 연속으로 들이켰고 머리가 어찔할 정도로 술기운이 올라왔다.
벤스호프에는 홍우대 팀 말고 또 한 팀이 뒤풀이를 하고 있어서 실내는 웃음소리와 환호성으로 왁자지껄했다.
“진구야, 서한대에서 박사과정 밟는다고 했지? 거기서 공부는 할 만하냐?”
강수가 앞에 앉은 동기, 약간 마르고 왜소한 체격의 염진구에게 말을 걸었다.
염진구는 박사과정을 시작한 학구파로 군대를 연기하고 곧바로 서한대 미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하하. 서한대에서 받아준 것만 해도 감사하지. 한데 머리 좋은 얘들하고 있으려니 죽을 맛이다.”
“그 학교는 텃세가 세다고 하는데 용케 버티는 걸 보니 대단하다.”
“그러게 왜 거길 갔는지 모르겠다. 아, 전시회 축하한다. 작품이 전부 좋더라. 특히 눈물은 뭔가 가슴에 깊은 울림을 주더라.”
염진구의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후배 홍민지가 맞장구를 쳤다.
“저도 눈물이 정말 좋았어요. 사실 첨엔 잘 몰랐는데 뭔가 느낌이 와서 계속 살펴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려고 해서 참느라고 혼났어요.”
“정말?”
민지와 단짝인 얼음공주로 알려진 윤정미가 특유의 차가운 얼굴로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정말이에요. 제가 옆에서 봤는데 정말 울 듯한 얼굴이었다니까요. 난 얘가 갑자기 왜 눈물을 글썽이나 했어요.”
“치, 그런 작품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네가 이상한 거야.”
윤정미가 눈을 치떴다.
“뭐어. 물론 나도 눈물을 감상하고 감명받긴 했지만 그림 보고 울먹이는 네가 너무 감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강수가 쾌활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민지, 너 혈액형 B형이지?”
“어, 어떻게 제 혈액형을 알았어요?”
“B형이 원래 눈물이 많고 감상적이거든. 슬픈 드라마나 영화 보면 울지 않어?”
정곡을 찔린 민지가 발끈해서 앙칼지게 외쳤다.
“그, 그렇긴 해도 작품 보고 눈물이 날려고 한 적은 처음이에요.”
“하하. 그래, 알았다.”
이때, 옆 테이블에서 남자 후배가 염진구를 향해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진구 선배님, 두 선배의 전시회를 축하할 겸 카드마술 좀 보여주세요.”
“카드마술?”
강수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진구야, 너 카드마술 할 줄 알아?”
“아, 하하. 몇 년 전부터 취미 삼아 좀 배우긴 했지만 프로도 아닌데 잘못하지.”
세 개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10여 명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에게 모이자 염진구가 팔을 저었다.
“술이 좀 들어가서 지금은 좀 힘들 거야.”
“그러니까 술 취하기 전에 조금만 보여주세요.”
진구 옆에 앉은 민지가 재밌다는 얼굴로 진구의 팔을 잡고 애교를 떨었다.
“어머, 선배님, 카드마술 하실 줄 아세요? 와, 마술 보고 싶다. 한번 보여주세요? 예? 선배니임.”
민지의 애교에 넘어간 염진구가 머쓱하게 웃으며 항복했다.
“하하. 이거 참. 그럼 간단한 걸로 몇 가지만 해 볼까?”
사실 염진구는 자신의 외모콤플렉스를 극복하려고 마술을 틈틈이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 모임에서 그 효과를 톡톡히 보았고 꽤 만족스러워 했다. 예의상 한차례 거절했던 염진구가 자신 있게 품에서 카드를 한 벌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