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 그리는 마법사-15화 (15/197)

# 15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5회

퇴근 시간이 지나고 청계천은 사람들 점점 많아졌다.

젊은 연인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냇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잠깐의 산책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양복 차림의 직장인들, 간혹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도 보였다.

강수는 주변의 빌딩과 퇴근하는 직장인, 밝은 얼굴로 웃으며 지나가는 연인들의 순간의 움직임을 캐치해서 그렸다.

젊은 여성과 함께 수표교를 향해 다가오던 남자아이가 스케치를 하고 있는 강수를 향해 달려갔다.

“아저씨, 그림 그려요?”

스케치를 멈춘 강수가 남자아이를 보았다.

12살쯤 된 똘망하게 생긴 아이였다.

“응? 그래. 스케치 하는데.”

아이가 강수의 스케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야, 아저씨 딥따 잘 그린다. 화가예요?”

‘화가냐고?’

꼬마아이의 뜻밖의 질문에 강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은 일러스트레이터이지 화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화가의 꿈을 완전히 접지는 않았다. 단체전에 두 번 참여했었고, 백운대에 올랐을 때 전업화가 쪽으로 진로를 고민했지만 아직 화가라고 자신 있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화가는 아니고 화가가 되고 싶은 지망생이야.”

“으응, 아저씨는 화가가 되려고 하는구나. 히히, 사실 나도 그림 좋아해요. 원장님이 잘 그린다고 칭찬 하세요. 그래서 나도 커서 화가되려구요.”

꼬마녀석이 벌써부터 화가를 지망한다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하하. 커서 어떤 일을 할지 벌써 결정한 건 너무 빠른 거 아니니?”

“아뇨. 난 그림 그리는 게 제일 좋은 걸요. 전국 초등학교 사생대회에서 금상도 탔어요.”

“어? 정말? 대단한데.”

“아저씨, 다른 그림도 좀 보여주세요.”

“그래, 여기.”

강수는 스케치북을 꼬마에게 건네주었다. 꼬마는 스케치북을 받아 한장씩 넘기며 강수가 그린 스케치를 구경했다.

전국 초등학교 사생대회에서 금상을 탈 정도면 그림에 뛰어난 소질이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얘가 정말 화가가 되어 싶은 건가?’

자신은 꼬마 나이 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화가가 되겠다는 확고한 신념이나 굳은 의지가 부족하지 않은가?

‘아, 요 어린 꼬마가 나보다 더 낫구나.’

돈을 벌겠다고 일러스트에 올인 했던 자신의 지난 모습이 새삼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때, 아이 엄마로 보이는 30대 중반의 품위 있게 생긴 여성이 다가와 아이를 나무랐다.

“채준아, 이리와. 아저씨 귀찮게 하면 못써.”

여인이 강수에게 머리를 숙여 사과를 했다.

“방해해서 죄송해요.”

“아니, 괜찮습니다. 미술을 좋아해서 그런지 아이가 무척 쾌활하고 똑똑해 보입니다.”

여인이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아저씨, 우리 엄마 예쁘죠?”

채준이의 당돌한 말에 여인이 살풋 눈살을 찌푸리더니 강수의 시선을 느꼈는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으응. 엄청 미인이신데.”

“엄마는 피아니스트 소예린이에요. 히히, 나중에 우리 엄마 연주회에 구경 오세요.”

“아, 엄마가 피아니스트구나? 그래. 나중에 시간 나면 꼭 가보마.”

소예린이 강수에게 눈으로 인사를 하고 꼬마를 채근했다.

“채준아, 아저씨 스케치하시게 인사하고 이제 가야지.”

“알았어요. 아저씨, 바이바이.”

“어, 그래. 잘가.”

엄마를 따라가던 채준이 뒤돌아 물었다.

“참, 아저씨는 이름이 뭐예요?”

얼떨결에 두 모자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형평성에 맞게 이름을 알려주었다.

“난 이강수다.”

“강수 아저씨, 다음에 봐요.”

재준이 환하게 웃으며 팔을 흔들었다. 강수도 마주 팔을 흔들어주었다.

곧 두 모자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화가라···. 능력만 된다면 화가를 하고 싶다. 하지만 항상 내 말목을 붙잡고 있는 예술적인 감각이 문제란 말이야.’

시간을 확인한 강수가 스케치북을 가방에 넣었다. 신촌으로 출발할 시간이 된 것이다.

강수는 학창시절 예술성이라는 벽에 부딪쳐 좌절 끝에 결국 일러스트로 방향을 틀었다.

머리로 고민해 봐야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직접 부딪쳐야 해.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려면 작품을 그려야 한다. 유화를.’

이때,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이번엔 은근히 기다린 전수민의 문자였다. 원화가 문제 없이 통과됐기를 바라며 문자를 확인했다.

-이 작가님! 제가 걱정 말라고 했죠? 팀장님이 굉장히 만족해 하셨어요. 수정할 곳도 없구요. 맘 편히 즐거운 저녁시간 보내세요.

강수도 답장을 보냈다.

-아, 감사합니다. 전 대리님도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한시름 놓은 강수는 가벼운 걸음으로 지하철로 향했다.

*

한국의 내로라하는 주요 대학이 자리하고 있는 신촌은 언제나 젊음의 생기와 활력이 넘실대는 거리다. 거리가 어두워지면서 화려한 네온사인이 하나 둘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카라호프에 도착한 강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가 쪽의 칸막이 된 자리에서 종대가 팔을 들고 흔들었다.

“여기다.”

종대는 맞은편 자리에 앉는 강수에게 말을 건냈다.

“얼굴이 밝아 보인다? 무슨 좋은 일 생겼냐?”

“동화책 일러스트가 수정 하나 없이 컨펌 받았으니 좋은 일이겠지?”

“수정이 한 곳도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너 일러스트에 물 올랐나 보다. 어떻게 수정이 한 곳도 없어?”

이십 대 초반의 알바생이 다가와 탁자에 메뉴판을 내려놓았다.

“주문 하시겠습니까?”

강수가 메뉴판을 종대에게 밀었다.

“오늘은 내가 살 테니까 너 먹고 싶은 거 맘대로 시켜.”

“그래? 그럼 마늘치킨하고 생맥 두 잔이요.”

“예, 알겠습니다.”

강수의 밝은 표정을 보고 종대가 은근슬쩍 운을 뗐다.

“요즘은 어때? 지낼 만 하냐?”

“그래. 시간이 좀 지나니까 그럭저럭 괜찮아.”

“종희 씨한테는 연락 없어?”

“엄청난 능력자 만나서 날 떠났는데 왜 연락을 하겠냐?”

“그렇긴 한데··· 그럼 완전히 끝났구나.”

알바생이 팝콘과 생맥주 두 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갔다.

“그럼 조만간 지연이랑 지연이 친구와 자리 한번 갖자.”

“뭐? 지연 씨 친구랑? 설마 누굴 소개하려고?”

“왜? 실연의 아픔은 새로운 여자친구가 있어야 확실하게 극복할 수 있다고. 여자로 인한 아픔, 여자로 치유하는 거지.”

강수는 종대의 낙천적인 사고에 실소를 짓고 말았다.

“너는 그래도 될지 몰라도 난 아니다. 됐어. 당분간은 골치 아픈 연애는 사양이야.”

“꼭 연애가 아니더라도 그냥 친구처럼 맘 편히 만나면 되지 않냐?”

“관심 없다.”

“뭐, 네 의지가 그렇게 확고하다면 자리는 천천히 만들기로 하고.“

종대는 맥주를 시원스럽게 한 잔 들이켰다.

“캬--, 좋다. 역시 맥주는 목을 쏘는 맛에 마신다니까.”

생맥주 한 잔을 더 시킨 종대가 손가락으로 볼을 비볐다.

뭔가 생각할 때 하는 버릇이었다.

“음··· 너, 혹시 선암갤러리에서 기획한 한국청년화가 12인전에 참여해 볼래?”

“한국청년화가 12인전? 그런 전시회도 있냐?”

“임마, 있으니까 얘기하지. 사실 이 얘기 하려고 만나자고 한 거다. 전시회는 7월 초에 오픈 예정이다. 미대를 졸업한 지 5년 이하의 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전시회야. 작가 선정도 거의 끝나서 참가 의사가 있으면 빨리 연락을 해야 한다.”

“한국청년화가 타이틀이라면 상당히 유망한 작가들이 참가하는 것 아니냐?”

“그렇긴 한데··· 너 박해나 알지?”

“박해나? 당연한 걸 왜 묻냐? 작년에 기사 난 거 읽어본 적 있어. 꽤 큰 공모전에 2번 연속으로 대상을 받은 작가잖아. 게다가 개인전을 벌써 두 번이나 열고. 젊은 층에서는 제일 잘 나가는 여성화가 같던데.”

“맞아. 게다가 올 초에는 LA 숨나갤러리에서 개인전까지 열었으니까 젊은 작가의 선두주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 박해나가 12인 전에 참가한다.”

강수가 살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뭐야! 박해나가 참여한다고? 그런 전시회에 경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내가 어떻게 참여할 수 있냐?”

“물론 박해나처럼 대중에게 인지도 있는 청년 화가가 한 3명 정도 참여하지만 이번 전시회 성격은 한국미술을 이끌고 갈 가능성 있는 차세대 젊은 화가를 발굴, 육성한다는 의도거든. 그래서 대학 졸업 후 5년이 지나지 않은 초보청년화가들을 대상으로 12명을 초청하는 형식의 전시회다. 너도 졸업하고 단체전 전시회에 두 번 참가 했었잖냐?”

“그러긴 해지만 너도 알듯이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다.”

닭 날개를 발라먹으며 종대가 빙긋 웃었다.

“얌마, 너만 그러냐? 나도 그렇고, 대학 졸업한 대부분의 신출내기 화가들이 다 그렇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네 생각이 중요해. 참여할 의향이 있으면 말해. 장 선배에게 연결해 줄 테니까 말이지.”

김종대는 강수가 실연의 충격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도록 전시회 참가를 제안한 것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창작은 정신적인 에너지를 극단적으로 소모시킨다. 창작에 열정을 쏟아 부으며 전념하면 실연의 아픔이 빠르게 잊혀지고 희석될 수밖에 없다.

“전시회 출품이라···.”

다음주 화요일에 차기작 미팅이 있다.

변수가 없는 한 작업에 들어가면 미팅과 스케치 검토, 수정 등 적어도 한 달 이상은 일러스트에 투자해야 할 것이다.

‘아니지, 이번처럼 이미지화 해서 작업하면 그림 그리는데 투자하는 시간은 열흘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작품을 창작할 시간은 넉넉했다.

기획팀이나 편집팀과의 의견 조절과 작품 수정은 이메일로 진행하면서 미팅은 최소로 잡으면 된다.

‘문제는 그때처럼 빠르게 끝낼 수 있느냐는 것인데···.’

숲 속 다람쥐 가족 그릴 때를 떠올렸다.

비록 스케치 작업이 끝나 있긴 했지만 다시 그린 배경과 채색, 캐릭터의 형상화 작업을 무척 손쉽게 처리했다.

‘대체 그건 뭐였지?’

물론 지어져 있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라 순수 창작물과는 비교하기 어렵지만 일러스트도 분명히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어쨌든 숲 속 다람쥐 가족을 새로운 기법으로 그리면서 창작의욕이 고취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마감에 쫓겨 탈출구를 찾지 못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피어난 영감에 의해 생겨난 일회성일지도 몰랐다.

그것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아!’

불현듯 투팍탈이 떠올랐다.

백운대를 등산한 그날. 차원 공간에 휩쓸려 비탈을 뒹굴다 머리를 다쳤다. 그리고 마법사 투팍탈이 치료를 해주었다.

‘그 치료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언젠가 두뇌의 신비를 다룬 다큐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그림과는 관련이 없는 직업에 종사하던 50대의 백인이 뇌질환이 발생해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된다. 그리고 그의 뇌의 일부가 뇌사하기 시작한다.

그런 와중에 이 환자에게 놀라운 재능이 발현된다.

바로 그림에 대한 재능이다.

과거에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는 그가 화가 못지 않은 실력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뇌 일부분이 죽어가자 별안간 회화를 관장했던 그의 뇌 영역이 각성한 것이다. 원인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저 뇌의 신비한 기능과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설마 내게도?’

자신의 뇌도 투팍탈의 치료를 받고 나서 그런 비슷한 현상이 발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명확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이번에 전시회에 참여해서 작품을 창작해 보면 일회성인지 아니면 창의성이 예전보다 훨씬 나아진 것인지 분명해질 것이었다.

‘참여할 기회를 준다면 참여해 보자.’

강수는 전시회에 참가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종대는 생각에 잠긴 강수를 방해하지 않고 기다렸다.

비록 실연의 충격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게 할 생각으로 제안했지만 일러스트에 매진해 온 강수였기 때문에 순수예술인 전시회 참가를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종대는 치킨에 생맥주를 마시며 뭔가 깊이 고민하는 강수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숙인 고개를 세운 강수가 종대에게 말했다.

“그래. 나한테 전시회에 참가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지만 선배를 만나서 한번 부탁 해봐야겠다.”

종대가 강수의 결정을 반기며 크게 웃었다.

“하하. 자식. 잘 생각했다. 내일 내가 먼저 장 선배에게 연락하고 전화번호를 알려 줄 테니까 장 선배랑 면담 약속을 잡아봐라.”

“알았어. 고맙다.”

“임마, 친구로서 당연한 거지. 뭐가 고마워.”

강수는 자신을 챙겨주는 종대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종대는 애인과 동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래 붙잡고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또한 어제는 밤을 새서 작업한 까닭에 피곤하기도 했다.

“종대야, 밤을 샜더니 좀 피곤하다. 오늘은 그만 일어 나자.”

“기운이 없어 보이더니만 밤을 샜구나. 존나 피곤하겠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편히 쉬어라.”

둘은 일찌감치 막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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