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2031 월드시리즈
이번 월드시리즈 1차전의 전망은 우리 팀의 일방적 우세였다. 일단 선발의 높이에서부터 큰 차이가 난다며 모든 전문가들이 우리 팀의 낙승을 점쳤다.
‘하아! 그런데 이게 뭐야. 그 정도 전력 차이라면 가볍게 리드하고 있어야 되는 거잖아.’
6회 현재 스코어는 1:0 정말 미칠 것 같은 스코어다.
‘하긴 스포츠의 승부가 예상대로 다 되었으면 자이언트 킬링이니 하는 용어가 생겼을 리가 없지.’
어떤 이유에서든 약팀이 강팀을 이기는 건 가끔 있는 일이다. 문제는 왜 가끔 일어나는 그 사건이 하필이면 지금 우리 팀에게 일어나느냐는 거다. 내가 지금까지 레인저스에 허용한 안타는 딱 하나였다. 1회를 제외하면 전 이닝을 출루 허용 없이 삼자범퇴로 처리했다.
거의 6이닝을 던지면서 1안타만 허용한 것을 나쁜 투구 내용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건 우리 팀이 지고 있으면 아무 소용없다.
만약, 이대로의 스코어가 이어져서 우리 팀이 져버린다면 ‘자이언츠의 아쉬운 패배, 운이 승부를 갈랐다.’ 이렇게 기사가 나올까?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불굴의 레인저스, 불가능을 넘어서다.’ 아마 이런 식으로 기사가 써질 것이 확실하다. 이런 현실에서 내 투구 내용이 좋았던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끝이 좋아야 아름답다. 경기 시작 직후 잠깐 어수선한 시간에 벌어졌던 실투 하나가 계속 나와 팀을 괴롭히고 있다.
‘5안타 1볼넷으로 1점을 못 내면… 어휴! 생각을 말아야지.’
오늘 레인저스의 선발은 정규시즌 5선발급의 선수다. 1, 2선발급에게만 좀 약했을 뿐 이 정도 급의 투수를 상대로 우리 타선은 그동안 상당히 활발한 공격력을 보여줬었다. 역시 오늘 우리 타자들은 곧잘 쳐내고 있다.
‘예상보다는 구위가 괜찮은 것 같지만, 못 칠 공을 던지는 건 아닌데… 왜 결정을 못 짓는 거냐구.’
이미 중요한 장면에서 두 번이나 병살타가 나와 버렸다.
‘1사 1, 2루와 1사 만루. 필이 병살을 쳤을 때는 그렇거니 했는데 바로 지난 타석에서 어휴! 믿었던 베그웰마저…’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오간다. 잊으려 했던 생각이 투구를 하려고 포수의 미트를 쳐다본 순간 다시 떠올라 버렸다.
‘쟤도 치고 싶고 그랬겠어? 아직 4번의 공격 기회가 더 남았잖아. 어디서 걸려도 걸리겠지. 일단 더 이상 실점하지 않고 막아내야 해.’
느긋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려 애를 쓰고는 있지만 한 회, 한 회가 지날수록 점점 초조해지는 마음이 마음대로 제어가 안 된다. 레인저스의 프라이머리 셋업맨과 클로저는 수준급이다. 적어도 7회 이전에 동점 상황 이상을 만들어야지, 게임이 이대로 한두 이닝 더 늘어지면 말도 안 되는 일이 진짜 일어날 수도 있다.
‘일단 이번 회 마무리부터…’
간신히 마음을 다잡았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업슛으로 깨끗한 헛스윙을 만들어냈다. 언제나 위기의 상황에서 나를 이끌어준 좋은 공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잘 쓰지는 않지만 그래서 더 위력 있는 공.
‘이건 많이 던지지만 않으면 치트키야.’
이번 회도 삼자범퇴로 막아냈다.
따악-
선두타자 르블론이 벼락같은 스윙으로 중앙펜스를 넘겼다.
‘하핫. 그래. 이거지. 에구, 겨우 한숨 돌렸네.’
오늘 중심타선에서 계속 엇박자가 나서 점수를 못 내고 있었는데 비로소 4번 타자가 한 건 해준다. 생각이 가끔 오락가락하긴 했었지만, 어느 순간 터질 거란 믿음은 있었다.
이래서 홈런타자가 중요하다. 때로는 엉킨 매듭을 푸는 것보다 잘라버릴 수 있어야 한다. 야구에서는 홈런이 그런 역할을 한다.
‘르블론이 있어서 우리 팀이 그나마 소총 부대 소리는 안 듣는 거지.’
가끔 한 시즌 팀 홈런 300개가 넘는 팀이 나오는 시대에 우리 팀은 200개에도 못 미치는 시대의 추세에 역행하는 타선을 가지고 있다. 이번 시즌에도 30홈런을 넘긴 타자가 르블론 단 한 명뿐이었다.
팀 홈런이 적고 팀타율은 높은 팀. 한 30년 전쯤이라면 이상적인 팀이라고 불렸을지는 모르지만, 지금 메이저리그 최상위권 팀들과 조금 다른 모습을 가진 것은 분명하다.
‘바꿔 주겠지?’
오늘 레인저스의 선발은 모두의 예상을 뒤집는 호투를 보여줬다. 하지만 이제 한계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싶다.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르블론의 얼굴에 웃음꽃이 가득하다. 그에게는 빅 임펙트가 없는 타자라는 악평 아닌 악평이 붙어 다니는데 오늘은 승부에 아주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홈런을 때려냈다.
‘중요한 시점에서 한 건 해낸 거야. 자신을 자랑스러워해도 돼.’
르블론은 30개 이상의 홈런과 3할 근처의 타율을 꾸준히 유지하는 기복이 적은 타자다. 경기 중에 큰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건 어쩌면 꾸준히 잘해서일지도 모른다.
조금 어수선해졌던 시간이 지나고 다시 경기가 속행할 때가 되었는데 마운드의 투수는 그대로였다.
‘왜 안 바꿨지? 아직 구위가 괜찮다고 판단했나? 아니면 투수 여유가 없어서? 어정쩡한 불펜보다는 지금 선발이 낫다고…’
무엇이 정답일지는 모른다. 어쩌면 내가 생각한 이유 외의 다른 이유가 있을지 모르고 모든 이유가 조금씩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설마 예전의 어떤 팀처럼 게임을 던지려는 건 아니겠지?’
그랬던 팀이 있었다. 투수로테이션이 꼬이자 첫 게임을 포기해버렸다. 그리고 그 게임에서 최저 숫자의 투수만 사용하면서 팀의 재정비를 시도했던 팀을 상대했던 적이 있었다. 그 시리즈는 상당히 고전했었다.
‘그건 그 팀에 절대적으로 믿을만한 원투펀치가 있어서였지.’
질 경기와 이길 경기가 뚜렷하게 구별될 정도로 레인저스의 일이 선발과 다른 선발투수의 실력 차이가 큰 것 같지는 않다.
‘그럼 무엇 때문에…’
따악-
어쩌면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5번 타자 헌트의 2루타가 터졌다. 좌측 펜스를 직격할 만큼 큰 타구였다.
‘그냥 넘어갔어야 하는 건데…’
연속적으로 배트의 중심에 맞은 타구가 나오고 있었다. 이제 하위타선으로 접어들기는 하지만 갑자기 난조에 빠진 투수의 상태를 감안하면 추가 득점이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어지간히 애를 태우더니 끝내 터지긴 하네.’
여기서 한두 점만 더 들어오면 레인저스가 승리조 불펜을 내는 건 사실상 어려워진다. 레인저스의 타임 요청이다. 감독이 마운드로 향한다.
‘쯧쯧. 한 템포 늦었잖아요. 이왕 바꿀 거였다면 미리 교체를 했어야지.’
나름 사정은 있었겠지만 이런 상황이 나올 때마다 상대 팀이 조금은 안쓰럽게 느껴진다.
‘어? 안 바꿔? 벌써 손을 들어버린 거야?’
오늘 경기에서 레인저스의 생각을 전혀 맞히지 못하고 있다. 정말 무슨 생각으로 경기운영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거 뭐야? 고의 사구로 루를 채워?’
다음 타자부터 우리 멘도사 라인 트리오인 내야수들이 나오게 된다는 점에서 얼핏 수긍이 가기도 하지만 1루로 그냥 보낸 6번 필은 오늘 안타는 고사하고 정타를 때려내지 못하고 있었다. 빗맞은 타구가 병살타가 되기도 했었다. 그런데도 승부를 하려고 하지 않은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건 상대할 타자로 테일러를 찍은 거다. 지목당한 꼴이 된 테일러는 열 좀 받았을 것 같다. 그렇지만 이 상황 역시 이해가 안 되긴 마찬가지다.
‘왜? 무조건 테일러를 잡을 수 있다는 보장이 어디 있다고? 어? 이제 투수를 바꿔?’
테일러가 타석에 들어서자마자 투수 교체가 이루어졌다. 준비했었다는 듯 좌완인 폴 머서라는 투수가 마운드에 나타났다. 아주 생소한 투수다. 레인저스 자료에서 이름을 보긴 한 것 같은데 특별한 기억이 없는 걸 보니 중요한 선수는 아니었던 듯하다.
“이게 뭐 하자는 수작이지? 투수를 왜 지금 바꿔? 이럴 거면 좀 전에 감독이 올라갔을 때 바꾸지 않고.”
나도 모르게 생각한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지금이 승부처인 건 확실한데 레인저스의 행보는 이해하기가 몹시 어려웠다.
“먼저 바꿨으면 우리가 테일러 자리에 대타를 낸다든지 하는 상황을 꺼린 것 같은데… 무조건 저 머서라는 투수로 테일러를 상대하겠다고 마음먹었나 봐.”
내가 중얼거리는 혼잣말을 들었는지 베그웰이 자신의 답을 말해준다. 그래도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
“우리 팀 특성상 6회에 주전 3루수를 교체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그것까지 왜 고려해야 했을까?”
“저 머서라는 투수를 내가 좀 아는데 저 친구 저번 시즌까지 파드리스에 있었어. 일종의 스페셜리스트인데… 공이 좀 지저분해. 루를 채워서 병살을 노리는 것 같아.”
레인저스도 나름 생각이 있었다는 건 알겠다. 그런데 그 정도씩이나 되는 투수라면 난 왜 머서라는 이름이 이렇게 생소한지 모르겠다.
“그런 투수가 있었어?”
“좀 애매한 투수야. 공이 지저분한 건 분명한데 그게 수준급 타자들에게는 잘 안 통하거든. 그 때문에 마이너를 오르락내리락하는 투수야. 마이너에선 헤이더 급이지.”
베그웰의 추가 설명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통상적인 빅리그 수준의 타자를 상대로는 활용도가 떨어지지만, 하위권 타자들에게는 저승사자 같은 투수라는 말이다.
“공이 지저분하다는 게… 헐!”
“스트라이크.”
말이 나가다 저절로 멈춰졌다. 기분이 멍하다. 현란한 변화를 보이는 투심이 테일러의 몸쪽을 파고들었다.
나와 쓰는 손의 차이가 있고 쓰리쿼터 정도의 팔각도를 보이는 투구 폼도 다르지만, 과거 내가 불펜 투수일 때 던지던 투심패스트볼과 유사한 궤적을 보이는 볼이 눈앞에 나타났다. 나보다 구속은 좀 더 빠른 것 같다.
“저건…”
“너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지? 아까운 투수라고 가끔 생각했었어. 저 공은 좋아. 그런데 그 공뿐이라는 게 문제지.”
‘허헛. 그건…’
대학 때의 내 모습이다. 베그웰은 그때를 모른다. 기묘한 기시감에 몸이 떨릴 지경이다.
“아! 그런 면이 있었네. 다른 구종을 아예 못 던지는 거야?”
“왜 너하고 비슷한 면이 있어서 관심이 생겨? 너하고는 많이 다르지. 세컨 피치로 다른 구종을 이것저것 시도하는 것 같던데 다 저 공과 비슷하더라고. AA 정도면 몰라도 그 이상에선 저 정도 구위의 단일 구종으로 버티기는 어렵지.”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
“22, 23 그 정도 되었을 거야. 아직 나이도 적고 저 구종이 아까워서 코치들이 터지길 기대하고 꾸준히 콜업을 시키긴 하는데 근본적으로 다른 수준급 구종을 장착하기 전에는 빛 보기 어려운 유형이지.”
테일러는 바싹 약이 오른 듯했지만, 원 볼 투 스트라이크로 코너에 몰리는 걸 피할 수는 없었다. 공이 사방으로 날려서 게스 히팅을 할 수 있는 유형의 투수가 아니다.
‘가운데만 보고 던지는 거네. 그것참!’
타악-
테일러는 몰려있는 상황에서도 빅리거의 관록을 발휘해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구속 조절이 안 되는 상황에서 정타는 피했지만 컨택까지 피하기는 어려웠다. 일단 인플레이된 공이 어디에 떨어질지는 예측불허다. 다분히 운이 9할인 것 같지만 이 동네는 과정보다는 결과다.
아무도 잡을 수 없는 외야 깊숙한 곳으로 날아간 공에 주자 두 명이 홈을 밟으면서 급격히 경기가 기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