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1회
평평한 곳에 내려온 투팍탈이 몸을 움츠리고 추위에 떨고 있는 강수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
“불을 피워 줄 테니 나무를 가져와라.”
“예.”
불을 어떻게 피우겠다는 것인지 의문이지만 강수가 주위에서 마른 나뭇가지를 주어 모았다. 강수가 나뭇가지를 모으는 동안 투팍탈은 마나회로를 움직여 약간이나마 마나를 보충하기 시작했다.
나뭇가지를 모아 놓고 기다렸다. 잠시 후 눈을 든 투팍탈이 마나수식을 캐스팅했다.
“파이어볼”
투팍탈의 간단한 말 한마디에 갑자기 그의 손 위에 지름 30cm 정도의 불덩이가 생겨났다.
‘우왓, 정말 마법사구나!’
강수는 손 위에 나타난 불덩이를 보며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투팍탈이 불덩이를 나무더미에 던지자 순식간에 나무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올라 찬 공기를 몰아냈다.
“이제 춥지 않지?”
“예. 엄청 따뜻합니다. 감사합니다.”
야간 산행을 하는 누군가 이 불을 보면 신고를 할 수도 있지만 그것까지 투팍탈에게 설명할 수는 없어 운에 맡겼다.
강수와 투팍탈은 나란히 앉아 묵묵히 불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불길을 무심히 바라보던 투팍탈이 고개를 돌렸다.
“네게 마나시드를 심고 전이마법을 시전하면 내 목숨이 거의 끝장날 것 같구나.”
“예? 그게 무슨 말이죠?”
강수는 투팍탈의 말을 언뜻 이해하지 못했다.
“그 말씀은?”
생각해보니 투팍탈이 죽음을 무릅쓰고 마나시드를 심고 전이마법을 사용한다는 말이었다.
흠칫 놀란 강수가 물었다.
“잠깐만요. 제게 마나시드를 심으면 당신이 죽는다는 말입니까?”
“그렇다.”
목숨은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것이다. 설마 투팍탈은 목숨이 두세 개라도 된단 말인가?
외계인이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목숨을 여벌로 갖고 있다고 해서 목숨이 소중하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니다.
“왜 소중한 목숨을 걸고 제게 그런 일을 하려고 합니까?”
“그것은···.”
투팍탈은 자신의 처지를 간단하게나마 얘기해주기로 했다.
어차피 제국은 차원이동마법진의 보호회로를 보완해 추격자를 보낼 것이 확실하다. 이강수에게 마법을 전수한다면 이계인이지만 자신의 후계자나 다름없었다.
어느 정도 사실을 알고 대책을 세우거나 대비를 하고 있는 편이 좋을 것이다.
“좋다. 내가 이계에 오게 된 연유와 네게 마법회로를 새겨주려는 이유를 간단히 말해 주마.”
투팍탈은 지구에 오게 된 연유를 간략하게 얘기했다.
“차미챠야 제국과 적대적이었던 나는···.”
짤막하게 과거사를 얘기한 투팍탈은 나직이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후후, 결국 코탼 영지는 순식간에 무너졌지. 하지만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기사단을 비웃으며 보호회로가 미완성인 차원이동마법진의 포탈을 열고 차원이동으로 이곳에 도달한 것이다.”
잠시 말을 끊은 투팍탈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무모한 모험이었지. 미완성된 마법진 때문에 지금 육신이 붕괴되고 있거든. 그것을 치유마법으로 유지하고 있다.”
강수는 제국의 추격에 쫓기며 살다가 마지막 안식처라고 할 수 있는 코탼 영지마저 짓밟혀버린 투팍탈에게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살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겁니까?”
투팍탈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삶은 너보다 내가 더 간절하지 않겠느냐? 모든 마법지식을 검토하고 머리를 굴렸지만 이곳은 마나가 희박해 살아날 방법이 없다. 조금 일찍 죽느냐 늦게 죽느냐의 차이뿐이다.”
투팍탈이 괴로운 듯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
“모든 것을 포기한 순간 머리가 깨져 죽어가는 너를 발견했다. 네 놈도 재수가 더럽게 없더군. 하필 포탈이 열리는 공간에 있었으니 말이야. 한데 문득 내 과거가 떠올랐다. 나는 마법을 배울 수 없는 노예의 자식이었다. 전장에서 한 마법사를 구출해 주었는데 그는 상처가 깊어 회복할 수 없었다. 죽어가던 그가 마법사규약을 무시하고 내게 마법회로와 몇 가지 마법수식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나는 운명을 거슬러 대륙의 최고의 8서클 마법사가 될 수 있었다.”
말을 마친 투팍탈이 강수를 지긋이 주시했다.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강수는 투팍탈이 왜 자신을 치료하고 마법을 전수해 주려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시술 기회는 한 번뿐이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해라. 이제 네 심장에 마나시드를 심어주마.”
강수가 눈을 크게 뜨고 더듬었다.
“시, 심장에요?”
“그렇다. 심장에 마나하트를 만들 수 있는 마나시드를 심는 것이 마법사가 되기 위한 첫 번째 단계지. 좀 고통스럽긴 하다만 참아라.”
심장에 마나시드를 심는다는 말에 강수가 경악했다. 심장은 인간의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기관이 아닌가?
잘못하면 즉사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시, 심장에 시술합니까? 괜찮을까요?”
사실 투팍탈도 강수가 이계인이라 시술의 성공 여부를 자신할 수는 없었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고 커다란 성공에는 커다란 위험이 따른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얻을 것이 없다.
하지만 사실대로 얘기해서 피시술자를 정신적으로 동요시킬 필요가 없었다.
투팍탈이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할 것 없다. 나는 수십 번의 시술을 성공적으로 해 왔다. 단지 좀 고통스러울 뿐이니 그것만 참고 이겨내면 된다.”
마법을 배울 수 있다는 말에 무턱대고 가르쳐달라고 했지만 목숨과 바꿀 정도는 아니다. 순간적으로 오만가지 잡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다시 선택의 기로에 놓인 것이다.
경직된 강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투팍탈이 피식, 실소를 지었다.
“시술 받다 죽을까 두려우냐?”
“아, 아니요.”
강수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아니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어차피 죽음의 문턱에서 투팍탈이 구해준 목숨이었다. 투팍탈을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을까 싶었다.
“상의를 벗고 준비해라.”
결심을 굳힌 강수는 군말 없이 상의를 벗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눈을 감고 마음을 편히 갖도록 해라.”
강수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천천히 하면서 두려움을 떨쳐내고 심신을 안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랄 행성에서도 심장에 인위적으로 마나시드를 심는 시술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기본적으로 심장을 보호하는 마법진과 고밀도의 마정석이 필요하다.
심장이 마나에 적응하는 최소한의 시간이 요구되었고, 개개인의 편차에 따라 적게는 이삼 일, 많게는 일주일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마법사가 될 수 있는 조건부터 어려웠기 때문에 마법사는 귀한 존재였고, 제국에서 특별한 지위에 올라있다.
하지만 투팍탈은 제국에서도 가장 탁월한 8서클 마법사다.
제국의 다른 8서클 마법사는 감히 시도하지 못하는 시술을 오직 그만이 행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심장에 마나시드를 심을 수 있는 것이다.
인구 10만여 명에 불과한 소영지 코탼에 4, 5명이면 될법한 귀한 마법사가 30명이나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코탼의 마법사 30명 가운데 25명이나 투팍탈의 마나시드 시술로 마법사가 되었다.
사실 투팍탈이 마나시드를 성공적으로 시술하기까지는 수십 번의 시행착오가 있었다. 시술을 실패하면 어김없이 피시술자가 죽어나간다. 결국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간 끝에 완성한 시술이기도 했다.
더욱이 이번에 시술하려는 것은 1년 전에 겨우 완성한 자동축적마나시드였다. 자동축적마나시드 역시 적지 않은 희생자를 양산한 끝에 1년 전 성공했었다.
‘다만 보통의 시술에 비해 심한 고통이 좀 따르지.’
비릿한 미소를 지은 투팍탈이 강수의 옆에 섰다. 그리고 푸른빛이 은은하게 일렁이는 양손으로 강수의 심장이 위치한 가슴과 등에 댔다.
커다란 그의 손에서 흘러나온 푸른빛이 강수의 가슴과 등으로 스며들었다.
‘어?’
마나를 강수의 심장에 흘러 보낸 투팍탈은 속으로 가볍게 놀랐다.
‘심장이 우리에 비해 무척 엄청 빨리 뛰는군? 가만 이렇게 빨리 뛰면 자동축적마나시드의 효과가 배가되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이론상···.’
잠시 강수의 심장이 뛰는 속도를 측정한 투팍탈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배 정도군. 그럼 두 배 빠르게 축적된다는 얘기. 마나는 희박하지만 심장 박동이 상당한 효과를 발휘하겠어. 흐흐. 노력만 하면 마나하트 만드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겠구나.’
새로운 사실을 알아낸 투팍탈은 재밌게 됐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시작하자.’
투팍탈은 강수의 심장 안에 자신의 마나를 응축시키기 시작했다.
투팍탈의 시술이 시작되면서 강수는 머리칼이 쭈삣 서는 섬찟함을 느꼈다. 이질적인 기운이 심장에 스며들어 심장마비를 일으킬 뻔했다. 갑작스럽게 목구멍이 막히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심장이 얼음처럼 차갑게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꺼억, 커억!”
강수의 눈이 퉁방울처럼 커졌고,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차가운 기운이 영혼마저 얼려버릴 것만 같았다.
강수는 육체가 얼음덩이가 되어 조각조각 부서지는 듯한 처절한 고통 속에서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은 순간적으로 떠올랐다가 극악한 고통에 산산이 흩어졌다. 수십만 개의 얼음 창이 전신을 찌르는 것 같은 무지막지한 통증과 고통이 몰려들었다.
육체가 얼음 조각이 되어 쪼개지는 것 같은 끔찍하고 참혹한 고통이 지속되었다.
“끄으으으으으윽!”
투팍탈의 양 손에 잡혀 있던 강수의 육신이 작살에 뚫린 듯이 펄쩍펄쩍 뛰었다.
미친 듯이 푸들거리던 강수의 육신이 갑자기 축 늘어졌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투팍탈은 강수의 변화에 꿈쩍하지 않고 시술을 계속 했다.
10여분 뒤, 완두콩 반쪽 크기의 마나시드가 강수의 심장 안에 생성되었다.
투팍탈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이 뺨으로 줄줄 흘러내렸고, 얼굴색은 옅은 회색으로 변했다.
투팍탈이 강수를 바닥에 누웠다. 그의 손을 감싼 푸른빛은 거의 사라져 희미해졌다.
과도한 마나와 체력을 소진한 투팍탈의 안색은 사색이 되었다.
우왁!
투팍탈은 한 모금 피를 토해냈다.
마나를 과도하게 사용한 탓에 육신이 붕괴되고 있었다.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왔음을 느낀 투팍탈이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으으, 역시 무리인가?”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괴소를 터트렸다.
“흐흐흐. 그래도 성공했어. 운이 좋은 놈이군. 성공 확률은 반반이었는데.”
잠시 심호흡을 하며 심신을 안정시킨 투팍탈은 소모된 마나를 조금이라도 회복하기 위해 눈을 감고 마나회로를 가동했다.
어둠에 잠긴 주위는 정적에 빠져들었다.
간혹 밤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며 쏴아아 하는 소리로 자신의 흔적을 남겼고, 뽀로롱, 뽀로롱 하고 산새 소리가 정적을 깰 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죽은 듯이 누워 있던 강수의 몸이 꿈틀거렸다.
엄청난 통증을 느끼며 강수는 눈을 떴다.
“으윽.”
강수는 욱신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신음을 토했다. 갑자기 수많은 개미가 심장을 깨무는 것 같은 극심한 통증이 엄습했다.
“으아아악!”
입에서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통증은 심장에서 그치지 않았다. 바늘로 쑤시는 것 같은 극심한 통증이 정수리에서 발가락 끝에까지 파도처럼 밀려왔다 물러가고 다시 밀려들었다.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견디기 힘든 고통이 계속되었다.
시간이 정지한 것은 아닐까?
끝없이 계속되는 고통 속에서 강수는 문득 시간이 멈춘 것 같다는 공포를 느꼈다. 이 같은 고통이 계속된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정신적인 공포는 시간의 흐름을 더욱 더디게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영혼마저 이탈해버릴 것만 같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강수의 전신에서 식은땀이 줄줄이 흘러내렸다. 마치 물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강수의 옷은 순식간에 땀으로 흠뻑 젖었다.
“헉, 헉. 헉!”
심장을 부여잡은 강수는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고통이 잦아들면서 바늘지옥에서 벗어난 것만 같았다. 말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환희와 안도감이 찾아왔다.
‘아아. 살았다.’
드디어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마치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듯한 황홀한 기분이 느껴졌다.
지금 같은 기분이라면 단번에 제주도까지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황홀한 감각도 서서히 소멸해갔다.
몸의 상태가 정상적으로 돌아온 것을 느낀 강수는 주위를 살피며 투팍탈을 찾았다.
‘투팍탈은?’
모닥불의 불빛이 일렁이는 주위는 어두웠고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뒤돌아본 강수는 자신의 뒤에서 웅크리고 있는 시커멓고 거대한 물체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휴우, 투팍탈이구나.’
거대한 물체는 다름 아닌 투팍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