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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200화 (완결) (200/200)

200화. 사과나무는 왜 심어야 할까?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계투로 게임에 나서는 건 거의 삼 년 만인 것 같다.

나와 소르카가 선발로 나서는 시리즈의 1, 2차전이 유리할 것이라는 건 거의 모든 이들이 예상한 일이었다. 아주 쉽지는 않았지만, 예측대로 그 게임들은 무난하게 이겨냈다.

통상적인 일이 아니라 사건이라 불러야 할 일은 3차전부터 벌어졌다. 레인저스의 1, 2선발이 차례로 등판하게 되는 3, 4차전의 예상은 레인저스가 어떤 식으로든 우세하다는 의견이 절대적으로 많았다.

‘모든 예상은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거지. 음. 이게 아닌가? 거 비슷한 말은 있잖아. 누가 했는지는 모르지만, 기록 어쩌고 하는 말. 그거나 이거나…’

우리 팀의 3차전 선발은 로저스였는데 그는 이 경기에서 8이닝 3안타 무실점이라는 인생 역투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바라지 않는 바는 아니었지만 얼떨결이라는 표현이 잘 들어맞는 3연승을 하게 되었다.

레인저스가 배수진을 칠 수밖에 없게 된 4차전은 앞두고 우리 팀은 상당히 여유가 있었다. 4차전 선발로 내세운 드로이넨이 잘 던지면 좋고 좋지 않으면 뒤이어 존슨까지 투입할 아름다운 계획을 가지고 느긋했었다.

어떤 상황이 온다 해도 다 감수할 수 있었다. 만약 이 게임을 진다고 해도 유리한 선발 로테이션이 돌아와 절대적 우세 속에 5, 6차전을 치를 수 있다. 지더라도 최대한 레인저스의 여력을 갉아먹으면 된다는 달콤한 계산을 가지고 경기에 임했다.

이번 시리즈에서 가장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앞서 벌어진 세 경기는 팬들의 입장에서 재미가 떨어지는 면이 있었다.

점수가 많이 난 것도 아니고 역전과 재역전으로 손에 땀이 날 일도 없었다. 그냥 초반 힘겨루기가 중반까지 이어지다가 한 번 기울면 그것으로 그냥 승부가 결정되어 버리는 밋밋하다고 표현할 수도 있는 게임들의 연속이었다.

우리 나름대로 굉장히 신경 곤두세우며 치러낸 게임들인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그런 이야기들이 돈다는 이야기를 듣고 상당한 괴리감을 느끼기도 했다.

‘직접 하는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의 입장은 다른 거니까. 혹시 향혈이라는 말 들어봤어?’

정식 바둑판을 뒤집어 보면 사각뿔 모양의 움푹 패인 곳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향혈(響穴)이라고 불렀는데 일본에서는 혈류(血溜)라고도 부른다.

‘혈류는 피가 방울져 떨어진다는 뜻이래. 훈수하는 놈의 목이나 혀를 잘라서… 훈수하는 놈이 제일 나쁘다나 어쩐다나… 여기까지만 해야겠네. 아무튼 그래. 침묵은 금이고 웅변은 은이야. 2,000여 년 전에 살았던 사람도 아는 이야기를 아직도…’

4차전은 이전 게임들의 양상과 많이 달랐다. 초반부터 양 팀의 타격이 폭발했다. 우리 선발 드로이넨은 3과 1/3이닝 동안 6안타 4실점으로 물러났고 뒤이어 등판한 존슨도 상대하는 타자가 늘어날수록 위태위태하다.

이런 장면에 팬들은 열광하겠지만, 이러면 벤치와 선수들은 죽어난다. 감독들이 제일 질색하는 경기가 이런 식의 계산이 안 서는 게임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등판할 일 따위가 생기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필 아저씨가 사고를 쳐버렸다.

5:4로 한 점 뒤지고 있던 6회 초 2사 만루에서 홈런을 터트려버렸다. 우리 팀이 이 게임에서 처음으로 리드를 잡았다. 무려 3점 차이다.

필 아저씨를 환영하기 위한 세리머니에 광분하던 난 감독에게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았다.

“오늘 한두 이닝 부탁해도 되겠나?”

붉은 얼굴의 감독은 몹시 다급해하고 있었다.

“예? 저 5차전 선발…”

너무 뜻밖의 말에 당황해 바보 같은 대답을 하고 말았다. 감독이 그걸 모르고 불렀을 리가 없는데…

“굳이 5차전을 치를 필요가 없지 않겠나. 자네만 승낙하면 존슨이 조금 위험해지면 바로 애덤부터 투입할 생각이네. 그리고 체이스가 되겠지. 자네가 마지막을 맡아주게. 자네 불펜투수였을 때 몸이 빨리 풀리는 유형이라고 들었네만.”

감독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그와 앞으로 보지 않을 거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거절하기 어렵다. 그리고 나도 별로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월드 시리즈의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고 포효하는 투수. 멋지지 않겠냐고.’

이건 모든 투수의 로망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런 간단한 이유로 8회 말 이 월드 시리즈를 마무리 짓기 위해 글로브 라이프 필드의 마운드에 예정에 없던 등판을 하게 되었다.

감독은 가장 확실하게 이기고 싶었고, 난 승리와 더불어 내 내재된 욕구를 함께 만족시켜야 했다. 서로의 생각 과정이 조금 다른 것쯤은 별문제가 안 된다. 승리라는 최종목적을 달성하면 누구라도 더 이상 따질 일이 없다.

불펜투수의 투구는 선발과 달라야 한다. 3점의 여유를 가지고 2이닝을 막아내면 된다. 뜬금포 따위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실점 없는 완벽한 투구 내용으로 마무리를 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모양새 따위는 아무래도 괜찮다는 심정이다.

“스트라이크.”

92라는 숫자가 전광판에 떠올랐다. 상당히 색다른 숫자다.

‘앞자리 숫자를 늘 8만 보다가 9는 얼마 만인지… 기분이 좀 이상하네.’

이제 스피드 업을 작정하고 전력투구하면 이 정도는 던질 수 있다. 그동안 굳이 이렇게 던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가볍게 던졌을 뿐이다.

평소 빠른 볼을 던져도 구속은 88~89마일 정도였다. 그보다 고작 3마일이 더 나왔을 뿐이지만 이런 구속변화는 타자의 입장에선 많이 부담스럽다.

거의 모든 투수가 90마일대 중반 이상의 구속을 가진 리그에서 90마일대 초반 패스트볼은 별거 아닌 것 같겠지만, 그런 공을 던지는 투수가 나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일단 타자들이 알고 있던 나라는 투수의 데이터를 참고하기 어렵게 된다. 그들은 이미 최근이라 할 수 있는 1차전에서 3타석 정도 나라는 투수를 겪어봤다. 그 익숙함을 적용할 수가 없다. 전반적인 타격 타이밍을 다시 설정해야 한다.

‘그런 목적에서 던진 거라고. 이런 구속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지만 2이닝 정도야 충분하지.’

보통 처음 만난 투수와 타자의 대결에선 투수가 유리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타자가 생소한 공에 타이밍을 세팅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일에나 리스크는 있다. 의표를 찔러 타자에게 혼란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상대에게 내가 짐작할 수 없는 대비가 있다면 오히려 일격을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3점이라는 리드한 점수가 그 완충제가 되어준다.

틱-

“파울”

패스트볼이 빨라지면 평소처럼 싱커를 던져도 구속 차이가 커진다. 잠깐의 혼란은 기대할만하다.

‘잠깐이면 되지. 2 이닝이면 여섯 타자만 상대하면 되는 건데…’

틱-.

“파울.”

노 볼 투 스트라이크에서 던진 유인구를 순간적으로 속도를 늦춘 타자의 배트가 기어이 쫓아와서 스치듯 건드렸다. 상급의 배트 컨트롤을 보여준다.

‘에고, 아까워라. 뭐! 어차피 위닝샷을 위한 목적구였잖아.’

헛스윙을 기대하고 던진 공은 아니었지만 존에서 좀 많이 떨어트려서 헛스윙이 될 만한 공이긴 했었다. 골라낼 수 있는 공에 배트가 이렇게 쉽게 따라 나오는 건 스피드 업의 효과다. 아마도 타자가 빠른 볼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80마일 싱커를 커트해 낸 것 훌륭했어.’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몸쪽을 파고든 패스트볼에 타자는 얼어붙은 듯 스윙하지 못했다. 완벽한 코너워크는 되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존의 가장자리 근처에 꽂히는 좋은 공이었다.

‘자신 있었다고. 분명히 앞 공을 맞혀냈잖아. 이제껏 야구하면서 직전에 느린공을 맞힌 후 바로 20킬로미터 구속 차이가 있는 다음 공을 때려낸 타자는 없었어.’

그런 건 사람의 영역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이제 다섯 타자인가?’

레인저스에서 대타가 나온다. 많이 급해진 것 같다.

‘누구든 나와 보라고.’

***

“준비는 다 했냐?”

“별달리 준비할 거나 있겠어요? 혼자 잠시 다녀오면 되는 건데…”

“그래도 한국 안 들어간 지 4년이 넘었잖아.”

고 감독에게 이런 자상함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냥 다녀오려고 하다가 아버지가 그래도 그러는 게 아니라고 하셔서 인사를 차릴 겸 해서 오랜만에 전화를 했는데 내 출발준비를 묻고 있다.

‘허! 사람은 나이 들수록 마음이 약해진다고 하더니… 고 감독도 별수 없나?’

“방송국에서 연락 왔을 때 안 간다고 딱 잘라서 말씀하시더니 생각이 조금 달라진 겁니까? 같이 갈래요?”

어른이 좋은 말을 하면 내용은 립 서비스일 뿐일지라도 화답해주는 것이 좋다. 조금 살아보니 예의 차려서 손해날 일은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가는 게 뭐 어렵겠어. 그런데 난 아직 좀 시기상조야.”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갈 마음은 있는데 사정이 허락하지 않는다. 이건가?’

다분히 형식상 던진 물음이었는데 생각지도 않은 답이 나왔다. 내 머뭇거림이 고 감독에게도 느껴졌는지 조금의 부연설명이 이어졌다.

“내가 한국 가면 불편해할 사람들이 좀 있어. 그 재판 관련해서… 조금은 더 지나야겠지.”

더 묻지 말라는 티가 팍팍 나는 얼버무림이다.

“아! 그렇군요.”

나로서도 복잡한 일을 더 묻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그리 오래 가진 않을 거예요. 제가 이렇게 한국 가는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어요.”

“위로는 고마운데 한국 안 가도 난 별로 안 불편해. 여기가 집이야. 가족도 있고… 너야말로 무슨 바람이 불어서 방송국 초청에 응한 거냐?”

“그거야 때가 되었으니까요. 예전에 사람은 어울려 살아야 하는 거라고 들었어요. 좋든 싫든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야 한다면 꺼리는 게 있으면 불편하잖아요. 그렇다면 저쪽에서 숙여주는 이 기회가 좋을 것 같아서…”

별일 아니다. 그냥 편하게 살고 싶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한국행이 결정되었다. 물론 부딪치는 문제가 생길 수는 있다. 그건 초청한 방송국 쪽에서 알아서 잘 풀어 주리라고 생각한다. 월드 시리즈 2연패와 더불어 MVP를 수상하면서 최고 주가를 기록하고 있는 현재 내 위상을 생각하면 아주 좋은 타이밍이다.

“나름 신뢰를 줄 만한 말을 들었나 보구나.”

“예.”

말이 길게 늘어질 거 같아 간단하게 대답했다. 사실은 별로 들은 이야기가 없다. 깊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내가 갑이잖아. 을이 알아서 맞추겠지. 준비하고 신경 쓰는 건 초청자가 해야 맞는 거잖아,’

중간에 비끗하면 기자회견 열어서 욕 한 번 하고 돌아오면 된다. 이제 난 답답할 게 전혀 없는 사람이 되었다.

“이 주만 있으면 되는 건데… 간만에 나들이 한다 생각하고 다녀올 생각이에요. 만나보고 싶은 사람도 몇 명 있고… 그보다 폴 머서는 좀 알아보셨어요?”

“응, 에이전트고 뭐고 거의 다 손 뗀 상태더구나. 끌어들이려면 끌어들일 수는 있을 거 같아. 그런데 그 선수를 굳이 왜 그래야 하는지를 모르겠어.”

“전 딱 보는 순간 알았어요. 걘 잘될 거예요. 잘하시는 것 있잖아요. 어떻게든 좀 해보세요. 우리 팀 단장하고 이야기해서 트레이드든 뭐든 당겨올 수 있으면 제일 좋구요. 제가 한국 다녀올 동안이면 되겠죠?”

“그게…”

현재의 나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나를 보면 된다. 미래 역시 현재의 내가 걸어서 다다르는 곳이다.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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