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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는 마법사-23화 (23/197)

# 23

그림 그리는 마법사 - 23회

부엌문이 열리고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인이 나왔다.

얼굴과 손의 피부가 햇볕에 그을려 검어진 강수의 어머니 김순옥 여사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강수를 반겼다.

“아이구, 내 새끼 강수 왔구나. 기다리고 있었다. 어여 들어가거라.”

강수는 한 송이로 된 카네이션 두 개와 꽃다발을 드렸다.

“어머니, 이거부터 달으세요.”

“고마워, 아들. 근데 이거 꼭 달아야 하니?”

“남들 다 하는데 어머니, 아버지만 안 하면 저 불효자식이라고 욕해요.”

“그래, 알았다.”

김순옥 여사는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았다.

“아버지는 계세요?”

“아버지는 약 치러 가셨어. 곧 저녁 드시러 오실 거다. 먼저 씻어라.”

“어휴, 농약 몸에 좋지도 않은데 안치면 안 돼요? 벌레 먹은 건 버리고 조금만 수확해도 되잖아요.”

“약을 안치면 농사가 안 되는데 또 그 얘기니? 그나마 네 아버지는 제초제도 안 하고, 약도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절반도 치지 않아. 너무 걱정하지 말고 가서 네 할 일이나 해.”

“아, 참나. 빨리 돈 벌어서 약 안치고 우리 먹을 것만 농사지으시라고 해야겠어요.”

강수의 투정에 김순옥 여사가 웃으며 강수의 등을 토닥였다.

“착한 내 새끼. 나도 얼른 그랬으면 좋겠구나.”

“정말이에요. 두고 보세요.”

“그래, 그래. 어여 들어가.”

강수는 투덜대며 마루 옆에 붙어있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서울로 올라가기 전까지 지냈던 방이다.

크지 않은 방에는 창문 아래 손때가 묻은 낡은 책상과 미술대회에서 받은 각종 상패가 진열된 오래된 책장이 자리하고 있다. 한쪽 벽에는 원목무늬시트가 군데군데 떨어져나간 옷장, 옷장 옆에 4단 서랍장이 놓여있다. 그리고 방의 구석에는 홍우대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렸던 그림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정물처럼 십 수 년 동안 변화 없는 풍경이다. 19년간 자신이 살아온 삶의 흔적이기도 했다.

자신의 방에 들어오면 항상 과거의 그 시절, 고등학교를 다니던 학창시절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좋겠다···.’

요즘 들어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때때로 든다.

만약에 신이라는 존재가 있어 심심풀이 삼아 10년 전 과거로 회귀시켜준다고 해도 기억을 가지고 회귀하지 않은 이상 달라질 것은 없다.

그저 똑같은 삶을 한 번 더 살 뿐이다.

하지만 신이 친절하게도 기억을 지우지 않고 10년 전으로 회귀시켜준다면 어떨까?

강수는 과거를 되새김질 해보았다.

‘그래도 그림을 그릴까? 아니면 다른 쪽으로 진로를 바꿀까? 그때 용기를 내서 지나

와 사귀었으면 어땠을까? 지금쯤이면 결혼했을지도 몰라. 후후, 무엇을 선택 하냐에 따라 이렇게 종착점이 달라지는 거지. 대학에 가서는 혜주를 사겼는데···.’

강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음, 혜주는 절대 만나지 않을 테지만 종희는 어떨까?’

평생의 반려자로 생각했던 종희.

종희를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아리고 한편으론 씁쓸했다. 마음에 남은 종희의 흔적이 없어지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과거로 돌아간들 종희를 지킬 수는 없겠지.’

종희가 진로를 바꾸지 않는 이상 금수저를 만나는 운명은 필연이다.

미래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엄청난 부를 쌓아 종희와 결혼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종희를 지킬 수 없을 것이다.

줄곧 그림만 그려온 탓에 1등 로또 번호도, 폭등하는 주식이나 땅도, 스포츠 게임의 승패도 알지 못한다.

물론 가상화폐의 광풍이나 몇몇 굵직한 흐름은 알고 있어서 노력하면 보다 쉽게 부를 쌓을 수는 있겠지만 유성그룹의 셋째고, 유성홈쇼핑의 전무라는 금수저에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회귀시켜 줘도 전 뭐시기처럼 거부가 될 수는 없을 거야. 으, 망상은 관두자.’

강수는 의자에서 일어나 잡생각을 떨치고, 서랍장을 열어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욕실에서 간단히 손발을 씻고 주방으로 갔다.

“어머니, 뭘 도와드릴까요?”

“여긴 왜 왔어. 씻었으면 네 방에서 쉬고 있어. 저녁 되면 부를 테니까.”

김순옥 여사에게 쫓겨난 강수는 마당으로 나왔다.

이때, 대문이 열리고 어깨에 분무기를 멘 후줄근한 작업복을 입은 60대 초반의 초로의 노인이 들어왔다.

노인을 보고 강수가 반색해서 다가갔다.

강수의 아버지, 이전일이다.

“아버지 오셨어요.”

이전일은 173cm 정도의 적당한 키에 군살이 없는 마른 체형이고, 햇볕에 검게 탄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 했다.

“강수 왔냐.”

강수가 아버지의 어깨에 맨 분무기를 받아 들었다.

“아, 농약냄새. 분무기는 제가 씻을 테니까 얼른 샤워부터 하세요.”

몸에서 농약냄새만 나면 짜증을 부리는 아들이 밉지 않은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녀석두. 맨날 그 소리냐?”

강수는 양동이에 물을 떠와 농약 약제가 묻은 분무기 내부를 씻어내고 마당 한쪽에 있는 농기구 창고로 갖다 놓았다.

잠시 후 강수 가족은 식탁을 두고 마주앉았다.

식탁에는 청국장과 고등어구이, 김치와 몇 가지 밑반찬이 올라왔다.

“아, 청국장 냄새 좋다. 역시 어머니가 차려 주는 밥상이 최고라니까.”

“호호, 그렇지?”

“네. 어머니가 김치하고 밑반찬 보내주지 않았으면 전 아마 뼈만 남았을 걸요.”

청국장을 떠먹은 이전일이 한마디 했다.

“이놈아, 언제까지 엄마를 부려먹을 작정이냐? 서울에 아파트도 마련했고 네 나이도 이제 스물여덟인데 슬슬 결혼을 생각해 봐야지. 여자 친구는 있니?”

“예? 결혼이요?”

강수가 멋쩍게 웃었다.

“하하. 요즘 서른도 안 돼서 결혼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 최소 서른은 넘어야 결혼도 생각해 보는 거죠.”

강수 부모님은 종희와 사귀었던 사실을 모른다. 종희가 연예계 쪽으로 진로를 정하면서 부모님께 소개시킬 기회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소개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이전일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세상이 이렇게 각박해졌는지 모르겠구나. 예전에는 25세 전에 결혼하고 애 낳고 잘살았다. 그때는 결혼하지 않으면 어른 대접도 받지 못했는데 말이지.”

“아버지, 언제적 얘기예요? 요즘은 3포도 5포도 아니고 N포시대라구요. 젊은 세대에게 결혼은 주요 관심사가 아녜요. 취업이나 자기계발, 취미 같은 거죠.”

“N포시대?”

“연애 포기, 결혼 포기, 아이 포기를 3포라고 하거든요. 거기에 인간관계, 집을 포기하면 5포죠. 7포도 있지만 포기할 것이 너무 많으니까 이젠 아예 N포라고 한다니까요.”

“미쳤군. 뭣 때문에 그렇게 전부 포기하고 사는데? 우리 때에는 가진 것 한 푼 없어도 결혼만 잘 하고, 단칸방이라도 알콩달콩 신혼생활만 잘 했어. 어려워도 같이 노력해서 집도 마련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대궐 같은 집에서 살 수가 있나.”

“그게 어디 말처럼 되야 말이죠.”

“안 될 건 뭐냐? 젊은 친구들이 도전은 하지 않고 포기부터 하는 것이 문제 아니냐?”

“도전하면 뭘 해요. 어차피 실패하고 마는데요. 그러니까 아예 각자의 처지를 인정하고 현실에 맞게 사는 것 같아요.”

“쯧쯧, 하여튼 남들이 그렇게 살든 말든 너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예. 걱정 마세요. 아버지 말씀처럼 도전하면서 열심히 살게요.”

아들과 아빠가 토닥이는 모습을 보며 김순옥 여사는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현실이 각박하고 어렵긴 해도 난 네가 좀 일찍 결혼했으면 좋겠구나. 그래서 빨리 손주를 안아보면 얼마나 좋겠니?”

부모님의 실망스런 모습을 보기 싫은 강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저도 서른 정도에 결혼하도록 노력할게요.”

“흐음. 잘 생각했다. 사내는 자식을 낳고 기르고 가정을 이뤄야 진짜 어른이 되는 게야.”

이전일이 아내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보, 강수가 결혼을 하겠다고 노력한다니 우리도 도와줍시다. 강수 배필이 될 만한 참한 아가씨가 어디 있는지 좀 알아 보구려.”

배필이라는 말에 강수가 눈을 크게 떴다.

“예에?”

“호호. 알겠어요.”

강수가 정색해서 말했다.

“아버지. 결혼정보회사가 널렸는데 요즘 무슨 중매를 서요. 그리고 제 주변에 여자 많아요. 저는 연애결혼할 거라구요.”

“조건보고 중매 서는 결혼정보회사? 이놈아, 아서라. 어디서 뭘 하면서 지냈는지 속도 모르는 여자를 만나서 참 잘 살기도 하겠다. 배필은 자고로 품행이 단정하고, 언행이 바르고, 사람 됨됨이가 곧아야 하는 것이여. 게다가 대학은 4년이나 다니고 졸업한지도 3년짼데 여태껏 여자친구 한 명 없다는 놈이 무슨 연애결혼 타령이냐.”

어머니가 아버지를 거들었다.

“강수야, 중매 본다고 부담 가질 것 없어. 만나보고 서로 맘에 들면 사귀면서 천천히 연애하다 결혼해야 되겠다 싶으면 결혼하고, 그렇지 않으면 헤어질 수도 있으니까.”

“엄마 말이 맞아. 중매 본 여자하고 결혼하란 얘기가 아니다. 여자를 만나야 연애든 결혼이든 생각도 해 보는 거지. 아예 만나지를 않으면 무슨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단 말이냐?”

계속 얘기해 봐야 득이 없을 것으로 판단을 내린 강수가 한발짝 물러났다.

“아휴, 알았어요. 알긴 했는데 사진보고 맘에 안 들면 선도 안 볼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어흠, 그래? 알았다.”

요즘은 세태는 만혼이 흐름이다.

30대 결혼하는 것이 주류고, 늦으면 40대에 초혼을 하는 경우도 많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라면 경제적인 문제다.

현실적으로 만만하지 않은 돈이 필요하다. 이미 모든 가치의 기준이 돈으로 변해버렸지만 특히 결혼은 돈이 없으면 거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한 결혼정보회사가 몇 년 전 결혼한 신혼부부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집을 장만하는 비용을 빼고도 결혼식 올리는데 평균 7600만원이 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더 늘었으면 늘었지 줄지 않았을 것이다.

집장만 비용을 빼고도 8천만원 가까운 돈은 평범한 직장인에게 정말 큰돈이다.

강수의 생각 저변에도 이런 결혼식 풍속도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아파트를 마련하는데 기를 썼던 것이다.

강수가 화제를 전환했다.

“참, 내일 점심은 시내에 가서 외식해요.”

이전일이 대뜸 반대했다.

“먹을 게 뭐 있다고 비싼 돈 주고 외식을 해? 집에서 밥 먹으면 됐지.”

김옥순 여사가 코웃음을 치며 이전일을 구박했다.

“이이는 외식 얘기만 하면 돈타령이야. 매일 집에서 먹는 밥이 물리지도 않아요? 가끔은 외식하면서 기분전환하면 좋잖아요. ”

“물리긴 왜 물려. 밖에서 사 먹어봐야 맛도 그저 그렇고 비싸기만 하잖아. 맛만 있어봐 내가 왜 안 사 먹어?”

“됐어요. 맛이 있든 없든 나는 강수하고 외식하고 올 테니까 당신 혼자 밥을 차려서 먹든 말든 알아서 해요.”

토닥거리는 부모 사이에 강수가 중재하고 나섰다.

“아버지, 시내에 맛집으로 유명한 유황오리집이 있는데 거기 가서 먹어요. 가격도 한우에 비교하면 그렇게 비싸지도 않으니까요.”

이전일은 아내가 아들에게 힘을 보태주자 별 수 없이 항복했다.

“정 그러면 얼마나 맛있게 요리하는지 한번 가보지.”

마지못해 식당에 끌려가야 하는 게 불만인 듯 퉁명스런 표정을 짓는 아버지를 보며 속으로 웃었다.

얼굴에 미소를 띤 강수가 품에서 봉투 두 개를 꺼냈다.

“이거는 선물을 뭘 살지 몰라서 돈으로 드리는 거예요. 얼마 안 되지만 필요한 것 사세요.”

김순옥 여사가 봉투를 강수에게 밀었다.

“강수야, 서울에서 생활하려면 돈이 많이 들 텐데 안 줘도 돼. 이건 네가 써라.”

이전일이 팔을 뻗어 돈 봉투 두 개를 덥석 집었다.

“허허, 선물 사라는 돈인데 안 받으면 쓰나. 당신이 받기 싫다면 내가 쓰지.”

김순옥 여사의 눈매가 사납게 변했다.

“아니, 이이가. 내 꺼는 이리 줘요.”

“왜? 필요 없다며.”

“당신은 당신 것만 가지면 돼지 내 것은 왜 건들어요. 빨리 내 놔요.”

“허허, 안 받겠다고 하더니 날 주기는 싫은 모양이군. 달라면 줘야지. 자, 여깃소.”

두 분이 옥신각신하는 모습에 강수가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 소화도 시킬 겸 산책하고 올게요.”

“그래. 너무 늦지 말고 오너라.”

강수는 재빨리 마당으로 나왔다.

주변은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30분쯤 지나면 가로등과 가정집에서 밝힌 불빛 외에는 완전히 어둠에 잠길 것이다.

“갑자기 왜 중매 얘기는 꺼내시고 난리야?”

투덜대던 강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형이 살아 있었으면 벌써 손주를 보았겠지? 왜 죽어가지고···.”

강수가 한 살 때 다섯 살인 형은 불의의 사고를 당해 유명을 달리했다. 때문에 형에 대한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강수는 애써 슬픈 기억을 접고 산길을 걸었다.

‘공기가 깨끗하고 상쾌한 것이 마나가 풍부할 것 같은데? 내일 상황을 봐서 수련을 해 볼까?’

내일 부모님을 모시고 시내에 나가 외식을 하려면 오전 11시에는 집에서 출발을 해야 한다.

‘새벽에 일어나면 두세 시간쯤은 수련을 할 수 있겠구나.’

우우웅!

‘준태인가?’

고향에 내려오면 꼭 전화해서 불러내는 친구다.

‘어? 무지개출판사 강 팀장님이군. 조만간 전화 할 거라고 하더니 빨리도 왔네.’

강수는 통화를 연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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