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그림 그리는 마법사 - 9회
‘정말로 차원이동이 가능할까?’
호기심이 발동한 투팍탈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마법진을 연구해 왔다. 그 연구의 결실을 이제 수확하려는 순간이건만 운명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조롱하듯 제국의 군대가 몰려와 코탼성을 무너뜨렸다.
투팍탈은 자신이 건설한 차원이동마법진의 성공 여부가 궁금했다. 비록 보호회로를 완성하지 못했지만 투팍탈은 과감하게 차원이동마법진을 가동해 차원이동을 감행했다.
차원이동은 성공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을 쫓아온 제국의 기사들처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했다.
‘너희가 다시 온들 한줌 먼지로 변해 있을 나를 무슨 수로 날 찾을 수 있으랴?’
절망적인 상황은 모든 기대와 희망, 의욕을 앗아갔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투팍탈의 고개가 아래로 푹 꺾였다.
그의 시야에 다시 이계의 인종이 들어왔다.
“흐흐흐. 네 놈도 더럽게 운이 없구나. 하필이면 차원공간이 생성되는 그 공간에 있을 건 뭐람.”
빛 한 점 없는 산 속이라 주위는 이미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운이라···.”
투팍탈은 차원이동 해 온 이계가 어떻게 생겨먹은 세상인지는 몰라도 제국 못지않게 문명이 발달한 사회라고 짐작했다.
쓰러져 있는 이계 인종의 옷차림과 신고 있는 신발을 보면 능히 추축하고도 남았다.
우우웅, 우우웅!
“웃, 뭐지?”
갑작스럽게 드워프 같은 인종의 몸에서 괴음이 울리자 투팍탈은 흠칫 놀라서 벌떡 일어나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괴음은 진동으로 되어 있는 강수의 스마트폰이 신호를 받아 울리는 소리였다.
우우웅, 우우웅!
“허, 죽어가는 놈한테 놀라다니 죽을 때가 됐나 보군.”
투팍탈은 혀를 차며 강수의 몸을 뒤져 진동하고 있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이리저리 스마트폰을 살펴보던 투팍탈의 손길에 통화 아이콘이 눌려졌다.
[야, 이 자식아! 뭐 하는데 전화를 꺼놓고 지랄이야? 너 지금 어디야? 좀 만나자. 내가 갈 테니까 어딘지 말 해라.]
스마트폰에서 괴상한 고함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아까처럼 놀라지는 않았다. 투팍탈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불이 켜진 스마트폰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
[야, 야, 강수야? 왜 말이 없냐? 뭔 일 있어? 지금 어디야?]
“······”
[야, 임마. 전화를 받았으면 말을 해. 말을. 갑자기 벙어리라도 됐냐?]
“······”
[야, 자식아. 이제 그만 잊어라. 세상에 여자가 종희 하나뿐이냐? 세상의 절반은 여자 아니냐? 그까짓 종희가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아직까지 청승 떨고 있냐. 내가 살 테니까 오늘 술이나 한 잔 하자. 어떠냐?]
“······”
[으, 젠장, 뭐냐! 왜 말이 없어?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고 말이라도 해라.]
“······”
[아, 씨발. 미치겠네.]
미치겠네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았다. 투팍탈은 이상한 금속에서 나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목소리에서 걱정과 근심, 안타까운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투팍탈은 강수의 배 위에 스마트폰을 던졌다. 스마트폰은 신기하게도 본래 있던 주머니 속으로 쏙 들어갔다.
투팍탈이 다시 바위에 걸터앉았다.
땅바닥에 쓰러져 죽어가는 이계인을 누군가 걱정해 주는 자가 있다는 사실이 투팍탈의 마음에 잔잔하게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끝없이 저주했던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떠올렸다.
투팍탈의 부모는 노예였다.
그는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모멸과 멸시 속에서 시달렸다. 부모를 도와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고, 몬스터나 야만족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다.
그의 나이 열살 되던 해. 대륙의 두 제국이 팽창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패권을 다투는 전란이 발발했다.
키가 2m까지 자란 투팍탈도 캬미차야 제국군에 징집되어 창을 들고 전선에 투입되었다.
투팍탈이 속한 군대는 히뮤티야 제국군과의 전투에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전장에서 죽어가던 마법사를 구해 동굴에 숨어들었다.
부상이 심각한 마법사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죽어가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혼신을 다 하는 투팍탈을 지켜본 마법사는 자신을 왜 구하려고 애를 쓰는지 물었다.
투팍탈은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그는 투팍탈을 가상하게 여겼다.
살아난다면 모를까 어차피 곧 죽을 몸이었다. 마법의회의 마법사규약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마법의회의 허가 없이 일반인에게 마나회로를 전수하지 못한다는 마법사규약을 무시하고, 마법사는 투팍탈에게 마나회로의 수련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기본적으로 자랄인은 성장하면서 배꼽 아래에 마나시드가 만들어지는데 낮은 확률로 심장에 마나시드가 생성되는 경우가 있다.
심장에 마나시드가 생성되었는지의 여부가 마법사가 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었다.
만약 운이 좋아 심장에 마나시드가 생성되면 마나회로를 수련해 마나하트를 만들어 마법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죽어가는 마법사는 투팍탈이 마법사가 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마나시드가 심장에 생성되어 있어도 마법아카데미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않으면 혼자서 마나하트를 만들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마나감응도가 낮고, 마나 운용의 재능이 없으면 몇 년을 수련해도 심장에 마나하트를 만들지 못하기도 한다.
투팍탈의 경우 마나감응도가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노예라는 신분 때문에 마법을 배울 수 없었다.
죽어가는 마법사에게 마나회로를 전수받은 투팍탈은 천부적인 자질을 바탕으로 반년 만에 스스로 마나하트를 만들었다. 가공할 재능이었지만 누구에게도 드러낼 수 없는 비밀이었다.
혼자 마음 속 깊이 비밀을 간작한 투팍탈은 노예에게 금지된 마법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전란의 시대는 그에게 마법사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투팍탈은 마법사가 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전장에서 부상당한 마법사를 납치한 후 고문으로 마법을 실토케 했다. 당연히 마법을 알아낸 후에는 마법사를 죽여 매장했다.
그는 숱한 죽을 고비와 고난의 가시밭을 헤치며 자신의 운명을 개척했다.
10년 동안 전장에서 구른 투팍탈은 노예의 신분에서 면천되어 평민이 될 수 있었다.
20세에 평민이 된 투팍탈은 이후에도 10년간 전장을 누비며 마법을 도둑질했다. 두 제국이 휴전을 맺은 후에는 방랑자로, 용병으로 수 십 년 간 제후국을 떠돌며 마법을 탐구했다.
그는 자신의 더러운 운명을 벗어 던지고 깨부수기 위해 운명에 맞서 치열하게 투쟁했다. 그 결과 대륙에서도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극소수만이 오를 수 있는 8서클 마법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사악한 심성과 잔인한 행위가 밝혀지면서 2개 제국의 공동의 적이자 흑마법사로 몰렸고, 제국기사단의 끝임 없는 추격에 쫓겼다.
결국 마법사로서 정점에 우뚝 선 대마법사기 되었으나 운명이 깔아놓은 죽음의 안배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지난 80년의 세월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이었으나 회환이 짙게 드리운 삶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버린 지난했던 세월이기도 했다.
희망을 잃은 투팍탈은 시선을 이계 인종에게 돌렸다.
‘얼굴을 보면 꽤 젊어 보이는데 이자의 운명도 여기까지인가?’
자신은 그토록 저주했던 운명의 사슬을 벗어나지 못했다. 삶은 한낱 바람에 지는 꽃잎처럼 허공으로 흩어졌고, 자신의 앞에는 죽음의 그림자만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다시 한 번 태어날 수만 있다면 이번에는 노예의 자식이 아니라 귀족의 자식으로 태어나고 싶었다.
‘그러면 제국의 황실을 갈아엎을 수 있지 않을까?’
염두를 굴리던 투팍탈이 실소를 지었다.
‘부질없군.’
귀족의 자식으로 태어난다면 반역을 꿈 꿀 리가 없을 테니까.
투팍탈은 물끄러미 죽어가는 이계의 젊은이를 내려다보았다.
죽어가는 자는 꽤 젊어 보였다.
젊은 나이에 날벼락처럼 떨어진 차원이동공간에 휩쓸려 죽어가고 있는 이 자의 운명도 참으로 기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분명히 이곳에서 죽을 운명일 것이다. 내가 간섭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만약 네가 죽지 않는다면 네 운명은 어떻게 될까? 분명히 마법과는 거리가 먼 세상이 틀림없는 이곳에서 네가 마법사가 된다면 죽어야 했을 운명이 어떻게 변화 될까?’
자신은 이계인의 운명을 비틀어버릴 힘을 갖고 있었다.
그 힘을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자신은 어차피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과거 마나회로를 전수해 준 마법사처럼.
이름 모를 마법사가 마법사규약을 무시하고 마나회로를 전수해 준 덕분에 자신의 운명은 거대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투팍탈은 자신이 개입해서 바뀌게 될 이계인의 운명이 조금 궁금해졌다.
확신은 못하지만 이계인에게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이전의 삶보다 훨씬 재미난 세상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투팍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후후. 좋아. 이대로 둘 다 죽기에는 너무 허망하지. 죽기 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네게 해주마. 비록 네 성품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네 심장에 마나시드를 심어주마. 이곳은 마나가 희박하긴 하지만 최근에 완성한 자동축적마나시드라면 언젠가는 1서클은 이룰 수 있겠지. 다만··· 자동축적마나시드 시술의 성공 여부는 역시 네 운에 달렸다.”
투팍탈이 강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투팍탈은 운명을 거슬렀고, 전장에서 공을 세워 노예의 신분을 벗고 마법사가 되어 운명의 사슬을 끊어냈다고 여겼다. 하지만 결국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고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다.
절반은 성공했지만 절반은 실패다.
만약 죽어가는 이계인의 운명이 여기까지라면 자신의 손으로 이계인의 운명을 바꿔 주리라.
운명의 굴레를 마음껏 비웃어 주리라.
자신의 결정에 만족해하며 투팍탈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투팍탈은 강수의 머리맡에 앉아 오른손을 뻗어 강수의 머리를 감쌌다. 손 안에 강수의 머리가 그대로 들어왔다.
커다란 그의 손에서 푸른빛의 안개 같은 기운이 흘러나와 강수의 머리를 덮었다.
뇌출혈로 뇌에서 응고해 가던 죽은피가 밖으로 배출되었고, 괴사해 가던 뇌세포가 푸른 기운을 빨아들이며 왕성하게 재생하기 시작했다.
약 5분쯤 흘렀을까?
비록 피범벅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강수의 찢긴 두피와 깨진 두개골, 괴사하던 뇌수가 말끔하게 치유되었다.
“머리는 치료됐군. 다른 곳은 다친 곳이 없어 보이는데 왜 깨어나질 않지?”
강수를 내려다보던 투팍탈이 오른손에 마나를 일으켜 강수의 몸 상태를 점검하려다 생각이 바꿨는지 손가락 하나로 뺨을 가볍게 쳤다.
툭, 툭, 툭!
경쾌한 소리와 함께 강수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음···.”
강수는 뺨에서 따가운 감촉과 으슬으슬한 한기를 느끼며 눈을 떴다.
사위는 어두웠다. 눈을 몇 번 깜박이고 나서야 희미한 형체를 띤 사물을 구분할 수 있었다.
강수는 부르르 몸을 떨며 일어났다.
산중이라 4월의 밤은 기온이 뚝 떨어져 무척 추웠다. 강수는 잠시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곧 자신이 왜 산비탈에 누워 있었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하산하는 중에 일그러지는 이상한 공간을 살펴보다 갑자기 앞에서 폭탄이 터진 것처럼 엄청난 압력이 덮쳐왔다. 어떻게 해볼 여지도 없이 압력에 휩쓸려 튕겨나가 비탈을 구르다 머리에 강렬한 충격을 받고 정신을 잃었다.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으, 춥다.’
한참 동안 산비탈에 누워있었던 탓에 한기가 몸에 스민 것이다.
몸을 움츠린 강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머리를 만져보았다. 아픈 곳은 없었으나 뭔가 끈적이는 것이 만져졌고, 머리카락은 떡이 져있었다.
비릿한 냄새도 났다.
‘피구나!’
강수는 끈적거리는 것이 피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근데 왜 아프지 않지?’
이상한 일이었다. 강수는 조심스럽게 일어나서 팔다리를 움직여보았다. 결리거나 아픈 곳이 없었다. 뼈가 부러지거나 금간 곳이 없는 모양이었다.
‘휴, 크게 다치진 않았구나. 운이 좋은 건가?’
머리가 멀쩡한 것도 그렇고 몸 상태도 아픈 곳이 없는 것이 의문이었지만 깊게 생각할 상황이 아니었다.
“ξ≠ю₢ォ₪(깨어났구나)”
“헉!”
갑자기 뒤에서 탁한 저음의 괴상한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화들짝 놀란 강수가 헛숨을 들이키며 소리가 난 뒤로 고개를 홱 돌렸다.
“앗!”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거구의 인간을 발견한 강수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누, 누구요?”
“나는 마법사 투팍탈이다.”
“.......”
영어도 중국어도 독일어도 아니다.
강수는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언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