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22화 (22/197)

# 22

그림 그리는 마법사 - 22회

“흐음, 로캬롭퓨 경.”

황제의 좌측 탁자 첫 번째 의자에 앉아 있던 로캬롭퓨가 공손히 대답했다.

“예, 폐하.”

“도망간 투팍탈을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투팍탈은 코탼에 숨어서 힘을 길렀습니다. 그 자가 살아 있는 한 역모를 꾀할 것이 틀림없으므로 지옥이라도 쫓아가 제거해야 할 제국의 반역자입니다.”

“능휼터 경의 말로는 괴상한 고대의 마법진을 만들어 도망쳤는데 어떻게 추격할 셈인가?”

“미완성 마법진이라면 완성한 후 추격을 재개하면 될 것입니다. 설마 제국의 마법의회에서 서클 세 개를 채우지 못하겠습니까?”

“마법진을 완성하잔 말이지?”

능휼터가 눈을 부릅뜨고 황실기사단장 로캬롭퓨를 쏘아보며 말했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하라.”

“미완성 마법진으로 도망한 투팍탈도 큐라토퍄처럼 무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미 먼지로 화해서 흔적조차 남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굳이 마법진을 완성해서 추격할 이유는 없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로캬롭퓨가 냉랭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의장은 투팍탈이 멀쩡하다는 큐라토파의 말을 듣지 못했소? 그 놈이 도망친 곳이 어디인지 몰라도 호시탐탐 제국의 허점을 노리고 있을 것이오. 인구 10만에 불과한 코탼에서 마법사를 30명이나 양성했단 말이오. 그자는 결코 살려둘 수 없는 자요.”

“이미 죽었을지도 모를 떠돌이 마법사 따위 때문에 어떤 위험을 가져올지 모를 고대의 마법진을 완성할 이유가 뭔지 의문이군.”

“마법진은 마정석으로 통제할 수 있는데 무슨 위험이 있겠소? 혹시 반역자 투팍탈이 만든 마법진을 완성하지 못하면 체면을 구길까 싶어서 포기하자는 것 아니오? 마법 실력이 모자라 못 만든다면 할 수 없지만 말이오.”

“뭐라고! 지금 말 다 했소?”

의장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지고 눈빛이 비수처럼 날카로워졌다.

로캬롭류는 조롱하듯 비웃음을 띠고 있었다.

능휼터가 속으로 이를 갈았다.

‘개자식! 내 언젠가 네 놈을 헬블레이즈로 활활 태워버리리라.’

한 명은 제국 남부 지역의 패권을 쥐고 있는 영주 마캬휼터의 아버지이자 마법의회의 의장이고, 한 명은 최고의 권위와 무력을 갖춘 제국기사단 단장이다.

능휼터는 영주 출신으로 고위마법사가 된 흔치 않은 케이스였고, 아들에게 영주직을 물려주고 마법의회 의장이 되었다.

두 자랄인은 황제와 황태자 외에는 아무도 안중에 없는 제국의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각자의 영역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두 자랄인은 암중으로 권력다툼을 벌일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로캬롭퓨는 제국의 잠재적인 위험 요소인 늙은 마법사 능휼터를 경계했다.

기존의 마법의회 의장과는 다르게 영주 출신이자 남부지역의 실질적인 지배자이기도 한 능휼터는 권력에 손을 뻗치고 있었다.

마법사면 마법사답게 마법연구나 할 일이지 정치에 개입해서 자신의 파벌을 키웠고, 정적은 고립시키고, 배척했다.

자신이 견제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어 황태자마저 어찌하지 못하는 제국의 2인자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크놀뱌쿠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폐하가 계시지 않소? 두 분은 자중하시오.”

로캬롭퓨와 능휼터가 입을 다물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능휼터 경.”

능휼터가 자신을 부르는 황제에게 머리를 수그렸다.

“예, 폐하.”

“투팍탈은 8서클 흑마법사이니 그가 살아있으면 제국의 안녕에 해가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또한 놈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면 짐의 잠자리가 편하지 않겠는가? 경은 코탼 영지의 미완성 마법진을 완성할 수 있는가?”

황제가 마법진의 완성을 원하는데 못한다고 어찌 말하랴.

“고대의 룬어가 태반이라 장담은 못 하지만 신은 모든 역량을 전부 쏟아부어 마법진을 완성하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라.”

황제는 좌중의 귀족과 고위마법사, 을 한차례 훑고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들어라.”

실내의 권력자들이 고개를 숙이며 일제히 대답했다.

“예, 폐하. 경청하겠습니다.”

“오늘 회의 내용은 극비다. 황명으로 일체의 외부 유출을 금한다. 만약 히뮤티야 제국에 정보가 넘어가면 경들에게 그 책임을 묻겠다.”

실내의 모든 자들이 황제에게 허리를 깊이 숙이고 대답했다.

“황명을 받듭니다. 폐하.”

*

강수의 마나회로 수련은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수련을 끝낸 후에는 덕진대 근처에서 여전히 점심을 해결했지만 선예를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소보명가에서 비싼 정식을 얻어먹었기 때문에 다시 만나면 꼭 밥을 사주려고 했지만 우연은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 아닌 모양이었다.

백반 정식으로 한 끼를 때우기 위해 덕진대 쪽으로 걸어가던 강수는 편의점의 가판대에 진열된 카네이션을 보고서야 낼 모래가 어버이날이란 것을 깨달았다.

‘와, 시간 빠르네.’

대학 때는 어버이날에도 바쁘다는 구실로 고향의 부모님을 찾지 않았다.

졸업 후에는 당연히 부모님을 찾아 뵈었지만.

‘내일 3시쯤 출발하면 되려나? 출발하기 전에 전화 먼저 해 드려야겠다.’

우우웅!

이때 스마트폰이 울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보니 전수민의 문자였다.

-이 작가님, 숲 속 다람쥐 가족 1쇄 3천부 열흘 만에 매진됐어요. 2쇄 인쇄 들어갔어요. 이 작품, 대박 조짐이 보여요.

‘헐, 대박 조짐씩이나!’

강수는 천천히 걸어가며 문자를 보냈다.

-우와, 엄청 빨리 매진 됐네요. 놀라운데요.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반응이 좋아요. 조만간 팀장님이 연락할 걸요? 맛있는 거 사달라고 하세요.

-하하, 그래요? 연락 오면 한우 꽃등심 사달라고 해야겠군요.

-더 비싼 거 사달라고 하세요. 아마 뭐든 사줄걸요.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네. 이 작가님도요.

강수는 그림을 매절했기 때문에 그림책이 대박 나도 강수에게 금전인 이득은 없다.

돈은 인세를 받는 이야기 작가와 출판사가 번다.

다만 일러스트레이터로서 대박을 터트린 작가라는 명성은 얻을 수 있다. 명성이 높아지면 일감은 자연적으로 늘어나고 화료도 조금 더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화가의 길을 가기로 했으니 일감이 쏟아져도 일러스트를 할 생각은 없었다.

전수민과 문자를 끝낸 강수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떨어지고 어머니의 따스하고 애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새끼, 강수구나.]

“예, 어머니. 저예요. 잘 지내셨어요?”

[그럼. 우리야 탈 없이 지내고 있지. 참, 동진 애비가 며칠 전에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단다.]

“예? 무슨 말씀이에요. 저번 설에 봤을 때만해도 건강했는데요?”

[그러게 말이다. 나도 믿기지가 않는구나.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에도 멀쩡했는데 그렇게 갑자기 쓰러질 줄은 몰랐지.]

“어떻게 돌아가신 거예요?”

[직장에서 일하다 쓰러졌는데 손쓸 새도 없이 몇 분만에 유명을 달리했다고 하더구나. 원래 그 집안 남자들이 심장이 약해서 명이 짧긴 해. 그래서 평소에도 술, 담배 안하고 건강에 신경 썼다는데도 그런 일을 당했지 뭐냐. 너도 젊다고 자신만만해 하지 말고 항상 건강에 신경 써야 해.]

“예예. 알았어요. 근데 정말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시다니 믿기지가 않아요. 연세도 얼마 되지 않잖아요.”

[이제 60인가 그렇지. 그나저나 넌 밥은 잘 챙겨먹고 있니? 아픈 데는 없고?]

“예. 전 건강해요.”

[돈보다 건강이 최고다. 죽으면 돈이고 뭐고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 돈 벌겠다고 몸 상하지 말거라.]

갑자기 어머니의 말이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희망찬 미래를 쟁취하겠다는 일념으로 새파란 청춘을 죽어라 일러스트를 그리며 날려버린 것이다.

“예. 어머니.”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한 거니?]

“알면서 왜 그러세요? 모래가 어버이날이잖아요. 내일 점심 지나서 1시쯤 출발하면 6시 전에 도착할거에요. 어머니, 혹시 필요한 거 있어요?”

[그런 거 없다. 몸만 와도 되니까 조심히 와.]

“알았어요. 그럼 내일 뵈요.”

[오냐.]

전화를 끊은 강수는 잠시 하늘에 시선을 돌렸다. 영원히 불멸할 것 같은 파란 하늘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설 때만 해도 건강했던 박씨 아저씨가 죽었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 닿지 않았다.

사람의 목숨은 때때로 불가항력적인 힘이 작용하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벽에 똥칠까지 하면서 사는가 하면 동진 아버지처럼 건강해 보여도 한순간에 유명을 달리하니 말이다.

사람에겐 기대수명과 기대여명이라는 것이 있다.

한국인의 경우 남녀가 차이 나지만 대충 80살 전후가 기대수명이다. 기대여명은 현 시점에서 앞으로 생존할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생존연수다. 대부분은 기대수명보다 더 오래 살기를 바랄 것이다.

요즘은 100세 시대라고 한다.

현대의학과 의료기술의 발전이 이룩해낸 과실이다.

덕분에 기대수명은 갈수록 길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개개인의 수명은 기대수명과는 궤를 달리 하는 것 같다. 개인에 따라 돌연사나 과로사, 각종 질병, 수많은 사건사고, 범죄의 표적, 자살 등 다양한 변수가 작용하고 있다.

공기 좋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부지런하게 사시는 부모님은 건강하다. 그래도 박씨 아저씨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으니 남일 같지가 않았다.

‘부모님도 건강을 잘 챙겨야 할 텐데. 내일 시골에 가면 종합건강진단은 받았는지 물어봐야겠구나. 안 받았으면 받으라고 해야지.’

우우웅!

손에 쥔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상념에 빠져있던 강수가 정신을 차리고 문자를 확인했다.

-강수오빠, 이번 주 주말에 시간 되요?

밥 사주려고 덕진대 근처를 기웃거려도 만날 수 없었던 선예의 문자였다.

-주말에? 왜?

-헤헤. 바닷가재 요리 잘 한다는 레스토랑을 알아놨거든요. 시간 되면 가려고 했는데. 혹시 바빠요?

‘애가 이제서야 시간이 났구나.’

선예에게 바닷가재를 사겠다고 한 약속을 지켜야 할 때가 되었다.

마나회로 수련과 작품 때문에 바쁘긴 했지만 외식 한번 하는 것쯤이야 괜찮았다.

-아니, 괜찮아. 산다고 했으니까 약속은 지켜야지. 주말이면 토요일?

-예. 토요일 저녁에 먹어요. 7시쯤 어때요?

-좋아.

-그럼 제가 6시에 오빠 집으로 내려갈게요. 만나서 같이 가요.

윗집에 사니 약속장소를 따로 정할 필요가 없어서 편했다.

-그러지, 뭐.

-헤헤, 오빠 안녕. 토요일에 봐요.

시골 집에서는 어버이날 다음날인 금요일에 서울로 출발하려고 했다. 토요일이니 약속 날짜는 괜찮았다.

오랜만에 바닷가재를 먹게 생겼다.

*

다음날 강수는 2시경 동서울 종합터미널에서 양구 시외버스터미널에 가는 버스를 탔다. 평일이라 서울을 빠져나갈 때 말고는 차는 많이 막히지 않았다.

2시간 남짓 후 양구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양구군은 한국에서 그림 값이 가장 비싼 화가 중 한 명인 박수근 화백이 태어난 곳이다.

양구읍 박수근로에는 박수근미술관이 건립되어 있다. 그리고 2014년 12월에 박수근 화백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박수근 파빌리온관을 새롭게 건립, 개관하였다.

박수근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어렸을 때 가세가 무너져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몰락한 집안 여건상 체계적인 미술 공부를 하지 못하고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광복과 6.25동란 등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에 매진한 박수근 화백은 한국화단에 큰 족적을 남겼다.

강수는 중, 고교 학창시절 박수근미술관을 자주 들락거렸고 박수근 화백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전시관에서는 신인과 중진 화가들의 전시가 때때로 열렸고, 그 때는 누구보다 빨리 달려가서 관람하곤 했다.

강수는 양구터미널에서 동면 팔와2리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팔와2리 정류장에서 하차한 강수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상쾌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고향에 내려올 때마다 느끼지만 깨끗한 공기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하늘은 새파랗고 시야에 닿는 곳까지 사물이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 공기 좋다.’

코가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옛날에 비하면 팔와리는 적지 않게 변화, 발전했다.

지방의 소도시나 군청 소재지만큼은 아니지만 도로는 잘 포장되었고, 건물은 깔끔해졌다. 옛날의 소박했던 시골 풍경이 적잖이 현대풍으로 바뀌었다.

마을 어른을 만나면 인사를 하며 숨골로를 따라 20분 정도 올라가 시골 집에 당도했다.

강수의 시골 집은 마을에 몇 남지 않은 한옥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옛날 집이다.

부엌과 욕실 겸 화장실, 보일러 등 부분적으로 고치거나 실내 형으로 만들어서 살고 있었다.

강수는 대문을 밀치고 마당에 들어서며 외쳤다.

“어머니, 저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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