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28화 (28/197)

# 28

그림 그리는 마법사 - 28회

뭔가를 깨달은 듯한 강수의 표정을 도경만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글과 그림을 그리면 인세로 계약을 하니까 성공만 하면 큰돈을 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제도서전에 출품해서 상을 노려볼 수도 있다네. 어떤가? 해 볼만 하지 않은가?”

“하지만 저는 이야기를 지어 본 적이 없는데요. 이야기를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모릅니다.”

“처음부터 이야기를 잘 쓰는 그림동화책 작가는 드물지. 누구나 처음엔 서툴겠지만 목표의식을 갖고 시작하면 어렵지 않은 일이라네. 이 작가도 그림동화책 작업을 하면서 동화를 많이 접해보지 않았나? 어때, 이야기가 어렵던가?”

“아니, 그렇진 않습니다.”

“바로 그거야. 그림동화책은 순수문학작품 같이 철학과 삶의 성찰이 녹아 있는 깊이 있는 글이 아닐세. 단지 아이들의 시각에서 감수성을 건들고, 자극해 주는 이야기면 충분하지.”

“음•••.”

“지금 당장 이야기를 써보라는 것은 아닐세. 회화 작업하는 틈틈이 머리도 식힐 겸 이야기를 구상해보게. 그리고 이야기를 쓰다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지 편집팀에 도움을 요청하게. 편집팀에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네.”

강 팀장이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이 작가. 사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전폭적인 지원을 해 줄 테니 걱정 말고 써 보십시오.”

“편집팀에서 도와만 주신다면 못할 건 없겠지만 당분간 전시회 준비로 시간이 없고, 또 동화를 쓸 수 있다는 보장도 없어서 조금 망설여지는군요.”

강수는 출판사 편집팀에서 지원해 준다면 부딪쳐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수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도경만이 쐐기를 박듯 힘주어 말했다.

“이 작가, 그림동화책을 완성하든 완성하지 못하든 상관하지 않겠네. 무엇보다 시도를 해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부담 갖지 말고 한번 해 보세. 그대신 한 가지만 약속을 해주면 고맙겠네.”

“어떤 약속을?”

“그림동화책을 완성하면 꼭 우리 출판사에서 출판하게 해주게.”

“아, 제가 만약 그림동화책을 창작한다면 순전히 사장님과 출판사 덕분인데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강 팀장이 만족스러운지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 이 작가, 잘 생각했습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간단해도 좋으니까 전 대리에게 보내세요. 그럼 편집팀에서 검토해서 회신해 주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결국 강수는 자신의 그림동화책이라면 일러스트를 떠나서 해볼 만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도경만의 설득에 수긍한 것이다.

*

호텔에서의 해프닝 이후 선예는 거의 매일 간단하게 안부 문자를 보냈고, 삼사 일에 한번은 강수의 아파트에 들러서 차를 한 잔 마시며 수다를 떨다가 14층으로 올라갔다.

강수는 ‘일일 사용권’의 유효기간이 임박했다는 선예의 협박에 못 이겨 일산 호수공원에서 데이트를 즐기기도 했다.

선예와 호텔에서 있었던 해프닝이 자극이 되었을까?

솟구치는 의욕과 목표의식에 불타오른 강수는 5월 한 달 동안 마나수련에 매진했고, 그 결과 마나시드는 호두 반쪽 크기까지 커졌다. 스스로 생각해도 굉장한 성과라고 자위할 정도의 크기였다.

사실 마나시드의 급격한 성장은 자랄 행성의 마법사가 까무러칠 정도로 비정상적이었는데 이것은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한 때문이었다.

첫 번째는 자동축적마나시드의 공능이다.

투팍탈도 예측하지 못한 효과로 마나시드가 커지면 커질수록 자동축적 기능에 의해 마나를 끌어당기는 인력의 힘이 강해져 더 많은 마나를 축적했다.

두 번째는 달리기인데 강수가 시간을 아끼겠다며 수련 장소까지 뛰면서 심장의 박동이 빨라졌고, 마나의 축적이 가속된 것이다.

이런 사실을 강수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5월의 봄은 빠르게 흘러갔고, 그렇게 6월이 왔다.

성하의 계절이 성큼 다가선 6월은 벌써부터 더위가 기승을 부렸고, 사람들의 옷차림을 가볍게 했다.

창작 작업은 눈부신 속도로 진척되었다. 작품 ‘눈물’을 완성했고, 두 번째 작품, ‘초대’를 그리고 있었다.

강수는 장영봉의 이메일로 작품 ’눈물’을 보내며 판매가를 얼마로 책정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눈물은 오래 전부터 가슴 속에 담아 놓고 언젠가 그리려고 했던 작품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눈물은 왠지 애착이 갔다. 자신은 이름 없는 무명작가라 그림 값도 얼마 받지 못 하는데 헐값에 냉큼 팔고 싶지 않았다.

인지도 없는 20대 무명작가의 호당 가격은 7-10만 원 선이지만 실재로는 거래가 아예 없기 때문에 재료비나 받으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회화 작품이 호당 가격으로 유통되려면 통과의례 같은 절차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자비를 들여서 개최하는 개인전이 그것이다.

작가를 향한 첫 걸음마라고 할 수 있는 신인작가의 개인전에서 그림을 구입하는 사람은 작가의 친척, 가까운 지인, 혹은 의무적으로 구입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컬렉터나 화랑의 화상, 일반인이 구입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신인작가의 작품은 가치가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 신인작가의 작품이 호당 가격으로 화랑에서 거래되려면 적어도 개인전을 3회는 치러야 하고, 홍보와 마케팅으로 어느 정도 대중에게 알려져야 한다.

요즘은 인터넷 판매가 확산되고 있는 추세지만 적정한 가격을 받기 위해서는 개인전 경력이나 미술 대회의 수상 경력이 필요 하다.

강수는 자신이 개인전 한 번 열지 못했고, 미술계의 변방에조차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하지만 자신이 무명화가이긴 해도 ‘눈물’은 오랜 시간 가슴에 담아 두었던,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깊은 의미가 깃든 작품이다. 팔릴지도 의문이지만 단순히 호당 가격을 붙여서 2, 3백만 원에 팔고 싶지 않았다.

강수는 판매를 보류했다.

언젠가는 팔겠지만 당분간은 화가로서 걸어가야 하는 험난한 길의 동반자로 곁에 두고 싶었다.

작품 ‘초대’는 숲 속 다람쥐 가족의 첫 번째 일러스트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처음에는 숲 속 동물들이 관람객을 초대한다는 식으로 구상했으나 곧 생각을 바꿨다. 숲 속에서 힐링하며 동물과 교감하는 분위기도 좋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소재를 바꾼 것이다.

북서울 ‘꿈의 숲’을 떠올리며 스케치한 배경은 한낮의 공원.

공원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산책과 삶의 여유를 즐기고 있는 풍경이다.

꽃이 다투어 피어난 화단 옆을 개와 산책하는 여인, 개는 고개를 돌려 정면을 보고 있다.

어떤 커플은 벤치에 앉아 행복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나무 옆에 서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두 남자.

엄마를 돌아보며 청솔모를 가리키고 있는 소년, 나무 위에는 청솔모, 까치가 소년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원경에는 이미지로 그려진 사람들.

휴일, 평화로운 공원의 한낮 풍경이다.

넓은 공간에 다양한 인물을 배치하면 주제가 분산될 수도 있어서 스케치는 타원형을 이루는 구도로 여섯 인물과 세 마리 동물만 부각해 놓았다.

인물캐릭터는 인터넷을 검색해 마음에 드는 인물들을 갈무리해서 모델로 삼았다. 당연히 각각의 인물들은 강수의 머릿속에서 재창조되었다.

스케치 되어 있는 인물 하나하나가 사실적으로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캔버스에는 나무 옆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정장을 한 두 남자가 거의 완성되고 있었는데 정밀한 스케치와 달리 붓 터치는 과감하고 힘이 넘쳤다. 얼굴 표정은 마치 진짜로 대화를 하고 있는 듯 생생했다.

강수는 스케치 한 여섯 명의 인물 한 명 한 명에게 인물 고유의 개성을 불어넣기 위해 집중해서 작업하고 있었다.

캔버스에서 물러나 작품을 살펴보던 강수가 붓을 놓고 발코니로 나갔다.

‘웬일이지? 4일째 문자가 없네.’

호텔 해프닝 이후 간단하게나마 매일 오던 안부문자가 4일째 오지 않았다. 또한 일주일 넘게 커피를 마시러 오지 않았다. 처음엔 그러려니 했는데 이제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강수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먼저 해보지 뭐.’

-선예, 안녕! 어떻게 지내?

잠시 후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강수오빠, 안녕. 작업 중? 난 부모님 집이에요. 약간 정신이 없어서 연락 못했네. 미안해요.

-미안하긴. 지금 부모님 댁인가 보구나? 혹시 무슨 일 있니?

-예. 별 일은 아니고••• 나중에 기회 되면 얘기할게요.

문자에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뭔가 불길한 느낌이 전해졌다. 강수는 약간 불안한 기분으로 답장을 보냈다.

-그래. 알았어. 아파트에 오면 연락해.

-네. 오늘 하루도 잘 보내세요.

‘아빠 사업이 어렵다고 한 것 같았는데. 그것 때문인가? 잘 풀렸으면 좋겠다.’

선예의 밝은 얼굴에 가끔 그늘이 지며 아빠 사업을 걱정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붓을 집어 든 강수는 갑자기 마음이 어수선해져서 작업을 계속 할 수 없었다. 결국 작업을 중단하고 화구를 정리했다.

‘마나회로나 수련하자.’

요즘 강수는 아파트에서도 시간만 나면 마나회로를 수련했다. 한 달 만에 비약적으로 커진 마나시드는 더 크게 만들고 싶다는 욕구를 부채질했고, 마나시드를 하루빨리 호두알 크기로 성장시키고 싶었다.

강수는 발코니를 향해 가부좌를 하고 앉아 마나수련을 시작했다.

선예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선예가 돌아와 자초지종을 얘기해 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강수는 모든 것을 잊고 마나회로 수련과 회화 작업에 집중했다.

*

부러지고 썩은 나무를 주변에 대충 쌓아 야생동물의 침입을 막아 놓은 산비탈의 작은 공간.

바로 강수의 수련 장소다.

강수는 선예로 인한 번잡한 심사를 잊기 위해서 더 많은 시간을 북한산에서 수련하며 보냈다.

강수는 며칠 전부터 1서클 마법을 캐스팅하고 있었다.

마나하트가 완성되었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1서클 마법을 캐스팅해서 마법이 실현되는지의 여부였다.

즉, 1서클 마법이 캐스팅되면 마나하트가 생성되었음을 뜻하며 마법사가 된 것이다.

투팍탈이 심장에 심어준 마나시드는 이제 호두 반쪽보다 더 커져 있었다. 마나하트의 크기를 모르는 강수는 혹시나 싶어 1서클 마법을 캐스팅해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3일 동안 계속 실패했고, 오늘이 4일째 시도였다.

‘뭔가 될 것 같긴 한데···.’

1서클 마법의 기본인 파이어볼을 캐스팅하면 될 듯 말 듯 해서 아쉬웠다.

파이어볼을 캐스팅하면 뜨거운 기운이 손바닥에서 느껴지긴 했지만 정작 불덩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오전 수련을 마친 강수는 다시 파이어볼을 캐스팅하기 위해 발현 지점을 손바닥 위로 정하고 정신을 집중해서 캐스팅을 했다.

“₫₪₢юЖξ(파이어볼)”

마나의 기운이 오른손으로 순식간에 이동해갔다. 뜨거운 기운이 소용돌이치듯이 손바닥 위에서 일렁거렸다. 그리고 그 기운은 불길로 타오르지 못하고 소멸해버렸다.

“아하!”

안타까운 마음에 탄성을 질렀다.

‘휴우, 될 것만 같았는데. 대체 마나시드가 얼마나 더 커져야 마법사가 되는 거냐?’

비록 실패는 했지만 실망하지는 않았다.

최근 들어 마나의 기운을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조금만 더 수련하면 마법사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풍선마냥 부풀어 올랐다.

강수는 1서클 마법수식을 하나씩 캐스팅하며 수련하기 시작했다.

*

선예는 부모님 집으로 간지 일주일이 지난 13일 저녁 무렵에서야 아파트로 돌아왔다.

아파트로 돌아왔다는 문자를 받고 강수는 만날 수 있냐는 답장을 보냈다. 다행히 한 시간 후 내려오겠다는 문자가 왔다.

잠시 후, 초인종이 울렸다.

현관문 앞에는 캐릭터 티에 청바지를 입은 선예가 서 있었다.

강수는 안도감과 반가운 마음에 선예의 손을 와락 잡았다.

“선예야! 무슨 일이 있었니? 어서 들어와.”

실내로 들어온 선예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집안 일 때문에···.”

목소리에 기운이 없고, 근심과 걱정이 묻어 있었다.

더구나 며칠 사이 얼굴에서 생기가 사라졌고, 그 대신 어둡고 초췌한 기색이 역력했다.

‘집에 안 좋은 일이 생겼구나.’

강수는 억지 미소를 짓고 있는 선예의 우울한 얼굴을 보고 집안에 변고가 생긴 것을 알아차렸다.

강수와 선예는 주방으로 갔다.

“커피 마실래?”

“네.”

강수는 포트에 물을 끓이고, 커피에 설탕 반 티스푼을 타서 선예 앞에 놓고 탁자에 앉았다. 병에 든 커피는 선예가 좋아해서 사 놓았다.

강수는 커피를 홀짝이는 선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선예의 얼굴은 근심걱정으로 가득해 생기가 죽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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