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그림 그리는 마법사 - 1회
1977년 9월 5일 플로리다 주의 케이프 커내버럴 우주센터에서 발사된 보이저 1호는 목성과 토성 등 부여된 탐사임무를 마치고, 기나긴 여행 끝에 2012년 8월경 태양계를 벗어났다.
그리고 1990년 5월.
보이저 1호가 태양계의 가장 바깥쪽 명왕성 궤도에서 우주의 심연을 향해 날아가며 지구를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노이즈가 낀 듯한 우주의 공간에는 흐릿한 도트, 점 하나가 희미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이 사진을 보고 위대한 지성 칼 세이건은 장문의 소감문에서 지구를 이렇게 표현했다.
창백하고 푸른 점(Pale Blue Dot)이라고.
한 알의 모래알갱이 같은 점, 창문 틈으로 비친 햇살 속을 부유하는 하나의 먼지 같은 존재.
우리에게 생명의 근원인 태양이 속해 있는 은하계는 약 2,000억 개의 태양, 항성이 모여 이룬 별들의 고향이다.
은하계와 같은 별무리가 우주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현대의 과학은 별의 개수를 7백해(7x10의22승)로 계산했지만 과학이 고도로 발전한 미래에는 이 값은 또 바뀔 것이다.
이렇게 많은 별, 항성과 또 그 항성이 거느리고 있는 행성은 어디에서 만들어지고 어떻게 나타났을까?
현대의 과학은 신비에 쌓인 우주의 발생을 하나의 점의 폭발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38억 년 전 발생한 빅뱅이 바로 그것이다.
빅뱅이론이다.
에너지, 시간, 공간, 물질 등이 고도로 압축되어 있는 하나의 극도로 작은 점, 특이점이 폭발해서 팽창하여 형성된 것이 우리 머리 위에 보이는 우주다.
특이점이 언제부터 어떻게 왜 존재했는지는 미지의 영역이다. 현대 과학이 증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이점과 빅뱅은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종교의 영역과 유사하다. 이유는 모르고, 눈앞에 우주는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냥 신이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는 것이다.
무한한 존재인 우주.
그 우주의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한 은하계.
나선형 은하계의 바깥 변방에 위치한 태양에 딸린 도트 같은 행성에서 우연한 진화의 과정에 의해 지적 생명체로 발전한 인간.
티끌이나 다름없는 미미한 존재에 불과한 인간이 과학을 앞세워 신의 영역에 도달하고자 하지만 신의 영역은 신의 영역으로 남겨두는 것이 낫지 않을까?
*
기해년이 역사의 뒤안길로 흘러간 지도 어느덧 2개월이 흘렀다.
기해년이 가고 온 2020년 경자년.
봄의 문턱을 향해 바쁜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3월 초다.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규모가 꽤 큰 별장.
이 별장의 침실에서는 방금 두 남녀가 뱀처럼 뒤엉켜 있었고, 뜨거운 열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후끈했던 열기가 미련처럼 남아 방안을 떠다녔다.
창가에는 수건으로 하체를 두른 한 사내가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는 전신에 근육이 적당히 발달해 있어 남성미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반듯한 이마에 짙은 눈썹, 강인한 턱 선에 이목구비가 뚜렷 사내의 얼굴은 꽤나 준수했다. 전체적으로 귀족적인 절제된 분위기가 풍겼다.
단지 입술이 얇아서 인정이 없어 보였고, 마음의 창이라고 하는 눈빛이 약간 가볍고 경박해 보였으나 이 사내 앞에서 눈을 마주보고 그 느낌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흔치는 않을 것이다.
그는 방금 전 자신의 전신 아래에서 숨을 헐떡이며 한 마리 잉어처럼 파닥이던 여체를 떠올리며 쾌락의 순간을 음미했다.
‘음, 정말 신선하군.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인데?’
다섯 달 전부터 공들여 온 여자였다. 그리고 오늘 공들인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다섯 달이나 시간을 투자한 경우가 몇 번 없었는데•••.’
다른 여자와는 달리 상당히 공들인 만큼 흡족한 결과를 선사해 주었다.
지금까지 수백 명이 넘는 여자를 섭렵했지만 이 여자처럼 성적 쾌락과 판타지를 충족시켜준 경우는 드물었다. 아마도 이 여자는 만족도 순위에서 세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처녀가 아닌 점이 옥의 티라고나 할까?’
처녀였다면 결혼까지 고려했을 것이다.
나이가 있고 남자친구도 있으니 아쉬워도 어쩔 수 없다.
‘이제 내 여자가 된 건가?’
요즘은 워낙 성 개념이 개방적이고 자유로워서 잠자리 한 번 했다고 마음대로 취할 수 있는 여자라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산을 오르는 등정으로 친다면 8부 능선은 넘었다고 봐도 될 것이다.
문득 창밖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이강수라고 했지•••.’
사내의 입에서 이름 하나가 흘러나왔다.
사내는 여자에게 공을 들이면서 여자의 남자관계를 조사했다. 그리고 조사 결과 얼마 전, 이강수라는 사내가 포착되었다.
자신의 견지에서 보면 벌레를 뭉개듯 발로 짓밟아 버릴 수 있을 만큼 보잘 것 없는 사내였다.
이강수라는 사내는 설희와 격이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가 지속되고 있는 이유는 몇 년간 사귄 정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은 설희가 대학 3학년 때, 약 5년 전에 만나 사귀었고, 아직까지 관계가 지속되고 있었다. 다만 그 관계라는 것이 사귄 기간만큼이나 견고해 보이지는 않았다.
과거에는 어땠는지 더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현재는 불안한 관계가 맞았다.
왜냐하면 설희가 연기 활동으로 바빠지면서 최근 들어 이강수와 설희는 두 달 넘게 만나지 않았다. 그에 반해 자신과는 몇 번 만남을 가졌고, 오늘은 잠자리까지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희가 비루하기 짝이 없는 이강수와 자신을 상대로 양다리를 걸치게 놔둘 수는 없었다.
설희, 스스로 이강수를 정리하지 못하면 자신이 정리하게끔 만들어주면 된다.
설희는 정상급 여자연기자로 올라가는데 학벌도 몸매도 미모도 연기력도 빠지지 않는다. 아쉬운 점이라면 개성적인 면이 부족한 얼굴, 좀 흔해 보이는 예쁜 얼굴이라고 할 것이다.
‘어쨌든 그걸 흠이라고 하기에는 약간 억지라고 해야겠지.’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래, 당분간은 이 여자에게 집중하자.’
*
꽃샘추위가 오락가락하는 3월 말의 저녁.
북한산이 지척인 수유동 한 아파트 단지 입구로 자주색 패딩을 입은 여성이 등에는 백팩을 매고, 오른손에는 커다란 여행 가방을 끌며 다가왔다.
이제 20대 초반의 젊고 예쁜 여성이었다. 아파트 입구에서 걸음을 멈춘 여성이 잠시 단지의 동 위치와 편의시설이 나와 있는 표지판을 쳐다보았다.
“휴—“
문득 여성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딘지 모르게 근심이 서려 있었다.
‘5동 1403호라고 했지. 저쪽에 있겠구나.’
자신이 가야 할 동을 찾았는지 여성이 다시 걸음을 움직였다.
5동은 단지의 뒤쪽에 위치해있었다.
보도를 걷어가던 여인이 앞에서 걸어오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를 발견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재숙이잖아? 재가 여기에 살았나?’
마침 오른쪽 어깨에 작은 가방을 매고, 책을 가슴에 품은 통통한 얼굴과 몸집의 여자도 패딩을 입은 여성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어머, 선예야, 니가 여기에 웬일이니? 그 큰 여행가방은 뭐고? 근데 너 이 아파트에 살았어?”
내키지 않는 얼굴로 하는 수 없이 걸음을 멈춘 선예라 불린 여성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으응, 재숙이구나. 오늘부터 친척 집에서 잠깐 신세 좀 지려고. 근데 너네 집이 여기야?”
“푸웃, 아니야. 과외 하는 애가 있어서 들린 거야. 이제 마지막 타임 하러 가야지.”
“아, 과외 하는구나.”
“친척집은 몇 동이야?”
“으응, 5동.”
재숙이라는 통통한 여자애가 아파트 한 동을 가리켰다.
“5동이면 저기 있는 아파트다. 참, 너 요즘 수업을 자주 빼 먹더라. 무슨 일 있어?”
선예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휴, 그게 알바 때문에.”
“알바? 너도 알바 했었어?”
“으응, 얼마 전부터 시작했어. 시간에 쫓기니까 가끔 수업을 빼먹게 되네.”
“그래도 수업은 빼 먹지 마. 학점 관리해야지.”
“그래야지. 난 지금 가 봐야 하는데 너도 과외 하러 간다면서?”
“아, 이 아파트 1동에 있는 애야. 과외 하기 전에 뭘 좀 먹으려고 나가는 길이었어.”
“그럼 맛있게 먹어. 학교에서 보자.”
“그래, 앞으로 여기서 살면 자주 보겠구나. 나중에 시간 나면 같이 저녁 먹자.”
저녁을 같이 먹자는 말에 선예가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으응, 그러자. 밥 먹고 곧장 과외하려면 힘들겠다. 난 이만 가 볼게.”
“그래. 잘 가.”
재숙은 여행 가방을 끌고 가는 선예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과외 하는 애가 아닌데? 집이 어려워졌나?”
재숙은 선예와 그리 친하지 않았다.
끼리끼리 논다고 선예는 과에서 얼굴 예쁘고, 몸매가 늘씬한 몇몇 애들과 주로 어울렸다. 지들이 무슨 아이돌이나 되는 것처럼 도도하게 굴었다. 특히 평범하게 생긴 남자가 접근하면 상대하지도 않았고, 싫은 티를 냈다. 그래도 예쁜 것들의 인기는 어디 가지 않았다. 스타일 좋고 좀 괜찮다 싶은 남자애들이 항상 따라다니니까 말이다.
‘이뻐서 좋겠다. 휴, 나도 살 좀 빼야겠어.’
재숙은 속으로 날씬한 선예를 부러워하면서 단지 밖으로 나갔다.
*
중산아파트 후문에 있는 대한마트 매장 안.
간편한 등산복 차림의 청년이 식료품을 장바구니에 담고 있었다. 180 정도의 키에 훤칠한 체격의 청년이 더 이상 살 것이 없는지 각종 식료품이 담긴 장바구니를 들고 빈 계산대로 다가갔다.
그는 양평의 한 별장 실내에서 벌거벗은 사내가 입에 올렸던 이강수였다.
“안녕하세요.”
“잘생긴 총각 왔네.”
강수를 본 40대의 캐셔 아주머니가 청년을 아는 듯 밝게 웃으며 맞이했다.
대한마트 계산대의 캐셔인 이정화는 강수를 볼 때마다 잘생긴 총각이라고 놀렸다. 강수는 멋쩍게 웃으며 장바구니의 물건을 계산대에 올려 놓았다.
이정화가 바코드를 찍으며 미소를 지었다.
“총각, 무슨 좋은 일 있나 봐.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강수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기분 좋아 보여요?”
“그래. 얼굴에 써 있는 걸. 여자 친구 만나나 보지? 이만 팔천 삼백원이네.”
청년이 멋쩍게 웃으며 카드를 내밀었다.
“하하. 쪽집게시네요. 여기요.”
“좋을 때야. 부러운데.”
이정화가 카드를 받아 계산을 하고 카드를 돌려주었다.
“수고하세요.”
“잘 가요.”
식료품의 가격을 계산한 강수는 비닐봉지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강수가 미소를 지으며 즐거워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드디어 종희와 토요일에 만나기로 약속을 한 때문이다.
‘약속을 잡아서 좋기는 한데 앞으로 이렇게 만나기가 힘들면 어떡 하냐?’
강수의 입가에서 미소가 지워지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종희는 작년까지만 해도 무명연기자였다. 한데 올해 1월 중순부터 방영한 악당검사에서 악녀 배역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촉망 받는 신인여배우로 떠올랐다.
악당검사는 미니시리즈로 IBS 공중파 방송국의 수목드라마였다.
악당검사는 특이한 소재를 채용했는데 검사인 주인공이 무극진도를 계승한 숨겨진 신분의 소유자이다. 그는 드라마에서 거물 정치인과 재벌의 커넥션을 파헤치며 사회악을 처단하기 위해 함부로 써서는 안 되는 도술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스스로 어둠 속에서 악당의 길을 걸었다.
이 같은 파격적인 스토리의 악당검사는 방영 4회 만에 시청률 25%대를 돌파하며 대히트를 기록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인기를 누리며 숱한 화제를 뿌렸고, 마지막 2회는 시청률 40%를 찍고 종영했다.
악당검사는 방영 후 엄청난 인기를 얻었지만 제작발표회 때만해도 망작으로 소문이 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