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그림 그리는 마법사 - 7회
코탼성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규모는 작고 소담하지만 성스럽게 지어진 트미야 신전이 있다.
신전의 뒤편은 규모가 상당히 넓은 숲인데 그 안에는 신전의 몇 배나 되는 커다란 돔형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돔형 건물의 실내.
석문의 정면 벽에 주먹 크기의 투명한 수정구슬 다섯 개가 박혀 있었고, 그 가운데 두 개에서 불이 들어와 있다.
실내에는 대리석 위에 지름 30미터가 넘는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화려하고 신비스러운 색채를 띠고 있는 마법진은 수십 개의 서클이 겹겹이 둘러져 있고,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는 수백 개의 마정석이 곳곳에 박혀있었다.
마법진의 중앙.
황금색 실로 치장된 로브를 입은 자가 마법진의 정중앙 빈 서클 위에서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장대한 체구의 거한이었다.
그는 거무스름한 쇠봉으로 빈 서클에 이상한 문자를 새겨 넣고 있었다. 바로 고대문자이자 마법문자인 룬어였다.
팟!
세 번째 수정구슬에서 불이 들어왔다.
“빌어먹을 제국의 오크들!”
로브를 입은 거한이 고개를 들어 수정 구슬을 쳐다보며 거침없이 욕설을 뱉었다. 돔을 지키는 결계, 세 번째 방어막이 깨진 것이다.
얼굴에 깊은 주름과 잔주름이 가득한 것을 보면 거한은 노인으로 보였다.
거한의 생김새는 인간과 흡사했으나 당연히 인간은 아니었다.
위압감이 느껴지는 거대한 체구, 옅지만 푸른빛이 도는 피부, 인간보다 더 깊게 자리한 눈과 우뚝 솟은 코 등 그는 자랄 행성의 인종인 자랄인이다.
욕설도 잠시 노인은 마나를 주입한 쇠봉으로 서클에 룬어를 새겨 넣었다.
그가 작업을 재개한 지 1분도 지나지 않아 네 번째 수정구슬에서 불이 들어왔다.
대리석 바닥에 룬어를 새겨 넣던 노인이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젠장, 열흘 정도만 시간이 있었더라도 완벽하게 완성하는 것인데···.”
문득 노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차피 영지가 무너진 마당인데 오히려 잘 된 건가?”
엎드려서 작업을 하고 있을 때는 그저 거구라는 느낌이었지만 허리를 펴자 노인의 신장은 무려 220cm에 달했다.
얼굴이 굳어진 노인은 성큼성큼 마법진의 한 곳으로 걸어갔다.
마법진의 정중앙에서 5m 남짓 떨어진 곳에 앉아서 정면에 시선을 주었다.
마지막 수정구슬에 불이 켜지고, 잠시 후 건물이 무너질 것처럼 폭음이 진동했다.
콰앙!
건물의 거대한 석문이 폭발하듯 산산이 부서지고, 폭발의 잔해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뿌연 먼지를 뚫고 수많은 그림자가 실내로 쏟아져 들어왔다.
건물에 난입한 2백여 개의 그림자는 갑옷으로 무장하고 검과 창을 든 제국의 불멸기사단이었다.
상반신을 갑주로 감싼 2.4미터에 이르는 거구의 로캬롭퓨가 선두에서 나타났다.
그는 제국의 제국기사단 단장이자 소드마스터였다.
그가 직접 제국기사단을 이끌고 출전한 이유는 투팍탈을 사로잡기 위해서였다.
“네 이놈, 반역자 투팍탈! 이런 후미진 곳에 잘도 숨어 있었구나.”
로캬롭퓨가 마법진 앞으로 달리며 쇠종이 치듯 찌렁찌렁한 고함을 질렀다.
“꼬리가 잡힌 이상 네놈이 이동마법진으로 도주해봐야 소용없다.”
검을 들고 달려들던 로캬롭퓨는 뭔가에 막힌 듯 마법진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얼굴을 붉힌 로캬롭퓨가 투팍탈을 노려보며 노호를 터트렸다.
“고작 이 따위 결계를 못 뚫을 쏘냐.”
투팍탈이라 불린 노인이 비아냥댔다.
“제국의 오크 같은 기사단이 몰려왔으니 방어진이 깨지는 것이야 순식간이겠지.”
“뭐, 오크들이라고! 이, 미친 흑마법사 같으니.”
로캬롭퓨가 2m가 넘는 거대한 검을 쳐들어 방어막을 번개처럼 후려쳤다.
평!
검과 방어막이 충돌하자 기파가 파도처럼 후방으로 퍼져나갔다.
“로캬롭퓨, 그 놈에 불 같은 성격은 여전하군. 흥분을 조금 가라앉히고 내 말 좀 들어 보게나.”
“뭐라고! 무슨 헛소리로 도망갈 시간을 벌어보려는 수작이냐.”
로캬롭퓨가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 기사단은 당장 방어진을 깨뜨려라.”
“우와와--”
2, 3대 250여 명의 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어 이동마법진을 둘러싸고 창검으로 방어막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팍!
퍼퍼퍼퍼퍽!
수많은 무기가 방어진과 충돌하며 폭음이 잇달아 터지고 충격파가 실내를 휘감았다.
드드드드.
건물이 무너질 듯이 흔들렸고, 석벽과 천장이 흔들리며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거참, 성미하고는...”
투팍탈은 당장 방어막이 깨질 것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도 태연한 신색으로 자신의 앞에 음각된 손 모양의 문양에 오른손을 집어넣었다.
그의 오른손이 푸른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는 전면의 로캬롭퓨에게 말을 걸었다.
“로캬롭퓨, 내가 여기서 네놈들에게 죽음을 달게 받을 것 같은가?”
로캬롭퓨가 차가운 목소리로 비웃었다.
“후후, 고작 이동마법진으로 도주하려나 본데 어디로 도망치든 결코 내 손에서 벗어 날 수 없다는 것을 장담하지.”
본래 포탈이 제 기능을 하려면 도착하고자 하는 곳에도 이동마법진을 건설해 놓아야 한다. 투팍탈이 도주한 후 도착 지점의 이동마법진을 파괴하거나 을 제거하면 포탈은 소멸한다.
당장 추격은 불가능하지만 위치는 알 수 있기 때문에 제국의 추격을 벗어날 수 없다고 자신한 것이다.
“크하하. 섣부른 호언이군. 과연 그럴까?”
투팍탈의 오른손에서 푸른빛을 띤 기운이 뿜어졌다.
그러자 푸른빛이 마법진을 따라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며 수백 개의 마정석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이 무슨 신호라도 된 듯이 마정석에서 일제히 빛이 뿜어져 나와 마법진의 정중앙 공간에서 충돌했다.
그리고 그 공간이 일그러지며 검푸른 색의 원형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워프 게이트인 포탈이 생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투팍탈의 뒤에서 생성되는 구체의 포탈을 보며 로캬롭퓨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보니 지름이 30미터나 되는 이렇게 거대한 이동마법진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었다.
공간을 이동하는 포탈의 특성상 물리적인 제약이 따랐다.
이렇듯 거대한 이동마법진을 건설해봐야 생성되는 포탈의 크기는 비슷했다. 또한 포탈이 공간에서 원형의 구체로 형성되는 경우는 처음 보았다.
모든 워프 게이트, 포탈은 이동마법진 중앙에 반원으로 형성된다.
투팍탈이 서 있는 이동마법진은 일반적인 이동마법진과는 상이했다.
투팍탈이 인상을 쓰고 있는 로캬롭퓨에게 말했다.
“경고 하나 하지. 나를 쫓아오려면 적어도 네놈이 직접 따라와야 할 것이다. 정찰하겠다고 수하만 보내봐야 쓸데없이 목숨만 희생할 뿐이니까.”
로캬롭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누가 네 놈의 얕은 수작에 넘어갈 것 같은가?”
“믿을지 말지는 네가 선택해야겠지.”
마침 방어진이 깨져나가며 기사들이 검과 창을 휘두르며 투팍탈을 향해 쇄도했다. 동시에 투팍탈의 몸이 마법진 중앙에 형성된 포탈 속으로 스며들더니 사라졌다.
제국의 기사들이 검푸른 구체 앞으로 몰려와 웅성거렸다.
“이게 뭐지?”
“평범한 이동마법진은 아닌 것 같군.”
“한데 이 마법진은 미완성인 거 같네. 저기 안쪽에 위치한 세 개의 서클이 비어있지 않은가?”
“글쎄? 난 마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자네 말이 맞는 것 같군.”
“미완성인데 포탈이 형성되고 투팍탈이 도주할 수 있나?”
“생각해보니 그것도 이상하군.”
“조용해라.”
웅성거리던 실내가 로캬롭퓨의 외침으로 조용해졌다.
로캬롭퓨는 검푸른 빛을 은은히 발산하고 있는 구체의 공간 앞으로 다가갔다. 직경 5미터에 이르는 포탈을 살펴보고 있는 그의 옆으로 두 마법사와 2, 3대 대장 둘이 다가왔다.
“너희들은 이처럼 거대한 이동마법진을 본 적 있느냐?”
두 대대장이 동시에 대답했다.
“없습니다.”
“처음 봅니다.”
“나도 마찬가지다. 이동마법진은 틀림없는데 여기에 무슨 수작을 부려놓은 것 같군. 게다가 포탈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어째서 도착 지점의 이동마법진을 파괴하지 않고 있지?”
두 마법사는 황홀한 표정과 경외의 눈으로 거대하고 신비로운 마법진과 중앙에 형성된 구체의 포탈을 살펴보고 있었다.
로캬롭퓨가 눈살을 찌푸렸다.
“키칼쵸, 이런 마법진을 본 적 있는가?”
두 마법사 가운데 키가 조금 더 큰 마법사가 고개를 돌려 로캬롭퓨를 바라보았다.
“혹시 전설로만 내려오는 고차원의 이동마법진이 아닐까 싶습니다.”
“뭐라? 고차원의 이동마법진이라고? 그런 마법진도 있느냐?”
“예. 이렇듯 거대한 마법진에 대해 서술한 마법서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마법서에 의하면 고차원의 이동마법진은 쌍방이 아닌 일방으로 이동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세에서 고차원의 이동마법진이 나타난 적은 없었습니다.”
“한데 이것이 고차원의 이동마법진일 수도 있단 말이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엄청난 규모와 전혀 알아 볼 수 없는 룬어를 보건 데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음.”
로캬롭퓨가 신비롭게 일렁이고 있는 구체의 포탈로 시선을 돌리고 생각에 잠겼다.
포탈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포탈이 소멸하기 전에 진입하면 투팍탈을 추격할 수 있었다.
로캬롭퓨는 투팍탈의 경고가 미심쩍었지만 그렇다고 놈의 수작에 넘어가 자신이 직접 포탈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심중으로 결정을 내린 로캬롭류가 좌측에 있는 제3대 대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큐랴토퍄.”
“예, 단장님.”
큐랴토퍄라 불리운 자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의 키는 2.3미터에 가까웠다.
“네가 수고를 해줘야겠다. 제3대를 인솔해 투팍탈이 도주한 위치를 정찰하고 복귀한다.”
“옛!”
“그리고···.”
“······.”
로캬롭퓨는 투팍탈이 말한 경고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수하만 보내면 목숨을 잃을 것이란 경고는 그만큼 위험한 장소라는 것인데···.’
기사 한 명 한 명은 제국의 귀중한 무력 자산이다. 미지의 장소에서 헛되게 목숨을 잃게 할 수는 없었다.
오랜 추격 끝에 투팍탈의 은거지와 그의 반역세력을 분쇄했다. 이제 투팍탈은 혼자다. 무리하지 않고 느긋하게 사냥해도 충분하다는 판단이 섰다.
“너와 제3대 기사단의 목숨은 소중하다. 투팍탈의 경고가 진짜라고 판단되면 아무 것도 할 생각하지 말고 즉시 복귀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큐랴토퍄가 기사들을 향해 외쳤다.
“제3대 앞으로.”
120여 명의 기사들이 큐랴토퍄의 앞으로 나섰다.
제국의 기사단이 추격을 준비하는 동안 검푸른 포탈이 급격히 소멸하고 있었다.
로캬롭퓨가 눈살을 찌푸렸다.
“소멸해? 이제서야 파괴한 것인가? 아니면···.”
로캬롭퓨는 손 모양의 문양을 바라보았다.
투팍탈이 손 모양의 문양에 마나를 주입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저 곳에 마나를 주입하면 마법진이 복구되려나? 한 번 해보자.’
염두를 굴린 로캬롭퓨가 손 모양의 문양에 마나를 주입했다. 엄청난 양의 마나가 마법진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로캬롭퓨의 마나를 빨아들인 마법진은 마치 마지막 하나의 퍼즐을 맞춘 것처럼 순식간에 수백 개에 달하는 마정석의 마나와 융합하며 소멸하던 포탈을 다시 원상태로 복구시켰다.
로캬롭퓨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마정석을 사용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마나가 고갈되겠군. 한데 이렇게 복구되는 것을 보니 정말로 고차원의 이동마법진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렇다면 추격이 한결 수월해지지.’
마나를 주입한 로카롭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큐랴토퍄, 이동마법진을 오래 유지할 수 없다. 서둘러라.”
“옛, 단장님.”
큐랴토퍄가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제3대는 마나를 운용해 전신을 보호하고 나를 따라 이동마법진으로 진입한다.”
큐랴토퍄가 포탈로 들어갔고, 그의 뒤를 따라 120명의 기사들이 차례차례 포탈 속으로 사라졌다.
포탈 안으로 진입한 큐랴토퍄는 완벽한 어둠과 함께 섬뜩한 기운을 느끼고 크게 놀라서 부르짖었다.
“이동마법진이 아니다!”
얼음 동굴에 들어선 것처럼 차디 찬 기운이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팔다리를 움직이려 했으나 항거할 수 없는 기운이 몸을 옭아맸다. 그 힘은 느리게 회전하고 있었다. 그렇게 느낀 순간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었다.
“으아아악!”
큐랴토퍄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으나 그의 입은 꿈쩍하지 않았다. 비명은 그의 뇌리에서 울렸을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