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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는 마법사-2화 (2/197)

# 2

그림 그리는 마법사 - 2회

악당검사가 실패할 것이라고 소문이 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검증되지 않은 신인 작가 김생운의 작품이라는 점이고, 두 번째는 스타 배우 캐스팅에 실패였다. 세 번째는 캐스팅의 여파라고 볼 수 있겠지만 제작비의 저예산과 그로 인해 캐스팅한 주, 조연 배우가 대부분 신인이란 점이었다.

스타 배우 섭외에 어려움을 겪은 이유가 주인공이 사회 정의를 위해 도술을 사용하고, 불법적인 행위도 마다하지 않고 어둠의 길을 걷는다는 파격적인 내용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주로 신인 배우를 기용한 악당검사는 아이러니하게도 3명의 주연배우는 물론이고, 몇몇 조연까지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며 스타로 발돋음했다.

악당검사에서 단역으로 출연한 강수의 여자친구 민종희도 깜짝 스타가 되었다. 민종희는 설희라는 예명을 사용하고 있다.

극의 초반에는 주인공과 각을 세우는 변호사의 내연녀인 악녀 역이었으나 인상적인 연기로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점차 비중이 높아졌다. 단역에 불과한 변호사 내연녀 캐릭터는 극의 중반에는 비중 있는 조연으로 성장하며 드라마의 주요 인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며 인기를 얻었다.

강수는 작년 송년회가 떠올랐다.

친구들은 종희가 뜨면 연애전선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빨리 동거나 결혼하라고 경고했다. 강수는 웃으며 받아 넘겼지만 친구들이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닥친 것이다.

‘으아, 모르겠다.’

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강수는 아파트를 향해 빠르게 걸었다.

단지의 후문으로 들어간 강수는 자신의 집이 있는 5동으로 향했다.

5동 3호라인 입구로 걸어가던 강수는 맞은편에서 꽤 큰 캐리어를 끌고 오는 20대 초반의 여자애를 볼 수 있었다. 청바지에 자주색 패딩을 입었는데 등에는 백팩을 맨 것이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해외여행 갔다 오나? 짐이 많구나.’

마침 여자도 강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에 살짝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으흠, 상당히 귀여운 여자인데?’

강수는 여자애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5동 입구 계단을 올라갔다.

강수와 마주친 여성은 5동에 산다는 친척집에 가는 선예였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강수는 캐리어만 보고 해외여행을 갔다 온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들들들들.

바퀴가 바닥을 구르는 요란한 소리에 동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려던 강수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잠시만요, 같이 가요.”

여자애가 허겁지겁 달려오더니 계단에서 낑낑대며 캐리어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허, 경사 길로 오면 될 텐데 성질 참 급하구나.’

“도와줄까요?”

“후우, 그, 그럼 감사하죠.”

강수가 얼른 계단으로 내려가 캐리어를 올려주었다.

“감사합니다.”

선예가 활짝 미소를 지으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강수는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누르며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해외여행 갔다 오나 봐요?”

“에에. 그게 아니고요, 당분간 작은 아버지 댁에서 신세 좀 지러 왔어요.”

“아, 그렇군요.”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갔다.

“저, 오빠는 여기 사는 거죠?”

“오, 오빠요?”

“헤헤. 나보다 몇 살 많은 거 같은데 그럼 오빠죠. 왜요? 아저씨라고 불러줘요.”

20대 초반의 여자애가 오빠라고 해주는데 기분 나쁠 리가 없었다.

“하하. 물론 아저씨보다야 오빠가 듣기 좋죠. 난 12층에 살아요.”

강수는 대답하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7층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작은 소음을 내며 내려오기 시작했다.

선예가 꾸밈없는 표정으로 밝게 웃었다.

“히히, 이 동네는 처음이라 아는 사람도 없고, 친구도 없어서 삭막하게 지낼 줄 알았는데 멋있는 이웃사촌 오빠가 생겼네요. 우리 통성명해요. 난 오선예예요.”

선예가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강수가 중산아파트에 이사 온지 2달이 넘었고, 같은 라인에 사는 아저씨, 아주머니, 남학생, 여학생, 꼬마아이들, 꼬부랑 할아버지 등 여러 사람을 보았지만 통성명해 본 적은 없었다.

기껏해야 목례를 하거나 안녕하세요가 전부였다. 그것은 빌라에서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뭔가 접점이 없으면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시골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고등학교까지 살아온 강수에게는 엄청 낯설고 생소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홍우대에 합격해서 서울에 올라 온 후, 주로 대학교 근처에서 자취하며 생활했던 관계로 서울 생활에 적응하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서로에게 무관심한 이웃이 편하기도 했다. 자취방에 오면 완벽하게 외부와 차단된 자신만의 공간에서 누구의 간섭 없이 편히 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대학생으로 보이는 예쁘장한 여자애가 먼저 이름을 밝히고 통성명을 하자며 악수를 청해 왔다.

강수는 특이한 여자애라는 생각을 하며 악수를 했다.

선예의 작고 하얀 손은 부드러웠는데 날이 서늘한 탓에 약간 차가웠다.

“난 이강수라고 합니다.”

“푸훗.”

선예가 강수의 손을 잡고 흔들며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오빠 말 놔도 되요. 존대말 하니까 내가 불편해요.”

“그, 그럴까?”

땡!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강수는 12층을 눌렀고, 선예는 14층을 눌렀다.

위이잉!

기계가 작동하는 소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위로 솟구쳤다.

좁은 공간에서 마땅히 시선을 둘 곳이 없어 강수는 변하는 디지털 숫자를 보았다. 문득 강수는 선예의 눈길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선예가 싱긋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까 강수오빠 꽤 미남인데요.”

“뭐?”

면전에서 대놓고 칭찬을 하자 머쓱해졌다.

땡!

-12층입니다.

마침 안내 멘트와 함께 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가는 강수에게 선예가 팔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강수오빠, 다음에 또 봐요.”

“그래.”

강수는 선예의 모습이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틈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요즘 저렇게 붙임성이 좋은 여자애도 있나?’

강수는 실소를 지으며 현관문을 열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

2020년 4월 4일 토요일.

추위가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봄의 문턱을 넘어선 싱그러운 4월이다.

강북 장위동에 위치한 북서울 꿈의 숲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있는 꽤 큰 공원.

이강수가 나무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서 부드럽고 따사로운 봄 햇볕을 쬐고 있었다.

핏이 살아있는 네이비 색 슈트를 입었고, 갈색 구두를 신었다. 훤칠한 체격에 키는 180 정도였고,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넘겨서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

흑백이 뚜렷한 깨끗한 눈, 오뚝한 코와 붉은 입술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누가 봐도 호감을 느낄만한 훈남이었다.

강수는 겨울 내 죽은 듯 말라 비틀어진 나뭇가지에서 피어나고 있는 산뜻한 초록색의 신록을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계절은 변함없이 장구한 세월 동안 끝없이 순환해 왔다. 백설 같은 눈과 살을 에는 차가운 칼바람을 몰고 왔던 그 계절의 끝.

자연은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고 어김없이 생명의 싹을 피워냈다.

문득 강수는 안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보았다.

3시 30분.

약속시간은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오늘따라 늦는구나.’

작년 12월, 수목 미니시리즈 악당검사의 촬영을 시작하기 직전에 만난 이후 몇 개월 만에 만나는 것이었다.

‘아, 갈수록 격차가 벌어지는구나.’

강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만나지는 못했어도 그나마 카톡으로 소식을 주고받았으나 올해 1월 중순부터 방송을 탄 악당검사의 시청률이 치솟고 종희의 인기가 덩달아 오르면서 카톡마저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악당검사는 20회를 마지막으로 올 3월에 종영했다.

그전까지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어쨌든 한 달에 두 번은 만났으나 급기야 오늘 만남은 거의 3달 만이었다.

우우웅!

스마트폰이 부르르 떨었다.

강수는 종희가 보낸 문자임을 직감했다.

얼른 문자를 열었다.

-오빠, 미안해요. 오늘 만날 수 없을 것 같아요.

‘아, 오늘도 못 만나면···.’

강수는 한숨을 내쉬며 답장을 보냈다.

-드라마 때문에 바쁜가보구나? 오늘은 보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뭐. 그래도 TV로 볼 수 있으니까.

종희는 악당검사 이후 각종 프로그램에서 출연요청이 쇄도함은 물론이고 차기작과 광고 섭외도 들어와 정신없이 바쁘다고 했다.

-으응, 드라마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끝에 뭔가 여운이 남는 문자였다.

강수는 그 문자에서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그 불안을 떨쳐버리고자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였다.

-그래. 요즘 엄청 바쁘니까 시간 내기 어렵겠지. 이해해. 그럼 다음에 시간 날 때 보기로 하자. 그럼 됐지?

잠시 후 다시 장문의 문자가 왔다.

-오빠, 미안해요. 앞으로 오빠를 만날 수 없을 것 같아요. 실은 오늘 만나서 얘기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오빠 얼굴을 보고 말을 못할 거 같아서 문자로 하는 거예요···.

‘헉!’

문자를 읽어가던 강수는 순간적으로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강수는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문자를 찍었다.

-종희야, 이게 무슨 말이야?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만나자는 얘기지. 설마 헤어지자는 건 아니지? 그렇지?

-미안해, 오빠. 한 달에 한 번도 못 보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는 없잖아. 더 이상 오빠를 붙잡고 있을 수는 없어. 그래서 헤어지기로 한 거야. 이해하지?

종희가 왜 해어지려고 하는지 이유를 알게 된 강수는 떨리는 마음이 약간 진정되었다. 강수는 황급히 손가락을 놀렸다.

-종희야, 그런 이유라면 미안해 할 것 없어. 한 달에 한 번, 아니 두 달에 한번 만나도 난 상관없어. 그러니까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잠시 후 다시 문자가 왔다.

-휴, 오빠.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냐. 미안해. 안녕.

-종희야, 전혀 미안해 할 거 없다니까. 다 이해 한다니까. 응, 그러니까 안녕이라느니 만나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말아.

답장이 오지 않았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고 신경이 극도로 곤두섰다.

순간적으로 온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간 강수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말로는 형용하기 힘든 충격이 전신을 엄습했다. 숨을 제대로 쉬기 어려웠고,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강수가 정신을 차린 듯 전화를 걸었다.

컬러링이 흘러나올 뿐 전화를 받지 않았다.

강수는 두 번, 세 번 계속 전화를 걸었다.

[전원이 꺼져 있어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주십시오.]

“이럴 수가!”

강수는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아,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오랫동안 혼자서 가슴 속에 품어왔던 불안이 결국 현실이 되었다.

사실 마음 한 구석에는 종희가 계속 무명연예인으로 남아 있기를 바랐다. 인기를 얻을수록 종희는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화려한 장막 너머로 높이 날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예상대로 악당검사에서 뜻밖의 인기를 얻으면서 강수의 우려는 현실이 된 것이다.

자신이 종희의 옆에 당당히 설 수 있는 남자였으면 종희가 자신을 떠날 리가 없었다.

남녀가 만나서 사랑하고 싸우고 미워하고 헤어지는 것은 일상사다.

하지만 무능력해서 떠나는 여자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비참하고 가슴 쓰린 경우가 또 있을까?

자괴심에 빠진 강수는 고개를 숙인 채 벤치에서 석상처럼 앉아있었다.

맥없이 벤치에 앉아 있던 강수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래도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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