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그림 그리는 마법사 - 6회
지랄 같은 현실이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 운명의 시간은 길어야 100년.
기회는 한 번이다. 여분의 시간도 여분의 삶도 없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 해서 성공을 향해서 노력해야 한다. 무의미하게 낭비한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바위에 걸터앉은 강수는 자신이 살아온 시간, 되돌린 수 없는 27년의 시간을 반추해보았다.
시골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니 남들에 비교해서 자신의 출발선은 좋지 않았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부족한 것도 없이 학창시절을 보냈다.
사실 따져보면 남들과는 조금 다른 학창시절을 보내기는 했다.
그림을 사진으로 찍은 것처럼 잘 그렸다.
얼마나 잘 그렸는지 강수는 전교생 가운데 그림을 가장 잘 그린다고 소문이 났다.
재능을 알아본 미술선생님이 미술대학을 추천했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좋았기 때문에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미술학원에 다니며 꽤 열심히 그림을 공부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미대로는 1, 2위를 다투는 홍우대 회화과에 당당하게 입학했다.
강수의 실력과 운빨은 딱 거기까지였다.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인재가 모인 학부였다. 강수보다 못 하는 친구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울에 올라와 자취방을 얻어 대학생활을 시작했고, 2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갔다 온 후 3학년에 복학했다.
강원도 시골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의 경제력은 뻔했다.
대학 2년 동안 뒷바라지 해 준 것만으로도 부모님의 허리가 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군대까지 갔다 온 마당에 부모님께 손을 벌리기에는 면목이 서지 않았다.
부모님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기 위해 알바를 시작했다.
강수는 복학 후 생활비와 등록금을 조달하기 위해 선배의 소개로 어린이 그림책 일러스트와 교양서적이나 동화책에 삽화를 그렸다. 학부 공부와 창작은 소홀해 질 수밖에 없었다.
학부 시절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강수의 그림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그런 강수에게 일러스트는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강수의 화풍은 사실적인 묘사를 바탕으로 색감이나 톤이 화사하고 세련되고 깔끔해서 동화책과 궁합이 잘 맞았다.
그림책에 들어가는 15장 내외의 그림은 단순한 그림은 일주일, 정밀함을 요구하는 그림이면 보름이면 완성했다. 수정은 몇 장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은 창작하는데 쓸 수 있었다.
하지만 갈수록 일감이 늘어났고, 작품활동보다는 일러스트로 돈 버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무난하게 학부를 졸업하고 기계처럼 일러스트 작업에 매진했다. 알바가 시작이었으나 어느새 일러스트는 전업이 되었고, 일러스트에 전념한 지는 4년 남짓 되었다.
돈을 버는데 시간을 투자한 만큼 창작에 대한 열정은 좀이 먹었고, 다 타고 꺼져가는 모닥불처럼 사그라졌다.
돈을 버는데 혈안이 된 지난 4년은 꿈이 매몰되고, 작가의식이 고목처럼 마르는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창작보다 일러스트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 자신을 인지한 작년부터 강수는 스스로 전업 화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일러스트레이터 이강수.
실력도 검증되었고 학벌도 최고다. 강수가 그린 일러스트 그림책 가운데 중박 이상을 친 그림책도 여러 개 양산했다. 성실하고 재능 있는 작가로 관련 업계에서도 인정하는 편이었다.
지금도 일감이 밀려있는 상태였다.
당장 금요일까지 그림책 한 권을 마감해야 하고, 다음 주 화요일에는 차기작 건으로 해오름출판사 기획팀 윤 대리와 미팅도 잡혀 있다.
경쟁에서 밀리기는 했지만 일러스트 작가로 나름 자리를 잡았으니 낙오하지는 않았다.
출발선에 비하면 꽤나 선전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지난 시간을 반추한 강수는 원래 목표했던 화가의 길과는 영영 멀어진 것 같아 한숨이 나왔다.
‘다 때려치우고 내 작품이나 그릴까? 전세금을 빼서 변두리에 작업실을 얻으면 5년은 버티지 않겠어? 5년 동안 그림을 팔지 못하면 완전히 포기하는 거지.’
과거에도 몇 번씩 일러스트를 그만두고 창작활동을 할까 고민했었다. 하지만 종희와 사귀며 미래를 계획하고 있었던 때라 돈을 벌어야만 했다.
이제 종희는 떠났다.
어쩌면 지금이 작가를 도전해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당장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창작할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잡혀 있는 일감만 마무리 하고, 정말 진지하게 고민 해보자.’
한국의 미술시장은 규모도 작고 환경도 열악하다.
한국에서 전업작가로 살아남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성공?’
성공이란 단어가 너무나 낯설게 느껴진다.
‘호당 얼마를 받으면 성공한 작가일까?’
김우환 화백이 호당 3천만원, 최정자 화백이 2천만원 정도라는 자료를 본 기억이 있다.
개인전 10회 넘게 개최하고, 작품성을 인정받고, 대중적인 인지도를 쌓은 중견작가의 경우 호당 50만원은 받는다. 물론 대중적으로 멀리 알려져 인기 작가 대열에 합류하면 얼마든지 더 받을 수도 있다.
반면 대다수의 무명작가는 호당은커녕 아예 작품이 팔리지도 않는다. 사실 호당 50만원만 받아도 객관적으로 성공이라는 단어를 써도 된다.
작가의 길을 가기로 결정을 내리기도 전이지만 강수는 목표를 호당 50만원으로 잡았다.
목표를 이루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강수는 산에 오르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꽤나 오랫동안 상념에 빠져 있었는지 해가 서쪽 하늘 아래 지평선에 걸려 있었다.
‘아, 벌써 날이 지는구나.’
서두르지 않으면 어두운 밤길을 내려가야 할 것이다. 아무리 익숙한 길이라고 해도 플래시도 챙겨오지 않았기 때문에 밤에 하는 하산은 위험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강수는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미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등산로는 인적이 끊긴 외진 산길처럼 고요했고, 적막이 감돌았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많이 내려가기 위해 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시나브로 주위가 어둠에 잠겨 들었다. 어두운 산길에서 서둘다가 자칫하면 사고를 당한다.
천천히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조급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강수는 걸음을 멈췄다.
문득 하늘을 올려보았다. 밤하늘에 별들이 반짝거리며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거무스름한 하늘에서 흔들리는 별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답게 빛났다.
“아, 신비하다.”
서울에 올라온 뒤로 밤하늘의 별을 볼 일이 없었다.
공해에 찌든 서울의 하늘은 별이 죽은 듯이 숨어 있었고, 밤하늘을 쳐다볼 여유도 없었다.
이렇게 고개를 들어 밤하늘 별을 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양구 시내 학원에서 그림을 그리다 막차를 타고 귀가하는 길에 가끔 밤하늘을 올려다 볼 때가 있었다.
하늘을 빼곡하게 메운 별들은 보석처럼 총총히 빛나서 어떨 때는 머리 위로 와르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별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워짐을 각성하는 순간 가슴에서 거대한 환희가 차 올랐다.
입시에 대한 고민과 걱정,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은 반짝이는 별들이 전부 가져간 것처럼 깨끗이 사라져버렸다.
영롱하게 흔들리는 별빛에 정신을 빼앗기고 한참을 올려보다 고개가 아플 때쯤에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눈보라 치는 차디찬 시대의 굴곡을 살다 산화한 아름다운 시인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을 외우며 마을 길을 걸어서 집으로 갔다.
강수는 대입을 준비하며 고향의 시골길을 걷던 그때처럼 별 헤는 밤 몇 구절을 나직이 외우며 걸음을 떼었다.
*
자날 행성.
자날 행성에는 거대한 하나의 대륙이 육지의 80%를 차지한다. 나머지 20%는 크고 작은 섬으로 대양 곳곳에 흩어져 있다.
육지의 80%를 차지하는 그 대륙을 자날인은 아슐라미 대륙이라 부른다. 이 거대한 대륙의 서쪽 지역에 위치한 제국의 하나인 캬미차야 제국.
캬미차야 제국은 12개 왕국을 통치하는 국가다.
캬미차야 제국의 변방 북서쪽에 위치한 제후국의 하나인 츄나순 왕국.
츄나순 왕국에서도 변방인 츠랴산맥 아래 위치한 인구 10만에 불과한 코탼 영지는 전화의 불길에 짓밟히고 있었다.
코탼 영지는 10여만 명의 캬미차야 제국군에 의해 물샐틈없이 포위되었고, 수만 명의 츄나순 왕국군과 캬미차야 제국군은 3만여 명이 거주하는 코탼성을 포위, 공격하고 있었다.
성을 두르고 있는 너비 20미터에 이르는 해자는 상류에서 둑을 쌓아 물길을 막았고, 20여 곳에 흙과 바위로 해자를 메워 공격로를 만들어 놓았다.
“와아아아아!”
함성이 천지를 뒤흔들고, 처절한 비명과 폭발음이 전장을 뒤흔들었다.
슈슈슉! 슈슈슉!
10여 개의 공성차에서 거대한 바위덩어리가 발사되어 성벽과 성내로 날아갔다.
콰앙, 쿠아앙!
“으아악!”
폭음과 비명이 터지며 성벽 위에서 방어하던 영지의 병사들이 폭발에 휘말려 부서진 돌의 파편과 함께 추락했다.
고작 변방 영지의 작은 성에 불과했지만 코탼성은 견고 했고, 영지군은 용맹했다. 성벽은 몇 군데 손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공성전을 개시한 지 5시간.
공성전은 성을 공격하는 쪽의 피해가 크다.
성벽 아래에는 이미 수천 구의 왕국군과 제국군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
특히 30여 명에 달하는 코탼 영지 마법사들이 왕국군과 제국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성은 진즉에 함락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막대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왕국군과 제국군은 파상적인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비록 영지군의 저항은 거셌지만 전세는 서서히 제국군으로 기울고 있었다. 왕국군과 제국군은 애초에 작은 영지에 불과한 코탼 영지의 병사들이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코탼성에서 200여 미터 떨어진 구릉 위에 전장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30여 미터 높이의 망루가 서 있다.
이 망루는 왕국군과 제국군의 임시 지휘본부였다.
망루에서 10여 명이 전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장대한 체구의 제국군 총사령관 키타뱌는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연신 자신의 옆에 서 있는 황금색 갑주를 입은 사내를 쳐다보았다.
오연한 모습으로 전황을 지켜보고 있는 사내는 황실기사단장 로캬롭퓨였다.
키타뱌는 치미는 울화를 간신히 참고 있었다.
‘쌍놈의 새끼. 구경하려고 기사들을 끌고 왔나. 피해를 좀 입더라도 마법사와 기사단이 출전했으면 벌써 함락시켰겠다.’
그는 속으로 욕을 퍼부을 뿐 무소불위의 권력자이자 소드마스터인 로캬롭퓨에게 함부로 말하지 못했다.
표정 없는 얼굴로 전장을 주시하던 로캬롭퓨가 문득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제 공성전을 끝낼 때가 됐군.”
로캬롭퓨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키타뱌의 귀가 움찔 했다.
“로캬롭퓨 경, 방금 뭐라 하셨소?”
황금빛이 은은히 뿜어 나오는 갑주로 상체만 보호하고 있는 로캬롭퓨의 표정은 감정이 배제된 듯 무심했다.
“제국군의 피해가 생각보다 크군. 기사단이 출전하겠소이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키타바의 얼굴이 빳빳하게 펴졌다.
“드디어 출전한단 말이오?”
“이대로 있다간 날 저물 것 같아서 말이오.”
비아냥대는 말에 다시 울화가 치밀었으나 상대방은 소드마스터였다.
‘개자식. 유세떨긴. 어쨌든 지금이라도 출전을 한다니 다행이군.’
로캬롭퓨가 자신의 뒤에 시립해 있는 수하들에게 명했다.
“내려가자.”
“예.”
갑주를 한 기사 셋과 로브를 입은 마법사 두 명이 망루를 내려가는 로캬롭퓨의 뒤를 뒤따랐다.
지휘본부 아래에는 갑주로 중무장을 한 제국기사단의 하나인 불멸기사단 소속 기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 수는 약 360여 명이었다.
제국기사단은 제국에서 최강의 무력을 갖춘 최정예다.
불멸기사단이 처음부터 전투에 참가했다면 성을 더 빨리 함락시킬 수 있었지만 로캬롭퓨는 위험부담이 큰 공성전에 일부러 수하를 투입하지 않고 때를 기다린 것이다.
영지군의 초반의 기세가 크게 꺾인 지금 참전하면 한 명의 수하도 손실 없이 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다.
로캬롭퓨가 수하들 앞에 섰다.
“오래 기다렸다. 공성전을 끝내자.”
로캬롭퓨는 그의 옆에 선 3명의 대대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제1대는 서문을 열어라. 서문이 열리면 2, 3대는 성안으로 진입해 트미야 신전으로 진격한다. 출격하라.”
“옛. 단장님!”
3명의 대대장이 자신들의 뒤에 도열해 있는 기사들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제1대는 서문을 공략한다. 출전하라!”
“와아아!”
제1대 120여명의 기사들이 대대장을 따라 함성을 지르며 절도 있게 진군을 시작했다.
2대, 3대 대장도 자신의 수하들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제2대는 서문 앞으로 진격한다.”
“제3대, 서문 앞으로 진격.”
"우와아아!"
불멸기사단의 3개 대대, 360여 기사들이 대지를 흔드는 거대한 기세를 내뿜으며 서문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그들이 지나간 곳에는 뿌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