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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는 마법사-13화 (13/197)

# 13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3회

샤워를 하고 정신을 가다듬은 강수는 채색 해야 할 원화를 펼쳤다.

원화는 그림책의 절반 정도인 7장을 끝내 놓은 상태였다. 하루에 한 장씩 원화를 채색하는 스케줄을 잡았으나 일주일 넘게 까먹었다. 남은 3일 동안 8장을 채색해야만 했다.

‘8장을 3일 만에 어떻게 끝내지? 이건 불가능한데···.’

숲 속의 다람쥐 가족은 정밀묘사로 그렸다.

아무리 빨리 손을 놀려도 하루에 한 장 밖에 못 그린다. 이별통보의 충격으로 9일을 날려버리는 바람에 지금 같은 사단이 벌어진 것이다.

‘내일 전화해서 연기해 달라는 수밖에 없나···.’

아쉬운 소리하기는 정말 싫었지만 3일 동안 1시간도 안 자고 날밤을 새지 않는 이상 정밀묘사 작법으로 나머지 8장을 그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강수는 7장의 완성된 그림을 보며 한탄했다.

‘단순하게 이미지를 표현하는 기법으로 그렸으면 수월하게 그릴 수 있었을 텐데···.’

캐릭터와 배경 숲을 전체적으로 너무 디테일하게 묘사를 해 놓았다. 마감에 쫓긴다고 중간부터 화풍을 바꿔서 그릴 수는 없었다. 한숨을 푹푹 내쉬는데 문득 아이디어 하나가 머리를 꿰뚫었다.

‘가만!’

강수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무릎을 쳤다.

“맞아, 전부 새로 그릴 수도 있잖아!”

7장은 이미 완성되어 있으므로 이미지 수법으로 다시 그리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단지 캐릭터가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듯 이미지화하는 작업을 제대로 해 낼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본래 강수는 기억하려고 마음먹으면 사물을 사진으로 찍은 것처럼 기억할 수 있었다. 때문에 정밀묘사는 누구보다 잘했다.

하지만 사물을 이미지화해서 재구성 하는 작업은 이상할 정도로 소질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강수는 실재와 똑같을 정도로 섬세하고 디테일한 작품을 주로 그렸다.

분명 놀라운 재능은 분명했지만 반면 한계도 뚜렷했다.

예술작품은 사물과 자연의 모방에서 시작하지만 작가의 개성과 창의성이 작품에 녹아 반영되지 않으면 단순히 잘 그린 그림에 불과하다.

사물을 작가의 예술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변형하고 이미지화해서 표현하는 수법은 강수가 항상 고전하는 분야였다. 대학을 졸업하며 스스로 자각 했지만 자신은 예술적 재능이 거의 없다는데 결론을 내렸다.

동기들의 창의적인 작품을 보고 수많은 좌절을 겪었기에 작품 활동은 거의 포기하고 일러스트 작업에 더 열성적으로 매달리기도 했다.

어쨌든 달리 방법이 없었으므로 어떻게든 해보자는 심정으로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우선 숲 속 다람쥐 가족에 등장하는 동물 캐릭터를 그려보기로 했다.

엄마 다람쥐, 아빠 다람쥐, 주인공 파란눈동자 다람쥐, 주인공의 여동생 긴 눈썹 다람쥐, 그리고 동물 친구들.

고슴도치, 너구리, 여우, 까마귀, 새끼노루, 아기사슴, 뻐꾸기 등등.

스케치를 하지 않고 주인공 파란눈동자 다람쥐를 이미지화해서 그렸다.

도화지 위에서 붓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섬세하고 정밀한 털의 표현 대신 단순한 선이 그려졌다.

쫑긋 세운 귀와 눈, 코, 입을 그리고 앙증스런 손, 커다란 넓적다리, 탐스러운 꼬리까지 물감이 다람쥐 형태를 갖추는 데는 1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뒤이어 동그랗게 뜬 파란눈동자와 손에 쥐고 있는 도토리까지 묘사하는데 3분 정도 걸렸다.

도화지에 파란눈동자 다람쥐 캐릭터가 한 마리씩 빠른 속도로 채워졌다.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10마리의 다람쥐를 그리고 나서 뒤로 물러나 살펴보았다.

파란눈동자 다람쥐의 캐릭터가 생각보다 귀엽게 형상화되었다. 강수는 자신이 그려놓은 파란눈동자 다람쥐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괜찮은데? 속도도 빠르고.’

강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예전 같았으면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해야만 했고 결과물도 신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수는 이미지화 작업을 선호하지 않았다.

한데 지금은 이미지화 작업이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이상했지만 그것을 깊게 생각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강수는 다른 캐릭터들도 작업하기 시작했다.

나머지 10개의 동물 캐릭터를 완성하는 데는 30분이 조금 넘게 걸렸다. 비록 동물 캐릭터였지만 놀라고, 슬프고, 웃고, 장난스러운 표정 등 감정이 풍부하게 살아 있었고 생동감이 넘쳤다.

동물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야, 됐어. 가능하겠어.”

강수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림동화책은 컨셉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여백의 미가 필요하다. 강수가 A3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 넣는 영역은 2/3 정도였다. 나머지는 이야기가 들어가는 부분으로 여백의 공간으로 처리할 수 있다.

강수는 첫 번째 그림을 어떻게 형상화할지 자신이 그려 놓은 완성작을 살피며 재구성해 보았다.

이미 그려 놓은 작품을 재구성하는 이미지 작업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배경 숲과 캐릭터에 무슨 색을 어떻게 입힐지 금방 형상화 되었다. 재구성한 숲과 캐릭터가 입체적인 모습으로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입가에 미소를 지은 강수는 붓을 쥐고 오른손을 빠르게 놀리기 시작했다.

동이 트고 시침이 6시를 가리킬 때 강수는 1장을 완성했다.

밤을 꼴딱 샌 것이다.

아무리 젊고 건강해도 밤샘 작업을 하면 지키기 마련이다. 강수는 붓을 내려놓고 기지개를 켜고 상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우두두둑!

장시간 움직임도 없이 집중해서 그림을 그린 탓에 뼈마디가 맞춰지는 소리가 났다.

“으아, 중노동이 따로 없구나.”

그래도 1장을 완성했다는 사실이 기뻤다. 4, 5시간에 1장, 이런 속도라면 마감에 맞춰 15장을 끝낼 수 있었다.

강수는 흐뭇한 얼굴로 완성된 그림을 바라보았다.

평화로운 숲과 그 안에 작은 공터가 있다. 나무가 무성한 숲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숲 속에 빨려 들어가 그곳의 동물들과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미지화 된 나무 하나하나가 바람결에 나뭇잎이 춤을 추며 흥겨워하는 것 같았다.

숲을 가만히 보면 다람쥐 가족의 작은 집이 숲 한 편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뿐이 아니었다. 숲을 보고 있으면 관목 속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는 아기사슴, 나무와 나무 사이 틈으로 간신히 보이는 고슴도치, 무성한 나뭇잎 사이에는 뻐꾸기가 가지에 앉아 있는 등 많은 동물들이 숲과 하나가 된 듯이 동화되어 있었다.

‘뭐야? 아무리 내가 그린 그림이지만 그림에 넋을 놓다니? 내가 그린 거 맞아?’

강수는 자신이 그린 그림에 몰입하는 유쾌한 경험을 하고는 실소를 지었다.

처음 경험한 이상한 일이긴 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강수는 첫 번째 완성한 그림이 마음에 들어 시간이 나는 대로 아예 작품으로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초대라는 제목으로 이런 느낌이 들 수 있도록 캔버스에 그려봐야겠다. 꽤나 그럴듯한 작품이 탄생할 것 같은데.’

새롭게 시도한 화풍이 자신은 만족스러웠지만 전 대리와 기획편집팀장의 평가가 더 중요했다.

‘음, 내가 그렸지만 정말 괜찮은 그림 같은데 전 대리가 기존 화풍이 좋다고 하면 어쩌지?’

전 대리와 팀장은 기존에 그린 7장의 채색을 검토했고 지적 없이 ok사인을 했다. 그래서 나머지 채색은 중간 검토하지 않고 한꺼번에 검토하기로 했다. 한데 갑자기 180도 바뀐 그림을 가져가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약간의 불안이 고개를 들었다.

‘내친 걸음이니 이젠 어쩔 수 없다. 기존 화풍으로 그려달라고 하면 마감을 연장해 달라고 해야지.’

현재로서는 이미 버스는 떠났고, 기호지세였다. 계획대로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배 고픈데? 뭘 좀 먹고 다시 그려야겠다.’

부엌으로 나간 강수는 냉장고를 뒤져 요기할 만한 음식을 찾았다.

‘식빵은 싫고 라면이라도 끓여 먹자.’

강수는 대파, 양파, 당근 등 야채를 썰어 넣고 계란을 풀어 라면을 끓였다. 완성된 라면 위에는 치즈를 얹어서 녹여 먹었다. 허기를 채우고 나니 졸음이 쏟아졌다.

‘아우, 졸리네. 조금만 자자.’

강수는 알람을 4시간 뒤로 맞춰놓고 침대에 그대로 쓰러졌다.

*

강수가 15장의 일러스트 작업을 끝낸 시각은 마감 날 당일 오후 12시 30분 무렵이었다. 하루에 4시간쯤 눈을 붙이고 일어난 뒤 거의 20시간을 작업에 매진한 끝에 15장의 그림책 원화를 완성한 것이다.

마지막 붓 터치를 끝낸 강수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사방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그림을 훑었다.

“후와, 이건 인간 승리로구나.”

탄성과 함께 자화자찬을 했으나 목소리는 기친 기색이 역력하게 묻어났다.

꼬로록! 꼬로로로록!

배 속에서 음식을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긴장도 풀리고 시간 내에 작업을 완성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맥이 쭉 빠지며 극심한 허기가 몰려왔다.

딩동, 딩동!

이때 초인종이 울렸다.

“어? 누구지?”

의자에서 일어난 강수는 불현듯 현기증이 일어나 비틀거리다 의자에 주저앉았다.

현기증이 좀 가신 후 일어나 현관문에 다가갔다.

“누구죠?”

“강수오빠, 저 선예에요.”

‘얘가 웬일로?’

자신을 찾아올 일이 없는 선예가 왜 왔는지 의아해하며 문을 열어주었다.

강수의 몰골은 그 사이에 엄청나게 핼쓱해져 있었다.

쟁반을 들고 서 있던 선예가 강수의 꾀죄죄한 모습과 푸석한 얼굴에 깜짝 놀라서 외쳤다.

“어머, 며칠 지났다고 완전 폐인이 되었네요? 대체 일을 얼마나 했기에 그래요?”

강수는 더부룩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코를 벌렁거렸다. 굉장히 맛있는 냄새가 솔솔 콧속으로 스며든 것이다.

“내가 그렇게 초췌해 보여? 마감이 있어서 밤을 샜거든. 근데 들고 있는 건 뭐냐?”

선예는 냄비와 밥그릇이 든 쟁반을 들고 있었다.

“오빠가 밥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는 거 같아서 음식을 좀 만들어 왔어요. 점심은 먹었어요?”

그렇지 않아도 입안에 군침이 돌고 있던 강수는 음식이라는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으, 음식이라고. 설마 나 주려고 가져 온 거야?”

선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아직 점심을 안 먹어서 오빠가 점심을 안 먹었으면 같이 먹으려고요. 이미 먹었으면 할 수 없이 혼자 먹어야죠.”

선예가 왜 음식을 가져 왔는지 동기에 대한 의문이 끼여들 여지도 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안 먹었어. 내가 배고픈 걸 어떻게 알고 밥을 가져왔냐? 하여튼 고맙다. 어서 들어와라.”

선예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구수한 된장찌개와 소불고기 야채볶음, 김치와 밥을 식탁에 차렸다.

강수는 앞의 선예가 굴곡이 완연한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는 브이넥 티와 타이트한 청바지를 입고 앉아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밥을 퍼먹었다.

공기의 절반쯤 먹던 선예는 남은 밥을 강수에게 양보했고, 그마저도 모자라 아예 밥솥을 통째로 가져왔다. 강수가 먹는 꼴을 지켜보던 선예는 세 그릇을 비우고 더 먹으려는 강수에게 재제를 가했다.

“오빠, 밥솥 이리 줘요.”

“어? 왜?”

“이미 충분히 먹었잖아요. 한번에 그렇게 많이 먹으면 배탈 나요.”

선예 말대로 배는 충분히 채웠다.

밖에 나가 있던 정신이 제자리를 찾아 들어왔다. 사태를 파악한 강수는 멋쩍게 웃으며 안고 있던 밥솥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하하, 이것 참, 덕분에 살았다. 정말 배고파서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거든.”

“호호, 그래요? 오빠는 무슨 일을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무식하게 해요.”

“그게 마감에 쫓기다 보면··· 다 그래.”

드디어 강수의 눈에 쇄골과 보일 듯 말듯한 가슴 골과 풍만한 가슴이 비쳐졌다. 순간적으로 할말을 잃고 선예의 가슴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에, 그, 그러니까 출판이란 게 일정이 짜여 있어서 마감에 쫓기면 날밤 새는 거야 기본이지.”

강수는 황급히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대답했다.

자신의 가슴을 보고 허둥대는 강수가 웃긴지 선예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은근히 가슴을 앞으로 더 내밀었다.

“그럼 마감에 쫓기지 않게 미리미리 그려놔야 하는 거 아녜요?”

“그렇긴 한데 사정이 있어서 며칠 까먹었거든. 그렇지 않았으면 이렇게 무리할 작업이 아니었는데··· 하여튼 선예 덕분에 약속시간에 늦지 않고 여유 있게 출판사에 갈 수 있겠다.”

“아, 출판사에 가야 하는 거예요?”

“물론. 그림을 갖다 줘야 하니까.”

선예와 마주하고 있기가 불편한 강수는 외출준비 해야 한다는 뉘앙스를 담아서 대답했다.

눈치가 빠른 선예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헤헤. 그럼 오빠는 외출 준비를 해야겠구나. 전 이만 가 볼게요.”

“응, 고맙다. 점심은 맛있게 잘 먹었어. 참, 오늘 얻어먹었으니 다음에는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그릇을 정리하던 선예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정말이요? 나 바닷가재 좋아하는데.”

“바다, 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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