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그림 그리는 마법사 - 29회
강수는 너무나 달라진 선예의 모습과 분위기에 선뜻 말을 걸지 못하고 가만히 기다렸다.
커피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선예가 맥이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빠는 어떻게 지냈어요? 작업은 잘 되고 있어요?”
“그럭저럭. 두 번째 작품이 ‘초대’인데 거의 마무리 중이야.”
커피를 한 모금 삼킨 강수가 힘없이 커피잔을 돌리고 있는 선예에게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나보다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안 좋은 일이니?”
“그게••• 아빠 때문에•••.”
“아빠? 혹시 아빠 사업에 문제가 생긴 거야?”
강수의 얼굴을 쳐다본 선예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긴 한데 오빠가 걱정할 일은 아녜요. 엄마하고 아빠가 어떻게든 이겨 낼 거예요.”
사업이나 회사경영에 대해 알지 못하는 강수지만 기능성 의자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선예의 아빠 사업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긴 해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일은 없을까?”
선예가 한숨을 내쉬며 주저하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빠가 작은 회사를 하는데 몇 달 전에 동업자가 회삿돈을 거의 다 빼내서 해외로 도망쳤어요. 갑자기 현금 줄이 막히는 바람에 회사 운영이 어려워졌고요. 열흘 전부터는 돈을 구하러 엄마까지 여기저기 돌아다니시는 바람에 내가 동생들을 챙기느라고 집에 있었어요.”
안 좋은 일이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최악의 상황이었다. 열이 뻗친 강수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아니, 회삿돈을 빼돌려서 저만 잘살겠다고 도주해? 그런 천하에 벼락을 맞아 죽을 놈이 있나!”
씩씩거린 강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아빠 회사는 어떻게 되는 거야?”
가슴이 메는지 선예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깊은 슬픔이 묻어났다.
“은행에서 최대한 융자 받고 친척한테서 급전을 빌려 부도는 막고 있어요. 회사가 부도나면 집도 채권자에게 넘어가겠죠. 새로 개발한 제품만 매출이 어느 정도 생겨도 회사 운영에 숨통이 트일 거라면서 아버지가 아쉬워 하세요.”
결국 돈이 문제였다.
‘돈••• 왜 이렇게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냐?’
강수는 새삼 돈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살 수 없게 하는 걸까? 역시 돈이라는 재화란 말인가!’
눈 앞에 놓인 현실이 그렇다고 증명하고 있었다.
선예의 아빠는 돈이 없어 회사가 부도 위기에 몰렸고, 자신 역시 4년여 동안 젊음을 반납하고, 행복하겠다며 돈의 충직한 노예가 되지 않았던가.
‘나 역시 돈의 노예였단 말이지. 대체 돈 따위가 뭐길래.’
문득 돈에 의해 행복과 인간의 존엄성이 좌우되는 현실, 자본주의 사회체제가 갑갑해졌다.
헌정 사상 최초의 여자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있었던 대학 시절, 강수는 여권의 중견 정치인을 아버지로 둔 혜주로 인해 열정적으로 사회과학서적을 탐닉하며 울분에 쌓여 있었던 1, 2학년 때가 떠올랐다.
윤혜주는 같은 학번인 동기이자 한때 강수의 여자친구였다. 두 사람은 연인 사이로 깊어지기 전에 강수에게 벌어진 악의적인 사건에 의해 헤어지고 말았다.
윤혜주는 집안 얘기를 하지 않고, 항상 수수하게 하고 다녀서 평범한 중산층 집안의 자녀인 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년 사내가 강수를 찾아왔다. 자신을 윤원청 의원의 유 보좌관이라고 밝힌 사내는 잠깐 시간을 내달라고 했다.
강수는 혜주의 아버지가 윤원청 임을 직감했다.
윤원청은 당시 여당인 보수우파 진한당의 실세의 한 명으로 원내대표까지 지낸 정계 중진의원이었다.
뜻밖에도 윤혜주는 엄청난 정치가인 윤원청의 세 자녀 중 막내딸이었다.
유 보좌관은 윤원청 어른께서 두 사람의 교제를 반대한다며 무조건 헤어지라고 주문했다. 또한, 혜주는 이미 기업가 집안과 혼담이 오가고 있으니 물의를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물러나라고 했다. 마지막에는 혜주를 빨리 포기하는 것이 살아가는데 이로울 것이라고 은근히 겁을 주기까지 했다.
남녀 간의 사랑에 부모의 정치 성향이 크게 걸림돌이 될 것은 없지만 윤원청처럼 여권의 실세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권력의 실세 앞에서 자신이 어필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강수는 혜주와 어디론가 멀리 도피하지 않는 이상 이뤄질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강수는 윤혜주를 이전처럼 사랑할 수 없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헤어지는 수순을 밟았다.
그 일을 계기로 강수는 끓어오르는 울분을 삼키며 사회과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사회과학을 공부하며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불합리한 구조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품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수많은 기업이 동일한 상품을 경쟁적으로 만들어 낸다. 동시에 소비자의 선택을 받지 못한 수많은 상품을 폐기하고, 유통기한이 지난 엄청난 양의 식품은 땅 속에 매립한다. 이렇게 매년 상상을 초월한 자원이 전세계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낭비되고 있다.
폐해도 이런 전 지구적인 폐해가 없다.
비정하도록 냉혹한 상술이고, 자본주의식 경쟁이 빚어내는 비극의 오페라다.
지구의 한정된 자원을 낭비하지 않고, 모두가 재화를 고르게 누릴 수 있고,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이 도래할 수 있을까?
‘그런 세상은 언제쯤이나 도래할까?’
그래도 강수가 확신하는 것이 있다.
언젠가 세계는 하나의 정부로 통합되고, 전인류의 생존을 위해 자원 낭비를 줄이고, 합리적인 생산과 소비를 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석유나, 광물, 식량의 생산 등 한정되어 있는 지구의 자원은 멀지 않은 미래에 바닥나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는데 가당치도 않지? 천 년은 흘러야 할까? 아니면 만 년? 가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상념에 빠져있던 강수는 현실로 돌아왔다.
이런저런 잡념으로 마음이 뒤숭숭해진 강수는 통장에 있는 천오백만 원으로는 도와준다는 말도 꺼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했다.
‘이럴 때 도와줄 수 있게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
감정을 추스렸는지 선예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괜한 얘기 꺼내서 미안해요. 아빠가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까 괜찮아질 거예요. 이제 올라가 볼게요.”
강수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선예의 손을 잡았다.
“잠깐 선예야. 정말 도와주고 싶은데 내가 가진 돈이라곤 통장에 천오백만 원이 전부야. 약소한 금액이지만 천만 원 정도는 빌려줄 여유가 돼.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이거라도 빌려줄게.”
“하, 하지만 오빠도 생활하는데 필요할 텐데요···.”
“5백만 원이면 두 달은 충분히 쓸 수 있어. 생활비 정도야 언제든지 돈을 벌면 되고. 내 능력이 그것 밖에 되지 않아서 오히려 미안하네. 계좌번호 어떻게 돼? 모바일 뱅킹으로 바로 부칠 테니까.”
선예는 선뜻 계좌번호를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지금은 한 푼이 아쉬운 처지였지만 따지고 보면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사이에 냉큼 돈을 받아도 되는지 고민이 되었다.
“고마워요. 올라가서 생각 좀 해보고 문자 줄게요.”
“큰 돈도 아닌데 쓸데 없이 고민할 것 없어. 그리고 아빠 회사가 잘되면 그때 갚으면 되잖니? 그러니까 너무 부담갖지 말고 계좌번호 보내.”
“··· 예.”
선예가 위층으로 올라가고 한참 후 계좌번호를 적은 문자가 왔다.
강수는 즉시 모바일 뱅킹으로 천만 원을 이체해 주었다.
다시 선예의 문자가 도착했다.
-ㅠ.ㅠ 오빠! 감사해요. 이 돈은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갚을 게요.
-알았어. 모든 일이 잘 풀리면 그때 천천히 갚으면 되니까 동생들 잘 챙겨주도록 해.
-네, 고마워요. 강수오빠.
*
전시회 개막일은 7월 1일 수요일이다.
작품 디스플레이를 해야 하는 전날 6월 30일을 제외하면 11일이 남았다.
강수는 작품 ‘초대’를 완성하고 마지막 세 번째 작품 ‘도시의 일몰’에 돌입한 상태였다.
작품 ‘초대’는 23호 정도의 크기로 그렸고, 판매가는 400만원으로 책정해 장영봉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컨디션은 최상이었고, 아이디어 스케치도 끝났다.
작품 ‘도시의 일몰’의 컨셉은 바쁘게 살아가는 도시인의 일상과 그들의 미래와 희망이었다.
사실 서울 생활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팍팍하다.
자녀를 양육해야 하며 주택대출금을 갚아야 하고, 노후를 대비해 저축도 해야 한다. 그 속에서 희망을 찾고, 의미를 찾고, 행복을 추구한다. 물론 이런 도시인의 일상은 미혼자, 만혼자의 증가로 인해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타났으나 큰 흐름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도시의 일몰’은 오늘이 저물어가는 일몰 속에서 내일을 꿈꾸는 도시인들의 저력을 형상화했다.
어스름이 깔리는 거리를 걸어가는 다양한 군상의 도시인을 전면에 배치했고, 배경은 불이 켜진 빌딩과 건물 뒤로 넘어가버린 태양의 후광을 표현했다. 청계천에서 도심의 고층빌딩을 스케치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이것이 스케치가 끝난 작품 ‘도시의 일몰’의 전체적인 이미지였다.
강수는 전면의 인물 군상을 스케치를 하면서 인물 한 명 한 명의 희망에 찬 표정과 감정을 표현하는데 주력했다.
때문에 아이디어 스케치와 함께 인물의 배치와 구성이 정리되었다.
스케치를 하면서 각각의 인물에게 어떤 색을 칠하고, 색의 농도와 어느 정도의 명암으로 처리할지 자연스럽게 감이 잡혔다.
캔버스에 색채를 입히는 작업은 영감이 인도하는 정교하고 세밀한 작업이었다. 그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그리고 남은 11일은 충분한 시간이었다.
강수는 가벼운 마음으로 팔레트에 아크릴 물감을 짜기 시작했다.
*
장영봉은 출근해서 간단히 오전 잡무를 끝내고 이메일을 열었다.
광고 메일 사이에 12인전에 참여하는 작가들의 메일을 확인했다. 다섯 명의 작가 중 이강수의 메일도 도착해 있었다.
눈물에 이어 두 번째 작품을 완성한 것이다.
강수가 보낸 이메일을 읽은 장영봉은 고개를 갸웃했다.
‘4백? 이건 좀 오버인데?’
개인전 한번 갖지 않은 무명작가의 23호쯤 되는 작품이 4백이면 적정가가 아니었다.
‘2백 정도가 적당한데••• 시장가격을 모르나? 아니면 ‘눈물’처럼 판매할 생각이 없는 건가?’
장영봉은 강수가 보낸 초대를 32인치인 모니터 화면 가득히 확대했다.
원화를 봐야 정확한 평가를 할 수 있지만 모니터 상으로도 충분히 훌륭했다. 하지만 작품이 아무리 뛰어나도 신인작가의 작품은 호당 10만원을 넘지 않는다.
‘250으로 낮추자고 해 볼까?’
스마트폰을 집어 든 장영봉은 전화를 걸려다 도로 내려놓았다. 신인작가의 작품가를 모를 리가 없으니 이유가 있어서 붙인 가격일 것이다.
12인전의 취지는 작품판매보다는 참신한 신인 화가를 발굴하는데 있다. 장영봉은 작가가 제시한 가격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