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그림 그리는 마법사 - 4회
경찰이 왜 방문했는지 짐작은 갔지만 무작정 둘을 집안으로 들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용건을 물었다.
“무슨 일이죠?”
30대의 경찰이 대답했다.
“집안에서 비명이 계속 들린다는 주민의 신고를 받았습니다. 실내를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짐작이 맞았다.
원인을 제공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강수는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아무도 없어요. 혼자 있습니다. 안 좋은 일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흥분을 한 모양입니다.”
“그렇습니까? 신고가 들어왔으니 일단 살펴보죠. 실례하겠습니다.”
경찰 장도윤과 진현기는 실내로 들어갔다.
실내는 어수선했다.
식탁에는 잡다한 물건이 올려져 있었고, 거실은 커다란 책상과 컴퓨터, 이젤, 수납공간에는 화구가 가득 차지하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친구군.’
경찰 장도윤은 거실을 살피며 발코니로 나갔다.
발코니는 세탁기와 빨래통에 세탁물이 담겨 있었다.
부엌과 거실, 발코니에서는 이상한 흔적이 보이지 않았고, 피 냄새나 소독약 냄새 같은 의심스러운 점도 없었다.
단지 눈에 띄는 점이라면 거실에 있는 크고 작은 두 개의 액자가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액자의 사진을 보여주기 싫은 것이다.
도윤이 지나가는 듯이 가볍게 물었다.
“액자가 뒤집어져 있군요?”
강수가 얼굴을 찡그렸다. 강수가 불쾌하다는 듯이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액자에 있는 개인적인 사진을 보여줘야 합니까?”
강수의 격한 반응을 살핀 도윤이 빙긋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지금은 굳이 보여 주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도윤은 액자가 왜 뒤집어져 있는지 대충 속으로 짐작했다.
‘여자와 헤어진 모양이군. 입에서 술 냄새가 나는 걸 보면 어제 술을 퍼 마시고 이제야 일어났어. 그리고 울분에 못 이겨 난리를 친 거겠지.’
여자는 남자에게 영원한 딜레마다.
멀쩡한 인간이 여자로 인해 정신이 회까닥 돌아버리는 경우는 숱하게 보아오지 않았던가.
‘참나, 여자란··· 없으면 불편하고 있으면 골칫덩어리라니까.’
도윤은 내심 여자란 존재에 대해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도윤은 강수의 구겨진 얼굴을 힐끗 쳐다보고 침실을 가리켰다.
“침실을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죠.”
침실은 단순했다.
창문 옆에는 침대가 놓여 있고 한쪽 벽면은 옷장 대신 두 칸, 이단 옷걸이에 옷이 걸려 있었다.
밖으로 나와 화장실을 살핀 도윤은 마지막으로 작은방 앞에 섰다. 강수가 알아서 문을 열어주었다.
작은방은 책장과 캔버스가 한 쪽 벽에 기대어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군요?”
“예. 일러스트레이터입니다.”
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앞으로는 이웃이 불안해하는 행동은 삼가주기를 부탁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강수는 확고한 목소리로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근데 누가 신고를 했나?’
사실 누가 신고를 했든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다. 당연히 신고를 해주는 것이 정상이다.
실제로 강도의 습격을 받아 비명을 질렀는데 아무도 신고하지 않으면 얼마나 비정한 이웃일까?
사실 아파트라는 공동생활공간은 이웃과 안면을 트지 않는 이상 고립된 섬에서 생활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타인의 간섭을 싫어한다면 아파트만큼 좋은 공간도 없으리라.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강수는 밖으로 나간 두 경찰이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아래층으로 걸어 내려가는 모습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이유가 있으려니 생각하고 현관문을 닫으려는 강수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위층 계단에서 놀란 눈으로 아래를 내려 보고 있는 한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응? 선예?”
얼마 전 위층에 이사 온 20대 초반의 선예였다.
선예가 먼저 말을 걸어와 통성명을 했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몇 번 만나 인사를 나눈 사이였다. 선예는 하얀 티에 분홍색 카디건을 걸쳤고, 헐렁해서 편해 보이는 바지를 입고 있었다.
눈인사를 하고 문을 닫으려는데 선예가 황급하게 불렀다.
“강수오빠, 잠깐만요.”
자신에게 볼 일이 있나 싶어 선예를 바라보았다. 계단을 내려온 선예가 현관 안으로 들어왔다.
너무 갑자기 들이 닥쳐서 막을 틈이 없었다.
선예가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강수오빠, 경찰이 왜 다녀간 거예요? 아까 비명소리가 엄청 났었는데 오빠한테 무슨 일 있었어요?”
자신의 동의도 없이 집안에 발을 들여 논 상식을 벗어난 선예의 돌발적인 행동에 당황한 강수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같은 라인에 사는 여자애라 몇 번 안부 인사를 하기는 했지만 무턱대고 집으로 들일 사이는 아니었다.
강수의 난처한 기색을 느꼈는지 선예가 미안하다는 얼굴로 허리를 몇 번이고 숙이면서 사죄를 했다.
“어머, 허락도 없이 오빠 집에 함부로 들어왔군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알았으면 그만 나가 줄래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강수의 성격상 여성에게 매정하게 굴지 못했다.
“아냐, 뭐, 그럴 수도 있지.”
강수가 부드럽게 말하자 선예는 맑고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이해해 주어서 고마워요. 참, 오빠, 좀 전에 비명소리가 엄청 크게 났어요. 난 무슨 살인이라도 벌어진 것 같아서 무서웠거든요. 오빠도 들었죠?”
살인이라는 단어에 속으로 쓴웃음을 삼킨 강수는 너무 창피해서 자신이 지른 비명이라고 실토할 수가 없었다.
“으응, 그게 누가 화가 나서 고함을 지른 모양이야. 설마 대낮에 무슨 살인강도 같은 일이 일어나겠어?”
“그런 가요? 참, 오빠. 초면도 아닌데 이웃사촌 여동생한테 차 한 잔 대접하지 않을 거예요?”
“어?”
‘아니, 혼자 사는 남자 집에 무슨 생각으로 들어와 차를 얻어 마시려는 거지? 이 아이는 넉살이 좋은 거야 아니면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거야?’
속으로 의아함을 금치 못했지만 입에서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차라고 해 봐야 녹차나 봉지커피 밖에 없는데 그거라도 한 잔 마시겠니?”
“헤헤, 좋아요. 커피 한 잔 주세요.”
고무공처럼 통통 튀는 선예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 가지 않았지만 별 수 없이 부엌으로 안내했다. 강수는 커피포트에 생수를 붓고 전원을 켰다.
“참, 경찰이 오빠 집에 왜 다녀간 거예요?”
아까 질문했을 때 말하기 궁해서 대답하지 않았었다. 게다가 이미 거짓말을 했으니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어 대충 둘러댔다.
“그냥, 비명이 어디서 났는지 잘 모르니까 이 집 저 집 살펴보고 있었대.”
“아항, 그렇구나.”
강수는 봉지커피를 타서 선예에게 주었다.
“잘 마실게요.”
뜨거운 커피 잔을 양 손으로 감싸서 한 모금 마신 선예가 질문을 해왔다.
“강수오빠는 출퇴근을 안 하는 거 같은데 혹시 프리랜서에요?”
“응. 맞아.”
“어머, 프리랜서면 직장생활 안 해서 좋겠다. 제 주변에는 직장생활이 지겹다고 때려치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은데 말이죠.”
“글쎄. 꼭 좋다고만 할 순 없지 않나? 각각 장단점이 있으니까.”
“그런가요? 어떤 면에서요?”
강수는 갑자기 등장한 이 여자애와 어째서 직업 얘기를 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아마도 선예가 예쁘기도 하거니와 생김새와는 다르게 털털하게 굴어서 그럴 것이다.
“직장생활이 힘들긴 하겠지만 적성에 맞으면 안정적이고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지. 반면 프리랜서는 이런저런 것에 얽매이지 않고 시간은 비교적 자유롭지만 일이 없으면 생활이 되지 않으니까 안정적이지 않거든.”
선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럼 오빠는 무슨 일을 해요?”
쩝!
확실히 눈앞의 여자애는 좋게 말하면 붙임성이 좋고 격의 없는 반면 나쁘게 말하면 철이 없고 타인의 처지는 헤아리지 못하고 밑도 끝도 없이 자존감만 드높다고 해야 할까?
시쳇말로 미모가 권력이고 깡패라고 해도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어쨌든 강수는 말괄량이 같은 선예의 언행이 다소 난감하긴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림을 그려.”
“어, 화가세요?”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림을 그린다고 하면 화가를 첫 번째로 꼽는다.
“화가는 아니고 일러스트레이터야. 어린이 그림책이나 아동용 그림을 주로 그리지.”
“아항, 그렇구나. 나도 그림 되게 좋아해요. 오빠 그림 구경 좀 하면 안 돼요?”
그림 보여주는 것이야 돈 드는 일도 아니고 수고스러운 일도 아니다. 다만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선뜻 허락하기가 꺼려질 뿐이다.
두 손을 모으고 눈빛을 반짝이고 있는 선예의 호기심으로 가득한 앙증맞은 표정은 강수의 꺼림직함을 깔끔하게 날려버렸다.
강수는 선예를 작은방으로 안내했다.
책장에 꽂혀 있는 그림책을 뽑아 보며 선예가 탄성을 질렀다.
“우와! 굉장하다. 어쩜 이렇게 섬세하게 잘 그릴 수가 있어요?”
12권으로 기획된 “그림으로 보는 생활과학이야기” 시리즈물을 훑어보며 사진처럼 정교한 그림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 시리즈물에서 내가 그린 책은 여섯 권이야.”
“여섯 권이나 그렸어요? 이렇게 그리려면 정말 고생했겠어요.”
사진처럼 사실적으로 그리는 재주가 강수의 재능이었다. 시간이 좀 걸렸을 뿐 별로 고생하지 않았다.
강수가 워낙 정밀묘사를 잘했기 때문에 동물학습물, 곤충학습물, 과학학습물 같은 교육용 시리즈를 다수 그렸다.
“그림책도 많네요.”
선예는 강수가 그린 수십 권의 동화책 가운데 몇 권을 뽑아 펼쳤다.
“아이, 귀여워라. 이런 그림책은 애들이 정말 좋아하겠어요.”
“그럴까?”
“그럼요. 이 남자 아이랑 여자 아이는 인형으로 만들어도 인기가 많을 껄요.”
선예는 강수가 그린 오누이라는 그림책을 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강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일반인이 보면 옷감의 질감과 무늬까지도 세밀하게 묘사한 잘 그린 그림이다.
하지만 동료작가나 회화를 평론하는 전문가의 관점에서 보면 평가가 달라진다. 교수나 선배들은 강수의 그림을 조형적인 밀도가 엉성하고, 현란한 테크닉만 돋보이는 그림이라고 평가했다.
조형성의 부재는 강수가 항상 지적당하는 내용이었다.
작가를 지향하는 기준으로 볼 때 캔버스에서 표현되는 조형성의 차이는 실로 천지양차이며 강수가 화가를 포기한 이유이기도 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참이지?’
강수가 불편해 하는 낌새를 느꼈는지 선예가 보고 있던 그림책을 책장에 꽂았다.
“나머지는 다음에 봐도 되죠?”
“으응. 뭐, 상관없겠지.”
“헤헤. 제가 강수오빠의 시간을 많이 뺏은 것 같아요. 미안해요.”
부엌으로 통통 튕기듯이 걸어간 선예가 겉옷을 집었다.
“그림 잘 보고 커피도 잘 마셨어요. 오늘은 오빠가 커피를 대접했으니까 다음엔 제가 대접할게요.”
대접을 해도 되고 인사치레로 하는 멘트여도 상관없었다.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강수는 빙긋 웃기만 했다.
선예는 건강 잘 챙기라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남겨 놓고 돌아갔다.
‘대체 이 여자는 뭐 하는 얘야?’
현관문을 닫으며 강수는 구미호 같은 여시에게 홀린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경찰과 선예의 방문으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조금 움직였다고 속이 쓰리고 허기가 졌다.
‘먹을 만한 것이 있나?’
냉장고 문을 열었다.
360리터짜리 냉장고였지만 안에는 어머니가 보내준 김치와 밑반찬 몇 가지. 치즈, 계란 몇 알, 양념류 외에 거의 비어있었다.
‘라면이나 끓여먹을까?’
찬장 문을 열어 라면을 꺼낸 강수는 속에서 쓴 물이 올라오는 것 같아 고개를 저었다.
‘안되겠다. 밖에 나가 해장할 만한 거라도 사먹어야겠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대충 새 옷으로 갈아입은 강수는 현관문을 열고 나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띵!
잠시 후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울리고 문이 열렸다.
“어?”
안으로 들어가려던 강수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어야 했다.
안에는 옅은 화장에 달콤한 향수 냄새를 풍기는 여성이 푸른색 계열의 반코트를 입고 핸드백을 메고 있었다.
코트 안에는 무릎까지 오는 주황색 톤의 정장 원피스를 입엇고, 살색 스타킹에 하이힐을 신었다.
눈이 번쩍 떠지는 미모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부엌에서 수다를 떨었던 선예였다.
일상복을 입은 어리고 발랄한 모습과는 다르게 뭔가 성숙한 분위기를 풍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