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그림 그리는 마법사 - 5회
선예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 강수오빠네.”
“응, 선예구나. 어디 가니?”
선예는 즉각 대답했다.
“알바 하러요.”
‘알바? 옷차림이 화려한 걸 보니 무슨 행사나 피팅 모델 같은 걸 하나보다.’
선예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강수오빠는 어디 가요?”
“으응. 그냥, 집에 먹을 게 없어서 뭘 좀 먹을까 싶어서.”
“혼자 살수록 술보다는 밥을 잘 챙겨 먹어야죠. 처음 보았을 때보다 살이 좀 빠진 것 같아요. 맛있는 거 먹어야 해요.”
“그래. 알았다.”
갑자기 아까부터 친근하게 구는 선예를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자신을 걱정해서 해주는 말은 고마웠다.
위이잉—
엘리베이터는 고속으로 움직였다. 중간층에서 서지 않고 곧바로 1층까지 논스톱으로 내려갔다.
땡!
-일층입니다.
문이 열리고 강수와 선예는 밖으로 나왔다.
강수와 선예는 자연스럽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아파트 입구로 걸어갔다.
“헤헤. 이렇게 같이 걸어가니까 남들이 보면 신혼부부인줄 알겠다. 그렇죠?”
선예가 엉뚱한 소리를 하며 눈빛을 빛내며 강수를 쳐다보았다.
‘윽! 얘가 무슨 말을···.’
황당한 말에 당황한 강수가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럴 리가? 나이 차이가 몇 인데 시, 신혼부부로 보겠어. 여동생쯤으로 보겠지.”
당황한 표정의 강수를 보면서 선예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호호. 강수오빠는 내가 별로 맘에 들지 않나 봐요.”
선예의 농담에 과잉반응을 했다고 생각한 강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히휴, 이거 대책이 안서는 얘로군.’
두 사람은 곧 입구를 빠져 나왔다.
“강수오빠, 식사 맛있게 하세요. 먼저 갈게요. 또 봐요.”
“어, 그래. 수고해.”
선예는 쾌활하게 작별을 고하고 버스정거장 쪽으로 걸어갔다.
아파트 단지 밖으로 걸어 나온 강수는 뭘 먹을까 고민하다 그나마 인근에서 갈비탕으로 유명한 대로변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점심때가 한참 지난 참이라 손님이 별로 없었고, 마침 창가 자리가 비어 있었다. 창가에 앉은 강수는 갈비탕을 시키고 무심히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토요일 오후여서 그런지 길가에는 봄을 맞아 산뜻하게 차려 입은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
일주일.
저번 토요일 이별통보 문자를 받고 난 후 일주일이 흘렀다. 고작 일주일이 흘렀을 뿐인데 마치 한 달은 지난 것 같았다.
사실 언제부터인가 마음 한구석에서는 종희를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는 분명 커다란 간극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간극은 좁혀지기는커녕 갈수록 벌어지기만 했다.
종희가 가는 길은 평범한 일반인과는 상반된 길이다.
무명이었을 때는 비교적 운신이 자유로웠지만 단역으로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얼굴이 조금씩 알려졌다. 결정적으로 악당검사가 히트하면서 팬 카페까지 생긴 지금은 개인생활에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위안하고 포기하려고 노력했다.
한데 어제 스캔들 기사가 터지고 나서는 가슴이 찢어지듯이 괴로웠다.
스캔들 기사를 읽을 때는 걷잡을 수 없이 분노가 치밀고 배신감으로 몸이 떨렸다. 결국 모든 것을 잊고자 미친 듯이 소주를 들이켰다.
분명히 괴로운 시간이었지만 이제는 종희를 완전히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캔들 기사 때문인지 지금은 어쩐지 마음마저 홀가분해졌다.
뭔가 자포자기를 하고 나니 모든 것을 잊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오히려 지금은 종희가 조금 걱정되었다.
여자 연예인에게 스캔들은 달갑지 않은 사건이나 다름없다. 이제 막 스타덤으로 오르려고 하는 차에 터진 스캔들 기사는 종희에게 좋지 않은 이미지를 줄 것이다.
더구나 상대방은 준재벌의 후손으로 말로만 듣던 금수저가 아닌가?
여론이나 네티즌이 종희에게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을 것은 틀림없었다.
비록 연예인에게 이미지 관리는 필수였지만 기왕에 터진 이번 스캔들을 계기로 두 사람이 더욱 공고한 관계로 발전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강수는 종희가 금수저를 만났으니 정말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랐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는데 갈비탕이 나왔다.
거리에서 시선을 거둔 강수는 천천히 갈비탕을 비웠다.
*
강수가 눈을 떴을 때 방 안은 빛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은근히 머리가 지끈거렸다. 강수는 신경질적으로 몸을 구부렸다.
자신의 모습이 한심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필름이 끊어지지는 않았다.
강수는 어제도 소주를 마셨다.
어제 나름 마음을 정리했다고 여겼으나 실제는 완전히 정리가 되지 않은 것이다.
분명히 머리는 이성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종희의 행복을 빌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일주일 넘게 손을 놓은 탓에 일러스트 마감이 다가왔지만 그림을 그리고 싶은 기분도 들지 않았다.
결국 강수는 갈비탕 집을 나와 하릴없이 거리를 걷다가 해가 떨어진 후에야 친구 종대를 불러 신세한탄을 하며 술을 마셨다.
나중에는 범일이와 동석이도 합류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제처럼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마시지 않고 밤 11시쯤 술집을 나와 아파트로 돌아왔다.
강수는 스마트폰을 집어 시간을 확인했다.
12시 30분이다.
부재중 전화가 3통 와 있었다.
“종대, 동석이, 범일이.”
집에 잘 들어갔는지 안부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강수는 무사히 귀가 했으니 걱정 말라는 문자를 보내고 스마트폰을 이불 위에 던졌다.
침대에서 일어난 강수는 욕실로 향했다.
“어휴, 몸이나 씻자.”
속옷을 벗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잠시 거울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았다.
의기소침한 사내가 거기 있었다.
초라한 몰골이었다. 눈빛은 흐렸고 머리카락은 사방으로 뻗쳤다. 얼굴 피부는 거칠었고 안색은 그늘이 져 있었다.
일주일 넘게 음식은 제대로 먹지 않고, 정신적으로 시달린 탓이다. 게다가 폭음까지 했으니 꼴이 폐인이나 다름없었다.
몸 구석구석 비누칠을 하고 샤워를 하다 욕조에 들어가 뜨거운 물을 받았다. 씻다 보니 아예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고 싶어졌다.
잠시 후 뜨거운 물이 욕조에 가득 찼다.
몸이 노근노근 해지면서 심연에 빨려 들듯이 몽롱해졌다. 온 몸에 쌓인 피로와 열흘 동안 지친 심신이 얼음 녹듯이 사르르 풀리며 어디론가 빠져나갔던 기운이 조금씩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후-- 살 것 같다.’
강수는 한동안 씻지 않아 물에 불은 때를 밀었다.
때까지 밀고 나니 찌뿌둥했던 몸이 정말 개운해졌다. 샤워로 목욕을 마무리한 강수는 다시 거울을 보았다.
기운이 조금이나마 회복된 탓인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외모는 그런대로 괜찮아 보였다.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가고 입술 사이로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후후.”
자조적인 웃음.
그나마 아직 비주얼은 괜찮다.
180의 보기에 괜찮은 키, 이십 대의 탄력이 느껴지는 건강한 근육, 좀 마르긴 했지만 균형 잡힌 몸매와 큰 눈에 우뚝 솟은 콧날, 라인이 뚜렷한 선홍의 입술까지.
분명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는 호감 있게 생긴 외모였다.
‘이렇게 말라서야. 살 좀 찌워야겠다.’
이제 스물여덟이다. 삼십대가 멀지 않았다.
“후후, 이렇게 아저씨가 되어가는군.”
목욕가운을 입고 발코니로 나갔다.
4월 중순.
발코니의 공기는 햇볕에 따뜻하게 덥혀있었다. 겨우내 벌거벗었던 조경수는 다투어 신록을 입었고, 주차장에 서 있는 차들이 성냥갑만 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파란하늘 아래 백운대와 인수봉이 꽤나 가깝게 보였다.
12층에서 바라보는 4월의 전경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시원하게 얼굴을 때리며 밀려들어왔다. 바람은 꽃처럼 피어나는 봄기운을 담아 해맑았다.
지끈거렸던 머리가 괜찮아졌고, 몸에서는 활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기운을 되찾은 강수는 거대한 바위산인 인수봉에 시선을 던졌다.
그 옆에 낮은 봉우리는 백운대다.
‘백운대···.’
산에 오르면 피폐해진 정신도 몸도 조금은 정상으로 돌아올 것 같았다.
“좋아, 백운대에 올라가보자.”
강수는 어제 밤 아파트 입구 편의점에서 사온 식빵을 토스트기에 넣고 달걀을 꺼내 후라이를 했다. 구어 진 식빵 사이에 후라이 한 달걀을 넣고 우유와 간단하게 요기를 했다.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집 밖을 나섰다.
버스를 타고 우이동 입구에서 내렸다.
시간을 보니 벌써 3시 30분이다.
정상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버스정거장에서 등산로까지 상당히 먼 거리였다. 때문에 등산객 대부분은 셔틀버스를 타고 등산로 입구까지 올라간다.
강수도 셔틀버스에 올랐다. 늦은 시각이라 사람이 절반도 타지 않았다.
부아앙!
셔틀버스는 경사진 길을 가뿐하게 오르며 금방 등산로 입구에 도착했다.
포장된 길이 끝나고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 곳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근처에 있는 큰 절로 향했고 등산로 쪽으로 걸어가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3시가 넘어서 그런지 하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배낭도 매지 않고 맨몸으로 등산하는 사람은 자신 밖에 없었다.
‘시간도 늦었는데 빠른 걸음으로 올라가 볼까?’
강수는 천천히 속력을 냈다. 하산객과 나무와 바위가 뒤쪽으로 멀어졌다.
조금 더 속력을 내 걷기 시작했다.
이십 분 정도 지나자 이마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다리도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헉! 헉! 주··· 죽겠다.”
강수는 천천히 속도를 줄여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백운대가 0.5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4시 반쯤이라 하산객은 있어도 등산객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정상까지 가파른 암벽이 이어졌고, 안전을 위해 암석에 쇠봉을 박고 굵은 밧줄로 연결해 놓거나 아예 계단을 설치해놓기도 했다.
이제 곧 정상이다.
강수는 경사진 암벽을 조심조심 올라갔다.
드디어 백운대 정상에 도착했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정상에는 십여 명의 사람이 있었다.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사실 강수는 거짓말 조금 보태 수 십 번 밟은 정상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후 방세가 비교적 싼 수유동 근방에서 살았다. 집에서 백운대는 멀지 않아서 백운대에 오르는 등산은 강수의 운동코스였다.
도로에 인접한 헬스클럽 같은 밀폐된 공간에서 하는 운동보다 맑은 공기를 마시고 자연을 감상할 수 있는 등산을 했다. 항상 간편한 등산복 차림으로 운동 삼아 뛰고, 걷고 하면서 정상까지 올랐다.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콘크리트 건물이 늘어선 길가보다 자연 속을 걷는 것이 좋기도 했다.
강수는 강북구와 상계동이 자리 잡은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작은 건물이나 단독주택도 많았지만 성냥갑처럼 서 있는 아파트가 즐비했다.
강수는 한참 동안 수많은 인간들이 바글거리며 삶을 이어가고 있는 공간을 눈에 담고 있었다.
이 공간을 확장해서 더 멀리 나가면 천만 명이 넘는 인간이 삶을 영유하고 있는 거대한 도시 서울이다.
‘영광과 번영, 출세와 성공의 꿈을 꿀 수 있는 도시. 하지만 욕망의 도가니이자 온갖 오욕으로 점철된 도시···.’
강수가 접한 서울은 따뜻한 인간미가 상실된 비정한 도시였다.
이 도시는 가진 자들에게는 천국이고, 타인과의 경쟁에서 앞서나간 중산층 시민에겐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는 도시이고, 경쟁에서 밀린 대다수의 서민에겐 삶의 무게에 짓눌려 허덕이며 생존해야 하는 만만치 않은 도시다.
문득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대다수의 인간은 왜 아등바등 살아가야 하는 걸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존재 의의는 무엇일까?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존재하는 존재인가?
생존하기 위해 공부하고, 성공하기 위해 일류대에 진학하고, 일류기업에 취직하고,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 하는 존재인가?
영원한 우주의 시간으로 보면 인간이 영위하는 삶이란 찰나에 불과할 뿐인데 어째서 그 찰나의 순간조차도 기쁨과 행복을 누리기보다는 생존하기 위해 경쟁하고 또 발버둥 쳐야 하는가?
만물의 영장인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과 삶을 바라는 것이 과분한 요구인가?
현실은 '그렇다.'라고 한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생존법칙을 충실하게 따르라고 한다.
경쟁자를 물리치고 가장 앞에서 위로 올라가라고 한다. 그러면 성공하여 명예와 부를 얻어 행복을 쟁취할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출발선에서 스타트해야 하는데 말이다.
누구는 출발선에서 뛰기 시작하고, 누구는 100km 앞에서 뛴다. 그래서 부모를 잘 둔 것이 실력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정신상태가 시궁창보다 더럽고 썩은 냄새 나는 여자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말한 여자의 발언은 수많은 부모의 가슴을 찢어발기고, 어린 학생을 좌절하게 만들었다. 급기야 그 발언은 엄청난 사회적인 공분을 일으켰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말한 여자보다 그런 사고방식을 할 수 있게 만든 한국사회도 책임이 없지는 않다.
황당하고, 억울하고 헛웃음이 나왔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후후, 우리 사회의 현실이지. 금수저로 태어나면 경쟁? 출발선? 다 의미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