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98화 (198/200)

198화. 이보다 더 좋은 상대는 없다

“베그웰. 자료를 보다가 궁금한 게 하나 생겨서 그러는데…”

곧 있을 월드 시리즈 1차전을 앞두고 워밍업 중이었는데 갑자기 이상한 궁금증의 방해가 시작되었다. 좀 참아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잠시 투구를 멈추고 베그웰에게 다가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뭔데?”

“그게 게임하고 별로 연관된 게 아니라서…”

물어보기가 좀 민망하다. 하지만 중요하다. 이런 답답함은 투구할 때 집중을 방해한다.

“전에 트윈스에 있을 때 원래 트윈스의 연고지가 워싱턴이었고, 그때 팀명이 세네터스였다고 들었는데… 그때 내 투구 폼이 팀의 레전드 월터 존슨과 비슷하다고 해서 찾아봤더니 소속팀이 세네터스라고 나오더라고 그래서 그 이야기하다 알게 되었는데…”

“응. 맞아. 1961년에 미니애폴리스로 연고지를 옮기면서 트윈스가 되었지.”

내가 세네터스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경위를 이야기하려는데 베그웰이 말을 자른다. 말을 하다 보니까 트윈스는 아메리칸 리그 창설 멤버인 세네터스의 후신이라고 자부심을 가지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도 난다.

“그런데 왜 레인저스도 전신이 워싱턴 세네터스로 나오지? 세네터스가 나눠진 건가?”

“하핫! 그게 궁금한 거였어? 이름은 같지만 다른 팀이야.”

“뭐? 연고지가 같은 세네터스라는 팀이 두 개가 있었다는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연고지와 이름이 같은데 어떻게 구별했대?”

“구별할 필요가 없었지. 동시에 있은 적이 없으니까. 트윈스의 전신이었던 세네터스는 워싱턴에 1901년부터 1960년까지 있었던 팀이고 레인저스의 전신은 1961년부터 1971년까지 워싱턴에 있었던 세네터스이니까.”

좀 당황스러운 답이다.

“세네터스가 연고지 이전을 하고 나서 똑같은 이름의 팀이 생겼다는 거야? 그런 경우라면 이름을 바꾸는 게 보통이지 않아?”

“그게… 사무국에서 연고지 이전을 허용하는 조건이 같은 이름의 팀 창단이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오래된 일이라 자세한 사정은 나도 잘 몰라. 어쨌든 그렇게 되었고 레인저스의 세네터스와 트윈스의 세네터스는 이름과 연고지는 같지만 다른 팀이야.”

“그럼 61년에 생긴 세네터스가 10년 후에 다시 연고지 이전을 해서 레인저스가 되었다는 거네. 그럼 지금 워싱턴에 있는 팀은 언제 생긴 거야?”

“그 팀은 원래 몬트리올 엑스퍼스였어. 2005년에 연고지 이전을 해서…”

몬트리올이면 캐나다다. 이 동네도 생각보다 족보가 복잡한 것 같다. 케케묵은 남의 족보까지 따질 생각은 없었다. 이 이야기는 이 정도면 이해하기 충분할 만큼 들은 것 같다.

“레인저스가 우승 경험이 없다는 게 세네터스 시절까지 다 포함해서 그런 거지?”

“응. 그런데 월드 시리즈에 올라온 건 2010년, 2011년 두 차례 있었지. 2010년에 우리 팀에 4:1로 밀렸고, 2011년엔 거의 우승 직전까지 갔었는데 월드 시리즈 사상 거의 최악의 역전패를 6차전에서 당하더니 그 여파인지 7차전도 허무하게 져 버렸지.”

월드시리즈 최악의 역전패 이야기는 어디선가 들어본 거 같다.

“그런 역사가 있는 팀이라면 꼭 우승하고 싶겠네.”

“그거야 역사가 있던 있든 없든 어느 팀인들 지고 싶겠어. 이제껏 월드 시리즈 우승을 해본 적이 없는 팀이 모두 6팀인데…”

“그래?”

얼핏 30팀 중의 6팀이란 게 적은 건지 많은 건지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레인저스 외에 파드리스, 브루어스, 매리너스, 로키스, 레이스가 우승을 못 했어. 그리고 매리너스는 월드 시리즈를 치른 경험조차 없지.”

나오는 이름들이 대개 그럴만한 사연이 있는 이름들이다.

“음. 좀 의외네.”

“뭐가?”

“우승 못 해봤다는 팀 대부분이 빅마켓으로 분류할 수 있는 팀들이 아니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데 레인저스는 좀 다르잖아. 거긴 빅마켓으로… 왜 우승을 못 했을까?”

베그웰이 날 바라보더니 픽 웃는다.

“왜 그래? 내 말이 어디가 이상해?”

“오늘 선발로 나서야 하는 선수가 하는 말치고는 너무 여유로운 것 같아서… 우리 투수가 이렇게 자신만만해 하니까 믿음직스럽긴 해.”

농담인 듯 아닌 듯 알쏭달쏭하다. 모르는 척하고 다음 말을 이어갔다.

“뭐 그냥… 평소에 하던 식으로 던지면 되는 거잖아. 레인저스가 좀 낯설긴 하지만 특별할 것도 없지. 그리고 레인저스는 월드 시리즈에서 결정적인 고비를 못 넘긴다며…”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팀이 올라온 것에 비하면 상대하기 백번 낫다고 생각한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는 거다. 이겨 본 경험이 많이 있는 팀은 보이지 않는 껄끄러움이 있다.

‘아… 말린스라는 예외가 있긴 하네.’

말린스는 90년대 창단한 팀으로 알고 있다.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많이 헤매던데… 오늘도 좀 그래 주려나?”

컵스와의 5차전을 이겨낸 덕분에 레인저스와 레드삭스가 7차전까지 사투를 벌이는 것을 느긋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그들은 6, 7차전에서 예비 전력까지 끌어내 썼다. 그 덕분에 1선발과 2선발은 3차전은 되어야 출전이 가능하다. 챔피언십 때 우리와 같은 처지다. 우리는 선발진의 두터움으로 그 상황을 극복했지만, 레인저스가 그런 식의 운용이 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레인저스가 하루 주어진 휴식으로 어느 정도까지 팀 정비를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

“볼.”

“뭐 하는 거야?”

“이런… 그걸 눈이라고…”

다시 볼넷이다. 아웃코스 존의 경계를 넘나드는 공을 주심이 전혀 잡아주고 있지 않다. 빽빽하게 들어찬 관중에게서 판정과 동시에 엄청난 술렁임과 야유가 쏟아졌지만, 주심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 같다.

경기 시작부터 맞은 두 타자가 모두 볼넷 판정을 받아 걸어 나갔다. 어느 순간부터 볼넷을 줘도 크게 상관없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투구하기는 하지만 상당히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한때는 볼넷 주는 것을 병적일 만큼 싫어했다. 그러나 투수가 스트라이크 위주로 던진다는 것이 오히려 타석에서 타자의 선택을 제한하기도 한다는 것을 어느 순간 느끼게 되었다. 피네스 피처에게는 타자의 머릿속이 복잡할수록 좋다.

‘너무 스트라이크를 고집하는 피칭이 어떨 때는 독으로 작용하더라 이거야.’

내 투구는 항상 의외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하아! 이거 곤란하네. 첫 타자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두 번째 타자까지 연속 볼넷이라니…’

존이 박하다는 걸 알고 첫 타자에게 던진 공보다 안쪽으로 조금 더 붙였는데도 판정이 볼이다. 내가 투구하면서 이럴 정도로 아웃코스 존이 빡빡한 경우는 처음인 것 같다.

베그웰이 마운드로 올라오려는 눈치라서 손을 들어 괜찮다는 신호를 줬다. 안 와도 된다. 1회부터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안 된다. 타자들에게 투수가 흔들린다는 이상 신호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건 그렇고 좀 이상하네. 타자들이 별로 공을 칠 생각이 없는 건가?’

요즘 들어 내 투구에서 스트라이크와 볼의 비율이 거의 5:5에 가까워지긴 했지만, 레인저스 타자들이 너무 기다리는 것 같다. 경기 시작 후 얼마간은 투수와 타자 양쪽에게 모두 조심스러운 순간이다. 주심의 존도 체크해야 하고 실전에서 내 구위도 살펴야 한다.

타자들이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기에 함부로 존을 테스트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그런 볼을 노리고 적극성을 보일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최대한 티 나지 않게 그런 작업을 해내야 한다.

이런 약점이고 불릴 수 있는 점 때문에 글래빈 같은 피네스 피처의 대표적인 선수도 1회 실점이 상당히 높다. 나도 요즘 그런 과정을 겪고 있는 것 같다.

‘그건 그렇고… 배트를 안 내도 이렇게 안 낼 수가 있나?’

문득 첫 타자는 스윙을 아예 한 번도 안 했고 두 번째 타자도 한 번밖에 안 휘둘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자들 컨디션이 떨어진 건가?’

그럴 수 있는 상황은 된다. 레인저스의 지난 챔피언십 6, 7차전은 원정 경기였다. 힘든 원정 경기를 치르고 다시 원정을 왔다. 전 경기가 벌어졌던 보스턴과 샌프란시스코의 거리는 3,000마일쯤 된다.

‘거리도 거리지만 시차가 3시간이 있어서…’

아무리 서에서 동으로 가서 시차가 빨라지는 것보다 동에서 서로 이동해 느려지는 것이 적응에 편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힘들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5차전을 치러졌던 알링턴과 보스턴의 거리도 1,700마일 정도에 1시간의 시차가 있었다.

‘이거 1회부터 머리 복잡하네. 일단 하나하나 풀어야지. 일단은 존 체크부터…’

따악-

“파울.”

‘악! 놀래라.’

볼 선언을 받았던 아웃코스 존 안쪽으로 조금 더 붙였더니 여지없이 배트가 따라 나왔다. 가볍게 밀어 친 타구가 총알같이 날아가 아슬아슬하게 1루 쪽 라인 바깥쪽에 떨어졌다. 라인 안쪽이었다면 2루가 될 만한 타구였다.

‘한 30cm쯤 비켜나갔나?’

심판의 존이 아니라 타자의 존 파악이 먼저 된 것 같다. 그쪽은 심판의 판정이 스트라이크가 되든 안 되든 넣으면 타자의 배팅존에 걸려서 위험하다가 결론이다.

타악-

비슷한 코스에 슬라이더를 하나 더 던졌다. 앞 공은 싱커여서 공 끝이 안쪽으로 말려드는 구질이고 이건 반대쪽으로 움직이다. 물론 치지 않으면 볼이다. 기대했던 대로 배트는 끌려 나왔고 조금 전보다는 훨씬 빗맞은 파울 타구가 나왔다.

‘음. 괜찮네. 이렇게 좀 쳐주면 편한데…’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줄타기는 언제나 흥미진진하다. 위험한 지점이라고 안 던지지는 않는다.

‘몰라서 겁나는 거지 미리 알고 있으면 이용할 수 있는 거라고.’

위험을 인지하고 위험지점을 넘나드는 피칭이 내 투구의 본질이다. 피네스 피처는 그렇게 살아간다. 심판만 존 설정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불확실성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경기라 실제의 존과 개인이 느끼는 존의 위치가 항상 같을 수는 없다.

‘이래서 재미있는 게임이지.’

틱-

인코스로 붙인 투심에 타자의 배트가 다시 나왔다. 스윙도 관성이 작용하는 것 같다. 공 세 개에 세 번의 스윙 결과는 타구를 유격수 앞으로 유도해 냈다. 유격수 - 2루수- 1루수로 이어지는 깔끔한 병살이 나왔다.

‘에구구, 한숨 돌렸네.’

2루 주자가 3루로 갔지만, 투아웃 3루는 큰 부담이 아니다. 1루에서 아웃된 레인저스의 타자가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면서 쓰고 있던 헬멧을 신경질적으로 벗어 던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오호라. 이거 바람직하네.’

구장이 떠나갈 듯 울려 퍼지는 관중의 함성과 상대 팀의 분노에 찬 모습 이런 것에 피가 끓는다.

‘이제 감 잡았어. 레인저스는 이제 끝난 거야.’

따악-

‘아이, 그래도 4번 타자인데 좀 신중했어야 하는 건데…’

바로 좌전 안타를 맞아 버렸다. 상대의 흥분에 나도 덩달아 흥분하고 만 것 같다.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잖아. 열 좀 내리고… 다음 타자 잡으면 돼.’

마운드에서 중얼거리며 마음을 달래는데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설레발은… 하아! 곤란하네. 곤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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