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그림 그리는 마법사 - 24회
[이강수 작가! 하하. 강 팀장입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전 대리에게 ‘숲 속 다람쥐 가족’의 성적이 좋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하하. 이게 다 이 작가 덕이 아닙니까? 내 감으론 숲 속 다람쥐 가족이 올 해 그림책 부분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될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내년에도 계속 팔릴지 모릅니다. 이렇게 좋은 그림을 그려주었는데 그냥 넘어갈 수 없지요. 이 작가에게 신세를 갚아야죠. 시간 언제 됩니까? 식사도 대접하고 의논할 문제가 있어서요.]
출판사 팀장이 자신과 의논하려고 하는 문제는 뻔하다.
‘분명 작품 의뢰겠지. 앞으로 일러스트는 안 할 거지만···.’
강 팀장이 뭘 의논하려고 하는지 대충 짐작은 갔지만 지금까지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호의까지 거절할 수는 없었다.
“저는 아무 때나 상관없습니다. 팀장님 편하신 시간에 제가 맞추죠.”
[어버이날이 껴서 주말은 바쁠 테고 다음 주 월요일 어떻습니까?]
“예, 좋습니다.”
[하하. 잘 됐습니다. 아, 혹시 가고 싶은 음식점이나 먹고 싶은 음식이 있습니까? 가격은 상관하지 마시고 뭐든 괜찮으니까요.]
강수는 전수민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글쎄요, 음식점은 어디가 맛있게 하는지는 모르겠고 한우 꽃등심 어떤가요?”
[하하. 알겠습니다. 꽃등심 잘 하는 곳으로 모시지요. 시간과 장소는 잠시 후 문자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아, 참. 사장님이 이 작가를 만나고 싶다고 하셔서 모시고 갈 겁니다.]
“사장님이요?”
[예, 전혀 부담 갖지 마시고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아, 예에.”
무지개출판사 사장을 본 적은 없었다. 이번 작품이 사장까지 관심을 가질 정도인가 싶었다.
문자는 10분 뒤에 왔다.
대학로에 위치한 송월정이고 시간은 7시였다.
강수는 어두워지는 시골길을 느긋하게 걷다가 또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다.
이번엔 역시나 준태였다.
[짜샤, 집에 왔으면 전화 한 통 때려야지 꼭 이 엉아가 전화를 해야 하냐?]
“좀 전에 밥 먹었어. 그렇지 않아도 전화 하려고 했다.”
[좋아. 그렇다 치고. 간만에 고향 내려왔으니 막걸리 한 잔 해야지? 한 시간 후에 종규 집으로 와라.]
준태와 종규는 동갑내기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했다.
특별한 기술이 없는 두 녀석은 온갖 허접한 알바를 전전하면서 몇 년씩 구르다가 서울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귀향해 특용작물을 재배하고 있는 친구들이다.
녀석들을 만나면 술을 안 마실 수가 없다.
“알았다. 있다가 보자.”
시간에 맞춰 산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강수는 안방에 얼굴을 내밀었다.
“어머니, 저 종규 집에 좀 갔다 올게요.”
“종규 집? 그래. 갔다 와. 술은 적당히 마시고.”
김순옥 여사는 술 마시러 가는 줄 안다는 듯 주의를 주었다.
“예. 제가 언제 과음했나요? 걱정 마세요.”
결국 강수는 고향 친구들과 늦게까지 어울렸고, 마나회로 수련을 할 수 없었다. 도솔산에서 하는 마나회로 수련은 나중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부모님을 모시고 외식을 끝낸 강수는 서울로 올라갔다.
*
선예와 바다가제를 먹기로 한 토요일이다.
새벽에 일어나 수련을 끝내고 돌아와 작업을 하던 강수는 4시부터 선예와의 만남을 준비했다.
‘뭘 입는다?’
선예가 농담 삼아 옷을 대충 입는다고 했지만 역시 대충 입고 가기는 싫었다.
우선 역 근처 '박혁헤어'에서 머리를 다듬었다.
옷은 뭘 입을까 고민하다 슈트로 결정했다. 오랜만에 입는 네이비 색상의 슈트인데 나름 괜찮아 보였다.
선예가 여동생 같긴 했지만 어쨌든 여대생과의 외출이라 아무래도 외모와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딩동, 딩동!
6시쯤 선예가 왔는지 초인종이 울렸다.
신경 써서 외출 준비를 끝낸 강수는 현관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헨드백을 어깨에 맨 발랄한 옷차림의 선예가 상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릎 위로 올라간 진한 자주색 플레어 스커트에 살이 비치는 검정색의 팬티스타킹으로 코디했다. 상의는 거즈면 소재의 가벼운 블라우스에 자켓을 걸쳤다. 순정만화 속의 깜찍한 미소녀 캐릭터가 튀어나온 듯했다.
깜찍한 미소녀 캐릭터의 앙증맞은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와, 이렇게 차려 입으니까 강수오빠 엄청 훈남이네요. 멋있어요.”
깜찍한 미소녀 캐릭터가 엄지손가락을 척 올렸다.
“저 어때요? 강수오빠랑 외식이라 신경 써서 입었는데.”
선예가 몸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본래 얼굴이 예쁘고 몸매는 늘씬했는데 거기에다 옷차림까지 공을 들였으니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신발은 검정색 하이힐을 신었는데 덕분에 키도 한층 커 보였다.
선예 정도의 미모와 몸매면 사실 뭘 입어도 남자들의 눈을 사로잡을 만했다.
“으응, 예쁜데.”
놀란 속마음을 감추려고 미지근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속으로는 한숨이 나왔다.
‘눈부시기는 한데 너무 튀는 거 아닌가 싶다.’
“어, 반응이 별로네요? 오빠 맘에 안 드나보다. 다른 걸로 입고 올까요?”
흠칫 놀란 강수가 얼른 말했다.
“아, 아니. 무슨 소리야? 보기만 좋고 예쁘다니까. 밖에 나가면 남자들이 선예랑 같이 있는 날 엄청 부러워할 걸.”
“헤헤. 그럼 가요.”
선예가 강수의 팔짱을 끼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끌었다.
‘어어. 얘는 만나기만 하면 팔짱을 끼는구나? 하긴 이웃집 오빠라고 생각하니까 스스럼없이 팔짱을 끼는 건가? 이딴 거로 과잉반응할 건 없긴 하지만.’
강수는 선예의 팔짱에 신경을 끄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
선예와 강수는 택시에서 내려 신논현역의 뒷골목으로 걸어갔다.
연예인 급 미모를 뽐내는 선예는 거리에서 남자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남자들은 선예와 팔짱을 끼고 있는 강수를 질시와 부러움이 섞인 눈빛으로 힐끔거렸다.
‘와, 시발. 존나 예쁘다. 저런 여자와 살면 얼마나 환상적일까? 근데 옆에 새끼는 나이 좀 처먹은 거 아냐? 뭐 하는 놈이지?’
강수와 선예를 훔쳐보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속으로 이렇게 강수를 욕하고 부러워했다.
남자들의 질시 어린 시선을 느낀 강수가 우월한 기분을 만끽하며 팔짱을 끼고 있는 선예를 슬쩍 보았다.
항상 밝게 웃으며 쾌활했는데 오늘따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얼굴이 조금 굳어 보였다.
‘응? 얘가 웬일이지?’
“선예야, 혹시 불편한 거 있니?”
“아, 아뇨. 그냥 아빠 생각을 좀 하느라.”
“아빠가 왜?”
“어제 집에 갔는데 아빠가 좀 힘들어 하시는 거 같아서요. 열심히 일 하시니까 곧 괜찮아 지겠죠. 다 왔어요. 저기예요.”
두 사람은 신논현역의 뒷골목에 위치한 랍스터 전문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건물의 3층을 통째로 쓰는 레스토랑의 실내는 조명이 많아 밝았고, 인테리어는 고급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토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탁자는 손님으로 거의 차 있었다.
말끔한 근무복을 입은 20대의 점원이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예약 하셨나요?”
“예. 오선예로 두 명 예약했어요.”
예약판을 살핀 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자리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예약석에 안내 받은 선예는 이미 생각해 둔 메뉴가 있는지 메뉴판을 펼쳐서 가리켰다.
“오빠, 이 메뉴 어때요?”
선예가 가리킨 메뉴는 바닷가재 회였다.
아마도 메뉴판에서 가장 비싼 메뉴 같았는데 1.8kg이 190$고, 2.0kg는 205$였다. 아래 설명에는 <바닷가제 꼬리 부분은 회로 드시고, 나머지 집게와 몸통 부분은 구이나 찜으로 드시는 요리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선예가 원하는 요리를 사주기로 했으므로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좋아, 그걸로 시켜.”
“헤헤, 1.8키로짜리로 주고, 몸통은 치즈, 칠리 구이로 해주세요. 그리고···.”
강수가 끼어들었다.
“잠깐. 작은 걸로 되겠어? 기왕이면 큰 걸 시키자. 1.8말고 2키로짜리로 주시죠.”
“예, 2키로 변경하겠습니다.”
“2키로짜리는 좀 큰데. 히히, 그래도 오늘 배터지게 먹겠다.”
선예가 메뉴판을 넘겼다. 주류 목록이 나왔다.
“와인 한 병 시켜도 되요?”
“술 마셔도 괜찮겠어?”
강수의 걱정 어린 눈빛에 선예가 가볍게 웃음 터트렸다.
“킥, 와인 정도는 괜찮아요. 오빠는 어떤 와인이 좋아요?”
“난 아무 와인이나 다 좋아. 선예가 마음에 드는 걸로 시켜.”
“그럼 이걸로 시킬게요.”
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예는 오리진 리제르바 샤도네이라는 화이트 와인을 시켰다. 알코올도수 12.5%에 가격은 65$다.
선예가 강수를 보며 귀엽게 눈을 찡끗 했다.
“오빠, 부담되는 거 아니죠?”
“부담? 하하. 부담은 쬐끔 되지만 매일 먹는 요리도 아니고 이 정도는 괜찮아. 게다가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선예 덕분에 맛있는 랍스터를 먹게 되었으니까 말이지.”
“헤헤, 다행이다.”
와인과 애피타이저가 나오기 시작했다.
조각 빵과 스프에 이어 두부치즈, 카나페, 버섯탕수육, 오븐파스타 등과 샐러드가 추가되었다.
점원이 와인을 한 잔씩 따라주고 돌아갔다.
선예는 애피타이저는 한 점씩만 맛을 볼 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아무래도 메인 메뉴인 랍스터를 양껏 먹으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
‘역시 큰 놈을 시키길 잘 했지. 모자라는 것보다야 남는 게 낫지.’
선예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강수오빠는 고등학교 다녔을 때 미소년 스타일이라 인기 많았을 거 같아요. 여학생들이 많이 따랐죠?”
“인기? 글쎄? 학교에 나보다 잘생긴 녀석이 여럿 있었거든. 난 그리 관심 받지 못했는데.”
“예에? 설마요?”
“진짠데. 그 때 인기 좋았던 녀석들 가운데 연예인이 된 친구가 하나 있어.”
“와, 내가 알 만한 사람이에요?”
“당연히.”
“누군데요?”
“끼리끼리 논다고 녀석은 꽃보다 미남클럽을 만들어서 지들끼리 놀았어. 그 녀석이 내 친구도 아니고 별로 알려주고 싶지 않은데?”
“아, 노는 게 밥맛 없는 미남들이네? 그런 인간들은 나도 관심 없어요. 근데 오빠는 고향이 서울이에요?”
“아니, 강원도 양구.”
“그럼 양구에서 학교를 다녔겠네요.”
“그렇지.”
선예는 속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양구 출신으로 28세 정도 된 남자연예인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참, 강수오빠는 형제가 어떻게 되요?”
“형제? 음, 난 혼자야.”
“어, 그래요? 형제 없이 자랐으면 좀 외로웠겠다.”
“선예는 형제가 어떤데?”
“저는 고등학생인 남동생 하나, 중학생인 여동생 하나 모두 삼남매예요.”
“학생이 셋이나. 부모님이 능력 있으시네.”
“예. 부모님이 아이를 좋아해서요. 형편만 되면 더 낳고 싶다고 하셨으니까요.”
선예의 눈가에 살짝 그늘이 스쳤으나 강수는 알아보지 못했다.
“선예 부모님은 정말 아이를 사랑하시는구나. 실은 나도 형이 있긴 했었어.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형인데 다섯 살 때인가 사고로 하늘나라에 갔거든. 벌써 27년이 흘렀나? 사고만 없었으면 지금 아이 낳고 잘 살고 있었을 텐데.”
선예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어머, 5살에 하늘나라에 갔다구요? 너무 불쌍해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어요?”
강수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동네에 도사견이 한 마리 있었는데 어느 날 줄이 풀린 도사견이 마을을 돌아다니다 집 앞에서 놀던 한수형을 물어서··· 병원으로 갔을 때는 너무 늦었어. 어이없지만 그렇게 허망하게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어.”
“미안해요. 제가 괜히 말을 꺼내가지고···.”
“아냐. 내가 얘기한 건데 뭐. 오래 전 일이기도 하고 나는 한 살 때라 그냥 전해 들어서 기억의 한 조각으로 간직하고 있을 뿐이야.”
“그래도 슬픈 건 어쩔 수 없죠?”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잖니. 아픈 기억을 품고 살아갈 수는 없어.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슬픔도 바래지지.“
“강수오빠 말이 맞아요. 뉴스를 봐도 어린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참 많잖아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일 텐데 그 슬픔이 바래지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어요.”
분위기가 무거워 졌다고 느꼈는지 선예가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참, 강수오빠. 영화 좋아해요?”
영화도 예술의 한 분야라 강수도 관심이 많았다. 다만 일러스트 작업에 매달리다 보니 영화관에 갈 기회는 많지 않았다.
“좋아하긴 하지만 안 본지 꽤 됐는데.”
“다음 달에 마이펫의 이중생활2가 개봉하거든요.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가 굉장히 귀여워요. 같이 보러 가요.”
“으응, 그럴까?”
선예가 화제를 영화 쪽으로 돌리면서 시시한 잡담을 나눌 때 드디어 나무고깔 속에 담긴 바닷가재회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