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그림 그리는 마법사 - 33회
강수는 종각역 승강장으로 진입한 전동차에 올라탔다.
퇴근시간이 지났어도 전동차는 승객으로 넘쳤다.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도 두 남자의 대화가 강수의 귀에 파고들었다.
“내가 봤을 땐 화단에서 생겨난 돌개바람은 분명히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란 말이야.”
“그러니까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하지 않냐?”
“초자연적인 현상이 어떻게 연달아 두 번이나 같은 장소에서 발생하냐?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지. 아무래도 그 등산복 입은 남자가 초능력자 아닌가 싶다.”
“너처럼 그 남자를 초능력자란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세상에 초능력자가 어딨냐? 제임스 댄디라는 마술사가 그 어떤 초자연현상이라도 자신 앞에서 입증하면 백만 달러를 상금으로 지급한다고 했지만 50년이 넘도록 그 돈을 가져간 사람이 한 명도 없거든. 결론을 내리면 초능력자는 없다는 거야.”
“그건 그거고. 내가 그 영상을 수십 번은 봤거든. 정황상 그 남자가 돌개바람을 일으킨 게 틀림없어. 나는 확신한다.”
“됐다, 임마. 백만 달러 초자연현상 규명 프로젝트나 검색해 봐. 초능력은 다 사기라는 걸 알 테니까. ”
‘뭐, 백만 달러 상금?’
두 청년의 대화중에 상금 백만 달러가 강수의 귀에 쏙 들어왔다.
백만 달러면 10억 원이 넘는 상금이 아닌가!
흥미가 동한 강수는 스마트폰을 꺼내 마술사 제임스 댄디를 검색했다. 초능력에 관심이 없어서 몰랐지만 제임스 댄디는 초능력사냥꾼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귀신사냥꾼, 심령사냥꾼이기도 했다.
즉, 제임스 댄디는 초자연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며 사람을 현혹하고, 돈을 버는 자칭 초능력자들을 사기꾼이라고 까발리는 마술사였다.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법정 소송까지 간 초능력자 유리 겔라는 법정에서 초능력을 입증하지 못했고, 소송에서 패한 뒤 스스로 엔터테이너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블링크 마법으로 물체만 이동시켜 보여도 백만 달러를 벌 수 있다는 건데···. 크, 아쉽다.’
백만 달러를 벌면 좋겠지만 그랬다간 자신의 신상이 전 세계적으로 노출되고 만다. 단순히 유명세를 타는 것으로 끝나면 괜찮겠지만 진짜 초능력자로 밝혀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백만 달러는 아깝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마법을 이용해 마술사가 되어도 의외로 돈은 쉽게 벌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당장 급할 건 없으니까 인터넷으로 정보나 검색해보자.’
집으로 돌아온 강수는 마술사를 검색하려고 포탈에 접속했다.
한데 실시간 검색어에 등산복 남자의 정체, 초능력자 같은 검색어가 순위에 있었다.
‘어, 이게 뭐야?’
자신의 예상과는 다르게 추락 영상이 묻히질 않고 인터넷 상에서 아직도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음, 아직도 검색어 순위에 있네? 그날 입었던 등산복은 당분간 입지 말아야겠구나.’
강수는 자신의 정체에 대해 일부 네티즌의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앞으로 행동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포탈 검색창에 마술사를 써넣고 검색했다.
마술사에 관한 자료가 모니터에 주르륵 올라왔다.
세계마술대회(FISM) 영상을 비롯해 마술사가 펼치는 마법을 살펴본 강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이건 단순히 마법으로 승부할 문제가 아니었다.
세계마술대회(FISM) 1등을 한 한국인 마술사의 카드마술은 한 편의 예술영상 같았다. 배경음악과 어우러진 섬세한 손동작과 풍부한 얼굴 표정, 우아한 팔의 움직임이 마술에 녹아 완벽에 가까운 환상적인 연출이 펼쳐졌다.
다른 마술사의 마법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마술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마술과 이야기를 엮어 연극 같은 연출을 했다.
마술사 행세를 하려면 이야기와 무대연출, 마술도구, 의상 등 준비해야 할 것도 많았다.
‘··· 역시 마술도 보통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구나. 이건 천천히 준비하자.’
서두를 것은 없었다. 시간은 자신 편이었다. 마나회로 수련을 꾸준히 하면서 하나하나 준비하면 돈과 명성은 자연적으로 손에 쥐어질 것이다.
‘전시회 작품도 끝났겠다 내일부터는 도경만 사장님 말대로 그림동화책 이야기를 구상해봐야겠다.’
도경만 사장과 만난 후에 동화에 대해 조금은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개를 소재로 한 쓸 만한 이야기가 기억났다.
개의 이름은 ‘죽돌이’였다.
*
다음날 오전. 선암갤러리 사무실.
전시 디스플레이를 완료했다는 직원 지명철의 보고를 받은 장영봉은 전시장을 최종 점검하기 위해 2층으로 내려갔다.
12인전에 출품된 작품 총수는 62점이다.
작품 수가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부스로 나누어 전시공간을 여유 있게 만들었다. 부스 한 곳에 작가 3명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도록 디스플레이를 했다.
장영봉은 전시된 작품을 훑으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박해나의 ‘혈맥(血脈)’ 연작은 대작으로 손색이 없었고, 김이연, 장동운의 작품은 기대한 대로 훌륭했다.
김종대나 박보람의 작품도 박수를 쳐줄 만큼 참신했다. 젊은이답게 다양한 오브제를 이용해 실험적인 시도를 한 김창학 작가의 작품도 눈여겨볼만했다.
‘이제 마지막 부스군.’
장영봉은 이강수의 작품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이강수는 경력이 워낙 없어서 다섯 번째 부스에 배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물과 초대는 그림파일로 받아보았고, 마지막 작품인 도시의 일몰은 그도 지금 확인하는 것이다.
장영봉은 강수의 작품 앞에 서서 작품을 감상했다.
“으음. 놀라운데.”
장영봉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전 작품과는 비교할 수가 없어. 이건 박해나와 견주어도 되겠는걸. 후후, 참가시키지 않았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뻔했다.”
장영봉은 한동안 자리를 뜨지 않고, 강수의 세 작품을 자세하게 관찰한 후 사무실로 올라갔다.
*
한국청년화가 12인전이 개막하는 수요일 오후 3시.
선암갤러리 2층은 150여 명의 사람들이 몰려와 복잡했다. 홀 중앙에는 흰 천을 씌운 탁자가 길게 놓여있고, 떡과 음료수, 간단한 다과가 셋팅되어 있었다.
한국청년화가 12인전은 예정대로 오후 3시에 오픈했다.
개막식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그 사람들 가운데는 12명이나 되는 참여작가의 지인들이 한몫 거들었다.
박해나를 필두로 한국미술계가 주목하는 신진작가 3명이 참여했기 때문인지 사진기를 멘 기자와 미술관계자도 눈에 많이 띄었다.
선암갤러리 관장 조창석이 간단한 축사로 직접 개막식을 선언했다.
“··· 앞으로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이곳에 있는 젊은 예술가들을 지켜봐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지금 역사적인 한국청년화가 12인전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와아-”
짝짝짝짝!
플래시가 터지고 환호성과 우레 같은 박수가 전시장을 가득 울렸다.
강수와 종대도 사람들 틈에서 개막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종대야, 생각보다 사람들 많이 왔다.”
강수의 말에 종대가 허파에 바람이 든 것처럼 웃었다.
“크크크. 이게 뭐 순수한 관람객이냐? 전부 작가 지인들이나 미술관계자들이지.”
“그래도 사람들이 많으니까 보기는 좋지 않냐?”
“그렇긴 하네. 개막했으니 네 작품 좀 구경하러 가보자.”
종대는 개막 시간에 맞춰 도착했기 때문에 강수의 작품을 살피지 못했다.
“그럴까?”
종대는 강수를 따라 다섯 번째 부스로 갔다.
도시의 일몰, 초대, 눈물을 차례차례 훑는 종대의 두 눈이 조금씩 경악으로 물들었다. 마지막 작품 ‘눈물’ 앞에서는 아예 눈을 찢어져라 크게 떴다. 그의 입은 턱이 빠질 것처럼 크게 벌어졌다.
“이, 이게 네 작품이라고?”
“어때? 이번 작품은 봐 줄만 하냐?”
강수를 바라보는 종대의 얼굴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목소리마저 살짝 떨려 나왔다.
“이거 다른 사람이 그린 거 아니고 네가 그린 거 맞아?”
“뭐? 헛소리란 건 알지? 근데 좀 놀랐냐?”
“그래. 너무 놀라서 심장이 떨릴 지경이다. 내가 니 실력을 잘 아는데 이전 작품하고 너무 갭이 크지 않냐? 사실 나보다 네가 더 잘 알 텐데.”
강수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하긴 자랑이 아니라 이전 작품하곤 비교할 수가 없긴 하지. 어쨌든 네 맘에 들었다니 합격점을 받은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종대는 강수가 한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강수의 실력과 장단점을 꿰고 있는 종대는 강수의 작품을 사실상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종대가 강수를 선배에게 추천한 이유는 오직 실연의 고통을 빨리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한데 자신의 눈 앞에 걸려 있는 작품들은 감정의 깊은 울림을 선사하고 있지 않은가?
세 작품 전부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눈물도 시선을 땔 수 없는 마력을 뿜었지만 종대의 눈은 도시의 일몰에 멈춰져 있었다.
화면의 전면은 직장인, 노동자, 직장 여성 등 10여 명의 도시인이 메우고 있다. 전면을 채운 도시인의 뒤에는 수십 명에 이르는 인간 군상이 이미지 형상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배경은 아련하게 솟은 빌딩이지만 단색으로 부드러운 터치로 배치되어 있었다.
언뜻 보면 빌딩의 위압적인 위용에 주눅 들어 보일 것 같은 도시인은 빌딩을 부드럽게 단색조로 표현한 때문인지 인물들과 상생하는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군중이 굉장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구나!’
종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군중의 낙천적인 얼굴 표정과 모습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았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화면을 가득 지배하고 있었다. 희망에 가득한 메시지가 용기와 힘을 북돋아주는 느낌을 주었다.
종대가 주위를 둘러보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강수야.”
“왜?”
“솔직히 말해봐. 너 혹시 약 빨고 그렸냐?”
강수가 피식 실소를 지었다.
“농담이지?”
종대가 세 작품을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흠, 아니란 말이지. 이건 암만 봐도 제 정신으로는 나오기 힘든 작품들이란 말이야.”
“헛소리 그만 하고 네 작품이나 보러 가자.”
종대가 팔을 들었다.
“잠깐, 그나저나 이 작품 얼마지?”
종대가 가격을 확인하고 놀라서 외쳤다.
“헉! 23호가 사백! 이거 가격이 왜 이래? 오타인가?”
강수가 멋쩍게 웃었다.
“그 가격 맞아. 내가 책정한 가격이야.”
종대가 강수를 째려봤다.
“경력도 없는 초보 화가 작품을 누가 산다고 사백이나 붙였냐? 미술시장이 초보작가에게 얼마나 무관심한지 알면서 말이지. 배짱도 좋다.”
작품으로 시선을 돌린 종대가 고개를 빼서 그림을 뚫어져라 살폈다.
“음, 사실 네임밸류만 있으면 2, 3천도 아깝지 않은 작품 같긴 하다. 근데 눈물은 가격이 붙어 있지 않다?”
“눈물은 아직은 팔고 싶지 않아서 판매 보류했다.”
종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은 뭔가 명작 냄새가 난다. 나중에 제값 받고 파는 게 낫겠다. 그나저나 두 작품 중에 내가 한 작품 구입하고 싶은데···.”
“내 작품을 사려고?”
“그래, 임마. 나도 보는 눈이 있는데 이런 작품을 놓치면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서 말이야. 게다가 이런 걸작은 쌀 때 미리미리 사 놔야 나중에 돈이 될 거 아니냐? 근데 가격이 세군.”
“네 말처럼 초보작가 작품을 누가 사백에 사겠냐? 안 팔리면 너한테는 특별히 백만 원에 한 작품 양도하마.”
“정말이냐? 흐흐. 한 점 득템 했군. 가만, 사백이지만 작품이 맘에 들면 누군가 구입할 수도 있잖아.”
종대가 스마트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응? 지연 씨에게 전화를?’
“자기, 통화 괜찮아? ···무슨 일이긴. 할 얘기가 있으니까 전화했지. 바쁠 테니까 용건만 말할게. 우리 사백 정도 여유 있니? ···뭐, 이백? 그럼 나머지는 카드 그어서라도 준비 좀 해 주면 안 될까? ···그림 한 점 구입하려고 그래. 전시장에서 저주받은 걸작을 발견했어. ···사백이면 비싼 거 아니야. 충분한 가치를 가진 작품이라고 ···돈을 날리긴 왜 날려. 자기, 내 심미안 의심하니? ···다음 달에 돈 들어갈 데가 많다고? 휴, 알았어. 수고해 자기.”
종대가 한숨을 쉬며 전화를 끊었다.
“한 점 사려고 했더니 재무부 장관께서 가계가 빵구 난다고 안 된단다.”
종대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찍었다.
“너, 작품 한 점 백만 원에 양도한다는 거 여기에 새겨져 있다. 잊지 마라.”
“하하. 한 입 갖고 두말하지 않으니까 네 작품이나 보러 가자.”
“그럴까. 참, 저녁에 심 교수님, 동문선후배들 하고 맥주 한잔 할 거다. 심 교수님, 반가운 얼굴이지?”
“심 교수님? 크, 그래. 엄청 반갑다.”
낄낄 웃으면서 둘은 종대의 작품이 전시된 두 번째 부스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