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그림 그리는 마법사 - 32회
강수는 캔버스의 물감이 마르는 동안 외출 준비를 했다.
샤워를 하고, 수염을 깎고 잡채밥을 시켜 허기를 달랬다.
외출 준비를 끝내고 나니 어느덧 오후 5시다.
밥 먹으며 칠해 둔 바니쉬가 마른 것을 확인한 강수는, 작품을 꼼꼼하게 포장해 택시를 타고 종로2가로 출발했다.
수많은 사람으로 혼잡한 인사동 거리는 활기가 넘쳤고, 특히 외국 관광객이 눈에 많이 띄었다.
학부시절에는 각종 전시를 관람하러 자주 왔었다. 졸업하고 나서는 일러스트에 모든 시간을 쏟아 부었기 때문에 발걸음이 뜸했었다.
비록 그룹전이지만 작품 전시를 위해 인사동을 찾아 왔다는 것이 감회가 새로웠다.
강수는 인파로 북적대는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며 활력이 넘치는 거리를 구경했다.
작품을 들고 인사동 사거리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간 뒤 선암갤러리가 위치한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다.
“아, 현수막이다!”
선암갤러리의 한쪽 벽에 걸려 있는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청년화가 12인전 현수막은 3층 옥상에서 2층까지 길게 걸려 있었다.
현수막을 보니 전시회 참가한다는 현실이 실감나게 다가왔다. 가슴이 뿌듯해지며 약간 흥분되었다.
선암갤러리는 3층 건물을 통째로 쓰고 있다. 1, 2층은 전시장이고, 3층은 창고와 탕비실, 사무실 등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강수는 한국청년화가 12인전이 열리는 2층 전시장으로 올라갔다.
2층 전시장에는 전시회에 참여하는 작가로 보이는 몇 명의 남자와 등을 보이고 있는 여자도 한 명 있었지만 안면이 없었다.
먼저 와서 작품을 디스플레이 하고 있는 두 명의청년 작가가 강수를 쳐다보았으나 초면임을 알고 목례로 인사했다.
강수도 목례로 인사를 받았다.
‘한국 미술계에서 촉망 받는 내 나이 대의 신진작가들이 분명할 텐데 아는 얼굴이 아니라니··· 아무리 돈 버는데 열중했다고 해도 그렇지 나도 어지간히 무관심하게 살았구나.’
자기 반성과 함께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문득, 일러스트 작업에 매몰된 채 집구석에서 붓대만 놀리고 있었던 지난 날들이 떠올랐다.
그때는 무서운 집념으로 일러스트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는데 지금은 그 시간이 무의미할 뿐이었다.
‘지난 날을 후회한들 부질없어. 아직 젊으니까 앞으로 잘 살면 돼. 이제 난 마법사라고! 후후후.’
마법사라는 생각만 하면 저절로 웃음이 나왔고 세상 부러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직원으로 보이는 청년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가볍게 머리를 흔들어 상념을 날렸다.
청년은 강수가 들고 있는 포장된 캔버스를 보고 물었다.
“혹시 12인전의 초대 작가 이강수 씨인가요?”
“예, 맞습니다. 한데 저를 어떻게 알고?”
청년이 씨익 웃었다.
“두 분만 빼고 다른 분들은 전부 왔거든요. 그리고 두 분 가운데 한 분은 여성작가입니다.”
강수가 미안한 얼굴로 멋쩍게 웃으며 주억거렸다.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작업이 좀 늦게 마무리되는 바람에 늦었습니다.”
“괜찮습니다. 전시할 위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죠.”
2층 전시장은 약간 직사각형의 50여 평 규모였고, 전시장을 12명이 참여하는 그룹전에 맞게 구역을 나누어 디스플레이를 해놓았다.
중앙 홀은 확 트인 공간이고, 오른편 벽면은 부스처럼 4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서 한 부스에 세 명의 작가를 할당해 놓았다.
60여 작품이 전시되어야 했기 때문에 전시공간 확보를 위해 공간을 나눈 것이다.
전시에서 작품 설치를 위한 공간의 디스플레이는 생각보다 비중이 크다.
개인전이나 규모가 큰 전시의 경우 작가와 큐레이터가 디스플레이를 놓고 신경을 많이 쓴다. 똑같은 작품도 어떻게 거느냐에 따라서 관람에 대한 몰입도가 달라진다.
훌륭하게 배치된 미술작품은 관람객에게 심리적인 안정과 정서적인 만족감을 준다.
하지만 소규모 공간에서 전시하는 그룹전 같은 경우 디스플레이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다. 한정된 공간에 다수의 작품이 전시되고, 전시 주체가 다수이다 보니 각자의 의견을 수용할 수가 없다. 때문에 갤러리 측에서 전시공간을 임의적으로 디스플레이 해 놓는 경우가 많다.
청년을 따라가며 살펴보니 빈 공간이 거의 없었다. 청년의 말대로 자신과 여성작가 한 명을 빼고 참여 작가들은 이미 디스플레이를 마쳤다.
언뜻 보기에도 꽤나 인상적인 작품이 보였다.
작품을 살피며 걷는 도중에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청바지에 반팔 티를 입었다.
새하얀 피부가 눈부셨고, 160정도 되는 적당한 키에 예쁜 얼굴의 여자였는데 어디서 본적이 있는 것처럼 낯설지 않았다.
‘어? 누구지?’
아는 화가라면 분명 이름이 떠올랐을 것이다.
모르는 얼굴이라 아까 남자들과 인사한 것처럼 목례로 인사를 했다. 여자도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답례를 했다.
출입문에서 가장 먼 구석의 네 번째 부스로 걸어간 청년이 강수에게 물었다.
“눈물이 25호 규격, 나머지 두 작품은 23호 정도라고 했죠?”
“예.”
청년이 한 쪽 벽의 빈 공간을 가리켰다.
“이곳에 전시하면 됩니다. 작품을 걸어 놓으면 수평과 조명은 제가 맞춰 놓을 겁니다. 그리고 작품명이 눈물, 초대, 도시의 일몰이군요.”
“그렇습니다.”
청년은 어깨에 맨 작은 가방에서 작가와 제목, 가격 등이 적힌 작품명찰을 꺼내 내밀었다.
“여기 명찰입니다. 적당한 위치에 붙이세요.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제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저는 전시지원담당 지명철입니다.”
강수는 작품명찰을 받고 인사를 했다.
“신경 써주어 고맙습니다.”
“제가 할 일인걸요. 그럼.”
강수의 작품이 걸릴 곳은 입구에서 가장 먼, 전시 순서를 따진다면 12번째인 구석 자리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인지도 있는 신진작가의 작품이 관람객과 호흡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걸리는 것이 당연했다. 사실 전시 위치는 고사하고 전시회에 참여할 기회를 준 것에 감사할 일이었다.
강수는 도시의 일몰, 초대, 눈물의 순서로 작품을 걸고 명찰을 붙였다. 작품의 높이는 자신의 눈높이에 맞췄다.
갤러리 측에서 부스를 설치 해놓고, 참여 작가의 작품이 위치할 위치까지 정해 놓아서 설치는 간단하게 끝났다.
시간을 보니 벌써 8시다.
전시회는 내일 오후 3시에 오픈 한다.
전시기간은 14일까지 2주간이지만 14일 화요일은 기존 전시는 철수하고 새로운 전시의 디스플레이가 들어가기 때문에 실제로 관람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개인전 같은 경우 찾아오는 손님과 고객을 위해 개막리셉션을 하기도 하지만 이번 그룹전은 개막 당일 개막식만 있을 뿐 리셉션 같은 행사는 없다.
작가 개별적으로 손님을 맞이하면 된다.
강수 같은 경우 따로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지만 종대 때문에 적지 않은 동문 선후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교수님도 한 두분 방문할 지도 몰랐다.
‘내일은 좀 차려 입어야겠구나···.’
강수는 돌아가기 전에 작품에 이상은 없는지 마지막으로 살펴보았다.
‘됐다. 이젠 가자.’
이때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조금 전에 눈이 마주친 여성 작가였다. 그녀가 스스럼없이 인사를 해왔다.
“안녕하세요. 이번 그룹전에 참여한 김이연라고 해요.”
“아, 예. 안녕하세요. 이강수라고 합니다.”
강수가 살짝 놀란 얼굴로 인사를 받았다.
‘김이연? 어쩐지 낮이 익는다 했더니 사진으로 봤구나.’
김이연은 화영여대 출신으로 풍경화 속에 문명의 이기를 그려 넣는 독특한 작품세계로 주목 받는 여성작가였다.
“처음 보는 분이라 궁금해서 와 봤어요. 작품 좀 봐도 될까요?”
“예. 무, 물론입니다.”
강수가 옆으로 비켜섰다.
이때, 전시장 안에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나며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이연아, 어딨니? 나 왔어.”
“어, 친구 해나네요. 대작을 출품하겠다고 큰소리치더니 이제 왔어요. 가실래요? 소개해 줄게요.”
“해나요? 박해나?”
김이연이 생끗 웃었다.
“예. 아시나요?”
“한국 미술계 신진 그룹의 선두주자인 김이연 씨나 박해나 씨를 모를 수가 없죠.”
강수가 미술계에 관심을 쓰지 않았지만 몇몇 특출난 신진작가는 기사를 통해 알고 있었다.
김이연, 박해나가 그 가운데 두 명이었다.
박해나는 서한대 출신으로 졸업한 후 연속된 단체전에서 주목을 받았고, 규모가 큰 미술 공모전에서 연달아 두 번 대상을 받았다. 또한 두 번의 개인전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해외 유명 아트 페어에 참여해 호평을 받았으며 작품까지 판매되었다.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굉장히 핫한 여성작가였다.
김이연, 박해나가 참여할 정도면 이번 12인전이 얼마나 대단한 전시회인지 알 수 있었다.
김이연과 강수는 부스에서 나와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한 여성이 출입문 앞에서 지명철과 얘기하고 있었다. 여자는 상당히 말랐는데 그래서 170정도 되는 키가 더 커 보였다.
얼굴은 작았고 무표정해 보였지만 미인형이었다.
‘박해나구나. 키도 큰데 상당히 말랐군.’
강수와 김이연은 옆에서 잠시 기다렸다. 전달사항을 다 얘기했는지 지명철은 작품명찰을 박해나에게 건네주고 물러났다.
김이연에게 고개를 돌린 박해나가 눈으로 강수를 가리켰다.
“이 사람은 누구야?”
“이번 전시에 참여한 이강수 작가님이셔.”
박해나가 강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강수? 팜플렛에서 봤을 뿐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네요. 작품활동은 어떻게 하고 있나요?”
강수가 두 번의 단체전에 참가했으나 한번은 춘천문화제였고, 또 한번은 수원에서 열린 단체전이었다. 중앙 화단과는 거리가 먼 전시회라서 내세울 만한 경력은 아니었다.
강수는 솔직하게 일러스트레이터로서 돈을 번 사실을 밝혔다.
“18년에 회화과를 졸업하고 얼마 전까지 일러스트 작업을 해 왔습니다. 이번에 선암갤러리에서 기회를 줘서 12인전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그래요?”
박해나의 눈에서 의문의 빛이 떠올랐다.
“12인전은 국내에서는 내노라 하는 신진 작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시인데 일러스트만 그리다가 전시에 참가하다니 운이 굉장히 좋은 분이네요. 어떻게 참여하게 됐는지는 몰라도 기왕에 참여했으니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겠어요.”
직접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해나의 말에는 비수처럼 날이 서 있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모욕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김이연이 놀랐는지 안색이 일변해서 나무랐다.
“해나야, 그게 무슨 실례되는 말이니. 사과 드려.”
강수를 팔을 저었다.
“아닙니다. 해나 씨가 맞는 말을 했는데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실은 장영봉 큐레이터님이 학교 선배님이라 저를 좋게 봐주셨습니다. 선배님에게 폐가 되지 않게 열심히 작업하긴 했는데 평이 어떻게 나올지 좀 걱정이 되는군요.”
박해나가 인맥을 통해서 12인전에 참가한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강수를 힐끔 쳐다보았다. 팜플렛을 보고 대충 짐작은 했지만 변명 한 마디 하지 않고 인정할 줄은 몰랐다.
그녀의 눈에서 이채가 스쳤다.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태도를 보면 어쩌면 진짜 실력 있는 작가일 수도 있었다.
이때, 계단에서 40대로 보이는 사내 둘이 해나의 작품을 들고 올라왔다.
“화가 아가씨, 이 작품은 어디에 걸 거요?”
박해나가 자신의 작품이 전시될 출입문 근처 첫 번째 부스를 가리켰다.
“이쪽에 내려 놓으세요.”
두 사내는 작품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강수는 작품 거는 것을 도와줘야 하는지 잠깐 고민했으나 자신이 있어 봐야 분위기만 어색해 질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예의상 물었다.
“작품 거는 거 도와줄까요?”
김이연이 반색하면서 좋아했다.
“어머, 그렇지 않아도 작품이 커서 누가 도와주면···.”
박해나가 이연의 말을 끊으면서 냉정하게 말했다.
“아뇨. 작품 거는 것쯤이야 둘이서 해도 충분해요. 말씀은 고맙네요.”
“아, 예. 그럼 수고하세요.”
난감한 표정의 김이연이 황급히 인사를 했다.
“이강수 작가님, 잘 들어가시고 내일 봐요.”
강수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갤러리를 나온 강수는 박해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 여자는 날 것 그대로다. 거칠지만 원시적인 생명력을 간직한 가공하지 않은 원석이랄까?’
언행에서 당당한 자신감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강수는 그 기세를 느낄 수 있었다.
본래 성격이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잇단 성공에 오만해진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김이연이 부드러운 성격에 애교 있는 여성이라면 박해나는 원초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는 강렬하고 남성적인 기운을 가졌다.
그녀의 작품은 성격처럼 원초적인 에너지가 넘칠 것 같았다.
‘어울리기 어려워 보이는 상반된 성격의 두 사람이 친구? 하긴 극과 극은 서로 통하기도 하는 건가?’
강수는 상반된 성격의 두 여성이 의외로 잘 어울린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걸었다.
인사동의 밤거리는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불빛과 은은한 가로등 빛이 어우러져 낭만적인 분위기가 넘쳤다.
강수는 사람들로 북적대는 밤거리를 걸어서 종각역으로 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