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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는 마법사-12화 (12/197)

# 12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2회

이때, 투팍탈이 눈을 떴다.

푸르스름한 안광이 어둠 속에서 번쩍였다. 마나회로를 가동해 마나를 약간 보충한 것이다.

“괜찮습니까?”

강수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네 눈에 괜찮아 보이느냐?”

투팍탈의 맥없는 목소리와 모닥불에 비춰진 회색을 띤 얼굴은 무척 초췌해 보였다.

강수가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었다.

“굉장히 피곤해 보입니다.”

투팍탈이 상관없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치유마법을 썼다. 그래봐야 얼마 버티지 못하고 소멸할 것이다. 소멸하기 전에 전이마법으로 마법수식을 네 머리에 가능하면 많이 넣어주마”

“...?!”

강수는 투팍탈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소멸이라니? 죽음이 임박했다는 말인가?’

죽음을 눈앞에 둔 투팍탈은 강수가 이해를 하든 말든 전이마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시간이 촉박하니 마법수식을 네 머리에 전이마법으로 주입하겠다. 이곳에서 네 운명의 날개를 마음껏 펼치고 날아 보거라.”

죽음을 무릅쓰고 마법수식을 전이시켜 준다는 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가, 감사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투팍탈은 언령마법을 유지한 상태로 캐스팅을 외우며 전이마법을 시전했다.

투팍탈의 머리에서 형광 빛의 옅은 홍색의 빛이 나오더니 강수의 머리를 감싸기 시작했다.

‘으윽!’

따뜻한 기운이 머리 속으로 스며들자 살짝 놀란 강수가 속으로 가볍게 신음을 토했다. 이번에는 마나시드 시술을 받을 때처럼 고통이 따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처음 보는 문자가 뇌리에 선명하게 나타났다. 그것은 마법수식이었고, 하나씩 차례차례 마법수식이 뇌리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스스스···

어느 순간 투팍탈의 손끝과 발끝이 먼지처럼 분해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나가 급속도로 소진되면서 투팍탈의 신체가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다.

서서히 손가락이 사라지고 발가락이 사라지고 손과 발도 허공으로 한 줌 먼지가 되어 흩어져갔다.

‘이계에서 한줌 먼지가 되어 죽는구나. 후후, 그래도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8서클 마법사까지 되었으니 이만하면 잘 살았다고 할 수 있겠지.’

투팍탈은 최후의 순간까지 강수에게 전이마법을 시전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자신의 지식을 전부 이계인의 뇌리에 전이시키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아쉬웠지만 자신과 이계인 이강수에게 주어진 인연은 여기까지였다.

‘고위마법사가 되기엔 어차피 마나가 부족한 행성이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충분하겠지. 재미있게 살아 보아라, 이계인이여.’

투팍탈의 머리에서 붉은 빛이 사라지며 그의 사고도 멈추었다.

투팍탈의 장대한 육신이 허공으로 한 줌 먼지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풀석.

투팍탈의 육신이 사라지고 로브만 외롭게 바닥에 남았다.

전이마법에서 풀려난 강수는 그 자리에서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뇌리에서 투팍탈의 목소리와 이상한 수식이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캐스팅, 이것이 룬 문자이고 마법수식인가?’

한참 동안 머리에 저절로 각인되어 있는 마법수식을 떠올리다가 정신을 차린 강수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투, 투팍탈은?”

주위는 불길이 수그러든 모닥불이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어둠을 태우고 있었다.

타탁! 타탁!

나무 타는 소리가 정적을 깰 뿐 주위는 고요했다.

“아!”

추위에 몸을 움츠리다 상의를 벗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탄성을 질렀다.

옷을 주워 입고,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투팍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 저건.’

강수는 땅바닥에 놓여있는 검은 옷을 발견하고 집어 들었다.

투팍탈이 입고 있던 황금실로 수를 놓은 로브였다.

‘거구의 육신은 어디 가고?’

강수는 착잡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설마 먼지로 화해 소멸했단 말인가?’

차원이동마법진의 결함으로 곧 죽을 목숨이라고 했지만 어쨌든 자신을 치료해 주고 심지어 죽기 직전까지 마법지식을 전수해주었다.

방금 전까지 눈앞에 존재했던 투팍탈의 비현실적인 소멸이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죽을 처지였다고는 하지만···.’

투팍탈에게 자신은 이계인에 불과했다.

자신에게 베푼 호의를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너무 고마웠고, 한편으로는 먼지로 소멸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렸다.

‘아아, 어쩔 수 없지. 일단 집으로 가자.’

툭!

투팍탈의 유품이라고 할 수 있는 로브를 잘 접어 옆구리에 끼고 걸음을 옮기려던 강수는 뭔가 발에 밟히는 소리가 나자 발 밑을 살펴보았다.

상의를 벗어 놓았던 곳에 빠져 있던 자신의 스마트폰이 떨어져 있었다.

“이런!”

강수는 스마트폰을 주어 들고 화면을 켜보았다. 흠집은 좀 났을지 몰라도 전원이 들어왔다.

“아, 다행이다.”

우우웅! 우우웅!

“엇!”

느닷없이 울리는 진동에 놀란 강수는 스마트폰을 떨어뜨릴 뻔 했다.

“아, 놀래라.”

발신을 확인한 강수는 가슴이 뜨끔했다.

‘윽, 수민씨네.’

전수민은 무지개출판사 기획팀 담당매니저였다. 자신이 그리고 있는 어린이그림책 숲 속의 다람쥐 가족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당연히 작업이 순조롭게 되고 있는지 확인 전화를 한 것이다.

전화를 받을까 말까 고민하던 강수는 끈질기게 울리는 진동 소리에 결국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강수 작가님?]

뭔가에 쫓기는 듯한 다급하고 긴장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일주일 정도 연락을 받지 않았으니 애가 많이 탔을 것이다.

강수는 미안한 감정을 실어 대답했다.

“예. 이강수입니다. 전 대리님, 잘 지냈죠?”

[아, 드디어 통화가 되었군요. 작가님,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대체 왜 연락이 두절된 거죠?]

“미안합니다. 개인적으로 정리해야 할 일이 생겨서 전화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제 다 정리되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전수민은 무슨 일이었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질문은 마음 속에 담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일 때문에 가끔 강수와 미팅을 가졌던 그녀는 잘생긴 외모에 예의 바르고, 마감을 어긴 적이 한번도 없는 성실한 강수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이강수 작가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어 번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표현했다.

하지만 이강수는 일 관계 외에 사적인 대화는 언급하지 않았다. 강수의 반응을 보고 애인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마음을 접었다.

심중으로는 애인하고 뭔가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하고 염두를 굴렸지만 개인적인 일이라는데 무슨 일이었냐고 캐물을 수는 없었다.

[전화는 받지 않고, 메일도 연락이 없어서 작업은 잘 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전화했어요.]

“아, 그림이요···.”

강수는 사실대로 얘기하고 마감을 며칠 연기해 달라고 해야 할지 말지 순간적으로 고민했다. 강수는 마감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마감을 연기해 달라는 말이 입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우물쭈물 대답했다.

“그··· 저, 그림은 걱정 마세요. 마감은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수민은 강수의 대답에 미심쩍은 마음이 들었으나 마감을 지키겠다고 하는데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예. 그럼 원고는 퀵으로 보낼 건가요?]

“아니요. 이번에는 제가 사무실로 찾아가겠습니다.”

[알겠어요. 늦게 전화해서 죄송했어요.]

“아닙니다. 제가 먼저 연락을 했어야 했는데 죄송한 건 오히려 저죠.”

[이해해 주셔서 고마워요. 들어가세요.]

“예.”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챙긴 강수는 마감을 지킬 수 있을지 마음이 무거워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일단 집에 가서 생각해보자.”

비탈을 올라가 등산로를 찾은 후 조심조심 하산하기 시작했다.

*

집으로 돌아오니 어느덧 밤 12시가 넘었다.

로브를 작은방 책장에 두고 주방으로 간 강수는 커피를 한 잔 타서 식탁에 앉았다. 돌아오는 도중에도 거인 같은 체구의 노인, 투팍탈과의 만남을 계속 생각했다.

‘자랄 행성이라니!’

UFO를 타고 성간 여행을 해서 지구에 온 것이 아니라 차원이동마법진으로 공간을 이동해서 왔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와의 만남이 꿈도 아니었다. 직접 얼굴을 대면하고 끔직한 고통을 당하며 마나시드를 시술 받지 않았던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강수는 투팍탈이 전해준 얘기를 곰곰이 되새김했다.

이계, 즉 지구는 마나가 희박해 심장에 마나하트를 생성하는데 시간이 상당히 걸리겠지만 마나회로를 꾸준히 수련하면 마나하트를 어렵지 않게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투팍탈이 말년에 어렵게 창조한 심장박동을 활용한 자동축적마나시드를 심었기 때문에 마나를 축적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다만 자동축적마나시드는 보조 역할을 할 뿐 마나회로를 수련하지 않으면 마법사가 될 수 없다고 주의를 주었다.

마나하트에 서클을 형성하는 개수에 따라 마법을 펼칠 수 있는 능력이 제한되며, 마법수식의 이해도에 따라 펼칠 수 있는 마법의 서클이 한정된다.

즉, 마나하트에 서클을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마나수식을 이해하지 못하면 2서클이나 3서클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자랄 행성의 마법사는 8할이 5서클 미만의 마법사이고, 2할만이 5, 6, 7서클 마법사다.

8서클 마법사는 각 제국에 한두 명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투팍탈은 한 가지를 경고했다.

자랄 행성의 제국에서 차원이동마법진을 완성한 후 자신을 죽이려고 추격자를 보낼 가능성이 다분하니 자신과 같이 생긴 자들을 조심하라고 했다.

‘제국에서 추격자를 보낼지도 모른다는 건데.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투팍탈은 이미 소멸해서 사라져버렸는데?’

현 시점에서 답이 있을 리 없었다.

'지금 고민해봐야 소용없는 일.'

강수는 고개를 저었다.

투팍탈의 당부는 대충 여기까지였다.

사실 지금도 조금 전에 겪은 일이 머리부상으로 인해 생긴 환각이거나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비현실적인 일인지라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기억이 너무나 생생했기 때문에 강수는 자신에게 벌이진 해괴한 일을 고민하고, 의심할 필요 없이 깨끗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인정하든 하지 않든 머리에 엉겨 붙은 피나 투팍탈의 로브 같은 팩트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믿자.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심장에 마나시드가 심어졌고, 마나회로를 수련해 마나하트를 만들면 정말로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진짜 마법사가 될 수도 있었다.

트릭과 기술을 사용하는 마술사가 아닌 불과 얼음을 만들고, 실제로 벽을 지나쳐 공간을 이동할 수 있는 마법사인 것이다.

‘진짜 마법사? 하, 이거 전직해야 하나?’

세계 정상급 마술사의 수입이 수십 억대인 것을 인터넷으로 본 기억이 있다. 한데 트릭이 아닌 진짜 마법사의 마법이라면 최정상급 마술사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 아닌가?

문득 투팍탈의 말이 떠오른 강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지구는 자랄 행성에 비교해 마나가 희박하지만 자동축적마나시드라서 꾸준히 노력하면 어렵지 않게 마나하트를 완성할 수 있다고 했던가?

‘심장박동을 활용한 자동축적마나시드? 숨만 쉬어도 마나가 축적된다고는 했지만 마나회로를 수련해서 마나하트를 만들고, 마법수식을 캐스팅을 할 수 있어야만 마법이 실현된다고 했지.’

1서클 마법사가 되는 것도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최정상급 마술사가 되면 돈을 갈퀴로 긁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던 강수는 실소를 짓고 말았다.

‘참나, 마법사가 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구나. 더구나 마술사가 펼치는 마술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텐데.’

상념에 빠져있던 강수가 문득 무릎을 쳤다.

‘아차, 마감이 며칠 안 남았지.’

마감이 코앞인 것에 생각이 미친 강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고 나니 마감을 연기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젠장, 그동안 한 장도 채색하지 못했으니 죽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산에서 험한 꼴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몸에서는 활력이 넘치고 있었다.

‘씻고 밤새서 작업해야겠구나.’

현실을 직시한 강수는 툴툴거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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