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4회
경직된 강수의 얼굴을 본 선예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깔깔. 농담이에요. 간단한 거 사주면 되요.”
강수가 놀리려고 일부러 정색했던 표정을 풀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농담? 후후. 농담 같지 않은데? 하지만 쓰러질 뻔한 날 구해줬으니 바닷가재가 비싸긴 해도 그 정도는 사줄 수 있다.”
“어, 그럼 바닷가재 사는 거에요?”
“그 정도야 뭐.”
선예가 폴짝폴짝 뛰면서 좋아했다.
“와, 신난다. 언제요?”
“나는 프리랜서니까 선예 시간에 맞추면 될 것 같은데?”
“좋아요. 폰 주세요. 강의시간표 보고 전화로 알려줄게요.”
“음, 잠깐만.”
강수는 스마트폰을 둔 작업실로 걸어가며 머리를 긁적였다.
‘음, 역시 대학생이었나?’
어느 대학을 다니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물어볼 정도는 아니었다.
작업실에서 스마트폰을 찾은 강수는 전원을 켰다. 작업에 집중하기 위해서 스마트폰 전원을 꺼 놓았었다.
스마트폰을 건네 받은 선예는 자신의 번호를 찍었고 진동이 울리자 강수에게 돌려주었다.
“제 번호예요. 저장해 두세요.”
제 정신으로 돌아온 강수는 선예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집에서 여대생과 같이 밥을 먹고 전화번호까지 받다니! 약간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강수는 스마트폰을 받아 선예라는 이름으로 연락처에 저장했다. 연락처에 여자 이름이 등록되기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물론 위층에 사는 이웃사촌이자 여동생 뻘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실없이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선예를 힐끗 보니 그녀 역시 스마트폰을 꺼내 조작하고 있었다. 조작을 끝낸 선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일 잘 보고 오세요.”
“으응, 그래.”
강수가 먼저 나가 현관문을 열어주었고 선예는 콧소리를 흥얼거리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브이넥 티에 타이트한 청바지를 입고 있는데 티의 밑단은 청바지 안에 넣어 굴곡진 볼륨이 그대로 드러났다. 잘록한 허리에 팽팽한 힙, 군더더기 없는 늘씬한 다리가 눈에 꽉 차게 들어왔다.
저절로 마른침이 목울대를 넘어갔다.
선예가 계단참에서 방향을 틀려는 모습에 흠칫 놀란 강수가 잽싸게 현관문을 닫았다.
문득 강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에 지친 몸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심볼이 꿈틀대며 반응한 것이다.
강수는 고개를 내저으며 군시렁거렸다.
“참나, 왜 옷을 저렇게 입었지? 나도 모르게 눈이 갔네. 몸매 자랑한 건가?”
처음엔 아무 생각 없었는데 쇄골이 드러나는 티에 한손에 쥐어지지 않을 것 같은 불쑥 융기한 가슴 라인이 눈에 들어온 후 자꾸 가슴에 시선이 갔었다.
나중에는 선예가 기분 나빠 할 것 같아 의도적으로 시선을 얼굴에만 두었다. 한데 현관문을 열어주고 선예의 굴곡이 완연한 몸매를 봤을 때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따져보니 금욕한 지 어느덧 반년은 되었다.
종희가 악당검사에 캐스팅되면서 잠자리를 갖지 못한 까닭이다.
종희와의 농밀하고 선정적이고 격정적인 잠자리가 떠올랐다. 비록 한 달에 한번 꼴에 불과했지만 차곡차곡 쌓인 욕정을 격렬하고 폭발적으로 남김없이 분출했기 때문에 그것으로 충분했었다.
아니 솔직히 한 달에 한번은 충분하지 않았다. 다만 극도의 충족감을 느낀 탓에 다음의 만남까지 어렵지 않게 기다릴 수 있었다.
혈기 넘치는 20대에 6개월의 금욕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보통의 남자들은 수음으로 쌓이는 정욕을 해소하지만 강수는 수음도 하지 않았다. 수음을 하고 나면 스스로가 비참해지고 자괴심이 들었다. 또한 뭔가 굴욕적이어서 찝찝하고 기분이 나빴다.
수음이 불쾌해진 강수는 아예 다른 것에 집중해서 정욕을 잊었다.
하지만 밤중이나 새벽에 심볼이 성을 내면 참으로 곤란했다. 해소할 수 없는 성욕과 달궈진 쇠막대기같이 딱딱하고 뜨거운 심볼은 아플 정도로 욱신거려서 기분 나쁠 뿐만 아니라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이럴 때는 하는 수 없이 일어나 심볼이 가라앉을 때까지 철학 책을 읽거나 지루한 소설을 읽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 들어오는 일은 사양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일에 치이다 보면 피곤에 절어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다시는 종희의 육체를 안을 수 없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찌르르 하니 아려왔다.
‘이젠 끝났으니까. 시간이 흐르면 기억도 추억도 흐려지겠지.’
강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
완성된 그림을 챙겨 중구에 사무실을 둔 무지개 출판사에 도착한 시각은 4시 30분경이었다.
강수는 기획편집팀의 전수민 대리를 찾아 갔다. 기획편집팀은 팀장 휘하 전 대리, 편집사원 2명으로 구성된 단출한 팀이다.
요즘은 1인출판사도 성행하고 있다. 소규모의 출판사의 경우 편집팀을 따로 둘 필요가 없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 작가님.”
강수의 담당 매니저 전수민 대리가 반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강수를 맞이했다.
전수민 대리는 160센티 정도의 키에 적당히 살이 쪄서 몸은 통통했지만 인상이 부드러워 보이는 20대 후반의 예쁘장한 여성이었다.
“정말로 칼같이 마감에 맞춰 오셨네요.”
“전 대리님이 신경 써 준 덕분에요.”
“어머, 그럴 리가요. 회의실로 가시죠.”
강수를 회의실로 안내한 전수민은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잠시 앉아 계세요. 차를 가져올게요. 커피죠?”
“예. 커피 부탁합니다.”
강수는 의자에 앉아 그림책 원화가 든 봉투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려 온 탓에 약간 긴장되었다.
전 대리가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고는 있지만 어쨌든 담당 매니저로서 공적인 일만큼은 엄격했다.
잠시 후 전수민이 쟁반을 들고 와 커피잔을 강수 앞에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았다.
전수민이 녹차를 마시며 강수의 얼굴에 시선을 주더니 입을 열었다.
“이 작가님!”
“예?”
“많이 수척해 보여요. 혹시 며칠 밤 샌 거 아닌가요?”
강수가 멋쩍게 웃었다.
“하하. 밤 샌 게 티가 나나요?”
전수민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예. 아주 많이요. 무리하지 말고 조금 연기해 달라고 하지 그랬어요?”
“예. 앞으로는 전 대리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말만 그렇게 하지 말고 다음에는 꼭 연락 주세요.”
전수민이 강수가 꺼내 놓은 봉투를 가리켰다.
“그림책 원화군요?”
“예.”
강수가 봉투를 전수민 앞으로 밀었다.
잔을 옆으로 치운 전수민이 봉투를 열어 원화를 꺼냈다.
원화를 살펴보는 전수민의 두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당황한 표정의 전수민이 말을 더듬었다.
“이, 이건···.”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강수가 재빨리 설명했다.
“새로운 기법으로 그려봤습니다. 사전에 검토 없이 독단적으로 그린 점은 사죄 드립니다. 일단 검토해 보시겠어요?”
“대체 왜?”
의문의 눈빛으로 강수를 쳐다본 전수민이 작품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단은 살펴보기로 한 것이다.
원화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전수민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고, 급기야 입을 벌리고 탄성을 질렀다.
“와, 좋아요. 너무너무 맘에 들어요. 색체가 환상적이면서도 조화롭고 캐릭터는 생동감이 넘쳐요.”
전수민이 원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감탄을 멈추지 않았다.
“우와, 이런 기법 정말 좋네요. 인쇄하면 원화의 색감이 반감될 텐데 그게 참 안타까울 거 같아요.”
감탄사를 연발하는 전수민을 보며 강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팀장의 최종 승인이 떨어져야 한다.
“강 팀장님도 맘에 들어 하실까요?”
“예? 강 팀장님이요?”
전수민이 쾌활하게 웃었다.
“호호. 강 팀장님은 저보다 보는 눈이 뛰어나세요. 지금 팀장님이 외출 중이어서 확답은 할 수 없지만 틀림없이 컨펌될 테니까 마음 놓으세요. 원화는 스캔이 끝나는 대로 우편으로 보내드릴게요. 아, 잔금은 팀장님 컨펌하면 결재를 맡아 다음달 말까지 지급될 수 있도록 해 드릴게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돌아가서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좋은 소식 전해 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전수민의 배웅을 받으며 강수는 출판사를 나섰다.
전 대리가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강 팀장의 사인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다.
천천히 걸어서 충무로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거리는 봄기운이 가득했다.
길을 왕래하는 사람들은 봄을 맞아 화사하고 가벼운 옷을 입고 있었다.
‘어느새 겨울이 가고··· 봄이 왔구나.’
지난 겨울은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 않고,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버리고 싶은 참혹한 계절이었다.
‘젠장, 기억하고 싶지 않다.’
종희와 함께 지내고 싶은 희망을 안고 이사한 아파트에서 겨울 내내 일러스트만 죽어라 그렸다. 강수는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흔들며 애써 지난 겨울의 쓸쓸했던 날들을 떨쳐냈다.
지하철 승강장에서 전동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전 대리인가?’
강수는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천천히 스마트폰을 꺼내 살폈지만 전화는 전 대리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친구 종대였다. 한숨을 내쉬며 통화를 연결했다.
[강수야, 뭐 하냐?]
“응, 원고 넘겨주려 출판사 좀 들렀는데. 왜?”
[왜는 무슨. 그냥 시간 되면 얼굴이나 봤으면 해서 그런다.]
“시간? 오늘 원고 넘겨서 시간이야 널널하긴 한데···.”
[그런데? 무슨 문제 생겼냐?]
“아니, 팀장이 자릴 비워서 아직 컨펌이 떨어지지 않았거든.”
[야, 임마. 니 실력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뭘 걱정해? 당연히 컨펌 되겠지. 너 혹시 술 고프지 않냐? 맥주이나 한 잔 하자. 마침 지연씨도 회사일로 좀 늦는다고 했다.]
괜히 지난 겨울이 떠올라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술 한잔 하면 후줄근한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았다.
“그럴까. 신촌으로 가야겠지?”
[두말하면 잔소리. 카라호프에서 7시에 보자.]
“그래···.”
강수는 속으로 혀를 찼며 전화를 끊었다.
‘이 자식은 내가 술 한잔 하고 싶다는 걸 어떻게 알고. 하여간 귀신이라니까.’
종희에게 이별통보를 받은 다음날 종대를 불러내 술을 마시며 신세한탄을 했었다.
김종대는 대학 친구 가운데 가장 친한 친구였다.
강수는 4호선 승강장에서 3호선 쪽으로 이동했다.
잠시 후 도착한 전동차에 올라탔다.
‘지금 가면 1시간 20분정도 일찍 도착할 것 같은데···. 뭘 하며 시간을 때운다?’
1시간 남짓이면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방문하기엔 너무 촉박했다.
곧 을지로 3가역 도착 안내방송이 나왔다.
‘가만, 을지로 3가에서 청계천이 지척이지. 잘 됐다. 오랜만에 청계천에서 스케치 좀 하다 가야겠다.’
강수는 을지로 3가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가 청계천 쪽으로 걸어갔다.
청게천에는 각양각색의 서울 시민들이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강수는 수표교까지 올라가서 다리의 중간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표교 인근은 높고, 웅장한 빌딩보다 오래되고, 낮은 건물의 상가가 많았다.
청계천과 조경수 외에 주변 경치는 밋밋한 편이었다.
그렇다고 스케치를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웅장하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평범한 풍경을 보더라도 예술가의 감성과 눈은 그곳에서 예술적인 영감을 받을 수가 있다.
부두가에 떠오른 일출을 순간적인 인상만으로 표현해 '인상, 해돋이'를 그린 클로드 모네처럼.
그것이 일반인과 예술가의 차이일 것이다.
강수는 가방에서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내 난간에 기대 주변 풍경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