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그림 그리는 마법사 - 3회
공원에서 정신 없이 길가로 뛰어나온 강수는 택시를 타고 종희의 아파트로 찾아갔다.
악당검사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후라 스캔들이 날 수도 있어서 종희의 집에 가면 안 되지만 이대로 끝낼 수가 없었다. 얼굴이라도 보고 무엇 때문에 헤어지려고 하는지 진심을 알고 싶었다.
택시에서 내린 강수는 종희의 아파트로 뛰어 올라가 초인종을 눌렀다. 몇 번을 눌러도 안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집에 없는 건가?’
실망한 강수는 벽에 등을 기대고 현관문 앞에 앉았다.
‘오늘 중으로 돌아오겠지. 기다리자.’
한 시간, 또 한 시간이 흘렀다.
아직은 추운 날씨라 햇빛조차 들지 않는 복도는 기온이 상당히 낮았다. 손발이 차갑게 얼었다. 하지만 얼굴이라도 보겠다는 일념으로 자리를 지켰다.
복도식 아파트라 간혹 주민이 오가며 강수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살피곤 했다.
강수는 주민의 시선 따위 개의치 않았다.
해가 지고 점차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 햇볕에 탄 검은 얼굴에 주름이 자잘한 마른 체격의 70세 전후로 보이는 경비가 다가왔다.
“젊은이, 왜 복도에서 서성이는 게야? 주민이 불안해하잖아.”
강수가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902호 찾아왔습니다. 사람이 없어서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강수의 단정한 모습과 깍듯이 하는 인사에 경비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타일렀다.
“날도 추운데 왜 복도에 있어?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면 되잖아. 가만, 902호? 여긴 빈집인데?”
“그게 무슨 말씀이죠? 분명히 여자 혼자 살고 있을 건데요.”
“아, 그 예쁘장한 아가씨 말인가? 그 아가씨 이사 간지 아마 서너 주쯤 됐지?”
“예? 이사했다구요?”
“몰랐구만. 빈집 앞에서 밤새고 앉아 있어봐야 헛일이니까 그만 내려가세.”
‘말도 없이 이사를 갔다고? 정말일까?’
강수의 가슴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아니야, 할아버지가 잘못 알고 있을지도 몰라.’
강수는 902호 현관문을 주먹으로 두들겼다.
꽝! 꽝!
“종희야, 나 강수야. 안에 있으면 문 좀 열어 볼래. 나 강수라고.”
몇 번을 고함쳤지만 안에서는 여전히 인기척이 없었다.
경비 할아버지가 혀를 찼다.
“쯧쯧. 이봐, 젊은이. 그런다고 이사 간 사람이 돌아오는가? 계속 이러면 곤란해. 그만 진정하고 내려가세.”
경비 할아버지가 강수의 팔을 잡고 엘리베이터 홀로 끌었다.
강수는 할아버지에게 이끌려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에 탄 강수가 경비의 손을 잡고 물었다.
“할아버지, 902호에 사는 여자 분이 정말로 이사 갔나요?”
경비는 추위에 얼어 있는 강수의 얼굴을 안쓰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정확한 날자는 기억 안 나도 예쁘장한 아가씨가 이사 간 건 맞아. 근래 통 보지를 못했으니까. 얼굴을 보니 안 믿기는 모양인데 일지를 보고 확인해 주마. 따라와.”
경비는 강수를 데리고 경비실 안으로 들어가 일지를 뒤적였다.
“어디 보자··· 옳지, 여깃군.”
경비가 찾아준 일지에는 3동 902호 전출이라고 적혀 있었다. 부정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사실이었다.
“맞지? 3동 902호.”
“예··· 맞네요.”
강수는 힘없이 대답하고 밖으로 향했다.
경비 할아버지가 강수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이봐, 마음이 떠난 여자는 돌아오지 않아. 사내가 그런 일로 기 죽지 말고 기운 내.”
“아,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거리는 어느새 어두워져서 가로등이 밝혀져 있었다. 생기가 죽어버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본 강수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지하철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갈증에 눈을 뜬 강수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지끈거렸다.
누구와 싸우기라도 한 것처럼 허벅지와 옆구리, 팔, 등판 등 전신의 근육이 욱신거렸고, 목은 칼칼하고 메말랐다. 마른 침을 삼켰다. 모래를 삼키는 것처럼 목이 아팠다.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고, 기운이 전부 빠져나간 것처럼 기운이 없었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으, 머리야. 한데 왜 이렇게 몸이 아픈 거지?’
강수는 여기저기서 욱신거리는 몸을 끌고 부엌으로 나가 식탁 위에 놓인 생수병을 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탁!
생수병을 탁자 위에 거칠게 내려놓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탁자 위 벽에 걸인 시계는 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다.
‘어떻게 집에 왔지?’
종희의 이별통보를 받은 지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강수는 지난 일주일 내내 마음이 혼란하고 어지러워 일러스트 작업도 하지 못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종희 친구인 선화, 나경, 해순 등에게 전화를 해서 연락처나 이사 간 곳을 물어도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어제도 답답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종희의 아파트였다. 경비 할아버지를 피해 아파트로 올라가 현관문 앞에서 종희를 기다렸다. 종희는 오지 않았고, 경비 할아버지에게 욕을 얻어먹으며 쫓겨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스마트폰으로 종희의 근황을 검색하던 중 스캔들 기사를 보았다.
바로 종희의 스캔들이었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를 어제는 미친놈처럼 입으로 쏟아 부었다. 얼마나 마셨는지 필름이 끊어졌고,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원래 주량이 세지 않아 술은 잘 마시지 않았고, 술자리가 있어도 취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하게 마셨다. 한데 어제는 지랄 같은 세상,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폭음을 한 것이다.
종희가 떠오르자 가슴이 아려왔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서, 모든 것을 잊고 싶어서 술을 그렇게 마셨건만 눈을 뜨니 어제의 고통과 절망이 몰려들었다.
강수는 심호흡을 크게 했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덜 아프구나.’
강수는 자신을 떠난 종희를 탓할 수가 없었다.
종희는 스물여섯이다.
5년 전, 군을 제대한 강수는 3학년에 복학했다.
친구의 부탁으로 연극동아리의 팜플렛에 삽화를 그려주기 위해서 연극동아리 부원인 종희를 만났다. 그 후로 종희와 몇 번 만나면서 좀 더 가까워 질 수 있었고 연인으로 발전했다.
종희는 연극동아리에서 활동 하면서 알바로 피팅 모델, 영화나 드라마의 엑스트라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졸업을 앞둔 4학년이 된 후에는 진로를 연예계로 바꿔 틈틈이 연기학원을 다녔다. 종희는 자신에게 부족한 연기력을 채우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졸업하고 난 후에는 부족한 연기를 배우겠다고 연극판에 진출했고, 작은 극단에 들어가 아예 대학로에서 살다시피 했다.
극단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단역으로 거의 1년이나 보냈다.
알바도 쉬지 않았다.
틈만 나면 드라마나 단막극에 얼굴을 비췄다. 그리고 작년에는 악당검사를 연출하게 된 양천익 PD의 눈에 띄어 오디션에 참여했고 캐스팅되었다.
종희는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악당검사에서 주인공인 검사와 각을 세우는 변호사의 내연녀 역으로 출연했다.
원래는 극 내 비중이 적은 단역이었지만 개념과 지조 있는 악녀로 시청자들의 인기를 얻으면서 출연 분량이 많아지고 조연급까지 역할이 커진 것이다.
종희는 미니시리즈 한 편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생각보다 빠른 성공이었다.
설희라는 예명을 쓰는 종희는 이제 이름을 대면 알만한 연예인이 되었다.
그리고 종희로부터 이별통보를 받고 일주일이 지난 어제는 종희의 스캔들이 터진 것이다.
종희의 상대 남자는 전인규라는 자였다.
전인규는 20여 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 준재벌이라고 할 수 있는 유성그룹의 셋째 아들이자 유성홈쇼핑의 전무라고 했다.
‘그런 새끼가 유혹을 했으니 종희도 어쩔 수 없었겠지. 재벌가에 입성할 수 있는데 평범한 그림쟁이를 고집할 이유가 없으니까. 지금까지 나와 사귀어주었으니 고맙다고나 해야 할까?’
전인규라는 놈이 종희를 유혹했는지 아니면 종희가 전인규란 작자를 유혹했는지 그도 아니면 자연스럽게 만나서 눈이 맞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강수는 자기 편한 대로 생각했다.
상념에 빠져서 종희를 뺏어간 전인규를 떠올리자 가슴이 욱신거리고 분노가 스멀스멀 피어 올랐다.
끝내 종희를 지키지 못한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스스로에 대해 모멸감이 끓어 올랐다.
강수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꽝!
급기야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으아, 씨발! 좆같은 세상! 전무새끼처럼 돈은 썩어나지 않지만 나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 돈이 행복의 전부는 아니잖아. 빌어먹을!”
종희에게 맞는 생활수준을 꾸리기 위해 복학한 이후 죽어라 그림을 그렸다. 동화책, 삽화, 벽화 등 돈이 되는 알바는 닥치는 대로 했다. 그래서 마련한 것이 비록 부모님이 보태주고 융자가 절반이 넘었지만 지금의 22평 전세아파트였다.
“크흐흐.”
강수는 머리를 부여잡고 흐느끼며 몸부림을 치다 바닥으로 엎어졌다.
쿵!
이마가 방바닥에 부딪쳐 골이 흔들렸다. 가슴 깊은 곳에서 고통과 분노가 활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강수는 바닥에 널브러졌다.
“크아아아아!”
강수는 목이 찢어져라 울부짖었다.
금수저 새끼를 만나 행복하게 살게 되었으니 잘 됐다고 자기 암시를 수없이 걸었어도 심장이 쑤시고 영혼이 불타버릴 것처럼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배출할 곳이 없어 가슴 속에 차곡차곡 쌓인 쓰디쓴 아픔과 울분과 절망과 자학이 비명과 함께 분출되었다.
응어리진 온갖 저주스런 감정의 덩어리가 전부 빠져나올 때까지 강수의 입에서는 지독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속에서 울분과 분노가 빠져나갈 때까지 원 없이 고함을 질렀다.
고함을 질렀을 뿐인데 전신에서 기운이란 기운은 전부 빠져나간 듯이 녹초가 되었다. 기운이 빠진 강수는 바닥에 대자로 누워있었다.
마음속의 응어리를 마음껏 쏟아내고 나자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속이 후련해졌다.
바닥에 누워 개운해진 기분을 음미했다.
‘후후. 이걸로 된 거야. 종희 때문에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말자. 종희도 그걸 바라고 있겠지.’
강수는 이젠 됐다고 생각했다.
종희에게는 종희가 가야 할 길이 있다. 그 길은 자신이 가는 길과는 정반대의 길이다.
자신은 종희의 곁에 설 수 없는 남자인 것이다.
숙취 때문인지 전신이 나른해지고 현기증처럼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눈을 감자 이번에는 몸이 돌며 아래로 서서히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의외로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종희가 연예인 쪽으로 진로를 바꿨을 때부터 고민해 왔고, 지난 일주일간 충분히 아팠다.
어제는 스캔들 기사를 읽고 배반감으로 분노했으나 울분을 토해내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니 이젠 마음에 고요와 평화가 찾아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동. ···딩동.”
어디선가 아련하게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종희에 대한 감정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있는 강수는 바닥에 웅크리고 꼼짝하지 않았다.
“딩동, 딩동.”
초인종 소리가 좀 더 또렷하게 들렸다.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자신의 집 초인종이었다.
‘누구지?’
강수는 꾸역꾸역 몸을 일으켰다.
꽝! 꽝! 꽝!
급기야 주먹으로 현관문을 치는 소리가 났다.
“경찰입니다. 신고 받고 왔습니다. 문 좀 열어주시죠.”
‘경찰이 무슨 일로? 아, 신고라고?’
순간적으로 의아했던 강수는 곧 상황파악을 할 수 있었다.
‘고함을 질러서 신고가 들어간 모양이구나.’
“잠시 만요.”
얼마나 고함을 질렀는지 탁하고 갈라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현관문을 여니 제복을 입은 건장한 체격의 30대와 20대로 보이는 사내 두 명이 서 있었다.
30대로 보이는 사내는 눈매는 날카로웠지만 평범한 인상이었고, 20대 후반의 사내는 운동을 했는지 체격이 건장한 준수한 청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