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97화 (197/200)

197화. 2031 챔피언십 시리즈 (3)

“왜 이렇게 순조롭지?”

“그것도 불만의 원인이 되는 거야?”

“불만이 아니라 좀 이상해서…”

원래 안 좋은 예측이 들어맞는 거지 좋은 일은 갖가지 사연이 생겨서 무산되기 일쑤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류의 유행가 가사는 있지만, 좋은 전망으로 대박을 터트렸다는 가사는 들어본 기억이 없다.

“경기 잘 풀려서 좋기만 한데 왜 그래? 강팀이 기세를 탔는데 이기는 게 당연하지. 이게 이상해? 우리가 이기고 있어서 기분이 안 좋아?”

소르카가 좋은 일에 토 달지 말라는 식으로 눈을 부라린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의 기분이 하늘 끝에 닿아 있는 것 같았다.

‘완봉승 한 번에 이 정도면… 두 번 했다가는 아예 날 잡아먹으려 들겠네.’

3차전을 큰 점수 차로 낙승하고 4차전마저 소르카의 호투에 힘입어 쓸어 담으면서 오늘 이기면 시리즈가 끝나버리는 상황이 되었다. 심지어 오늘 경기도 1회 초 공격이 끝난 지금 3:0이다.

배수의 진을 치는 심정이었는지 로테이션 순서로는 우리와 1차전을 치렀던 투수가 등판해야 하지만, 2차전에서 호투했던 1선발을 3일 휴식 후 마운드로 올렸는데 첫 회부터 우리 타자들에게 먹잇감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3일 휴식이 좀 짧았나 봐. 2차전 때 그 공이 아니던데…’

아주 희망적인 상황이긴 한데 그래서 무엇인가 찜찜하다. 지난 두 번의 포스트 시즌을 치르면서 이 정도까지 순조로운 시리즈는 처음인 것 같다.

1승 1패 할 때까지만 해도 머리 좀 아파질 것 같더니 갑자기 쉬워도 너무 쉬워졌다.

‘진짜 그때 로저스가 했던 말처럼 되어 가는 건가?’

지난 두 경기에서 컵스의 타선은 나와 소르카에게 철저하게 털렸다. 3차전에서 나를 상대로 6회 1득점. 뒤에 나온 투수들에게서 몇 점 더 뽑아내기는 했지만, 12점 차이가 벌어진 경기에서 그건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제는 소르카에게 완봉까지 헌납하고 말았다.

타격의 팀이라고 하더니 그 타격은 일정 수준 이상의 투수들에게는 안 통하는 타격이었던 모양이다.

‘로저스가 1차전 때 5실점을 했었지. 오늘은 어떨까? 자기 말대로라면 기세가…’

따악-

기대감을 품자마자 우전안타가 터져 나왔다.

‘해럴드 쿠마. 역시 좋은 타자네.’

나와 소르카에게는 죽을 쒔지만, 로저스는 그 기준에 못 미치는가 보다. 저런 1번 타자는 조금 부럽다. 타격이 강점이라 불리는 팀의 공격을 주도하는 타자다운 깨끗한 좌전안타였다.

“이대로 물러나지는 않겠다 이건가?”

“안타 하나로 그렇게 말하긴 어렵지 않겠어?”

소르카의 무한 긍정론은 다음 타자에게 바로 깨졌다.

따악-

“헐! 또 안타야.”

“으응. 제법 강하게 나오는군. 로저스가 조금 흥분했나 봐. 승부를 서둘렀어. 오늘은 타격전으로 흘러가려나? 우리 타선도 타격감을 회복했으니까 한두 점 주어도 별 상관없어. 호흡을 좀 길게 가져가면 괜찮을 거야.”

이건 흡사 나온 결과에 원인을 가져다 붙이는 꼴이다.

‘우리 타선과 지금 이 장면이 무슨 관련이 있다고… 로저스가 털릴 기미가 보이니까 우리 타격 칭찬이 왜 나오는 거야?’

선발 투수에게 기대감을 표현하다가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으니까 우리 타선 상태가 좋아서 괜찮다고 말을 돌린다. 참 익숙한 화법이다. 만일 우리 타격이 막히는 때가 오면 그때는 또 무엇이라 할지 궁금하다.

“볼.”

느닷없이 피치아웃이다.

‘설마…’

일어서 외곽으로 완전히 빠진 공을 잡은 베그웰이 송구 동작을 취했지만, 송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주춤주춤 그라운드 전면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이 장면에서 무슨 작전을 걸어. 정말 도루 좋아하는 팀이네.’

1, 2루 주자 모두 타이밍을 빼앗겨 루와 루 사이에서 굳어버리는 모습이 나왔다. 런다운(Rundown)에 걸렸다. 이건 더블 스틸을 시도하려다 작전을 미리 간파당했을 때 나오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런 앤 히트였나 보네.’

아마 초반부터 투수를 흔들어 버리려는 의도였겠지만, 그 의도는 실패했다.

‘로저스 너 얕보였던 거야.’

작전의 선악을 논할 위치는 아니지만, 너무 과감했다. 포스트 시즌에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을 노리던 팀들은 거의 망했다.

멈칫했던 2루 주자가 결심한 듯 2루 쪽으로 슬금슬금 움직인다. 2루로 송구를 하기에는 좀 애매하다. 100% 잡을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는 위치에서 주루를 멈추었다. 차라리 멈추지 않고 3루로 달려줬으면 완전히 아웃시킬 수 있는 타이밍이 나왔을 텐데 아깝다.

‘뭐! 꿩 대신 닭. 이런 말도 있잖아.’

선행주자를 못 잡아서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이러면 1루 주자는 무조건 2루로는 못 간다. 1루로 복귀해야 하는데 베그웰이 앞으로 걸어 나오면서 1루와의 거리를 좁혀버렸다. 2루까지는 멀지만 1루까지는 가깝다.

로저스 역시 런다운 플레이를 준비하기 위해 1루 쪽으로 이미 몸을 움직였다. 약속된 플레이가 잘 이루어졌다.

“아웃.”

1루 주자는 머리가 하얘졌는지 귀루 시도조차 못하고 그대로 넘어온 공에 태그아웃되어 버렸다.

‘음. 이걸 전형적인 경험 부족이라고 하던가?’

좋은 방향으로 움직이던 기세에 스스로 찬물을 끼얹은 꼴이다.

‘클린업 트리오에게 맡겼어야지 뭐 하는 짓이야.’

이건 전적으로 벤치의 미스다.

‘그러고 보니 벤치도 젊네.’

젊다고 다 좋은 건 아니다. 성공하면 과감 실패하면 무모다. 젊었을 때 과감하게 시도한 일은 대개 실패한다.

‘소수의 성공은 과감해서 얻는 것이 아니고 그 실패의 과정에서 얻은 경험 축적으로 이루어지던데… 이걸 아는 건 경험이고… 뭐! 다 그런 거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금의 내 성공은 그런 경로를 거친 것 같다.

로저스는 급격하게 안정을 찾았다. 다음 타자를 범타 처리했다. 2루 주자가 3루까지 갔지만 이미 투아웃이다. 이제 안타가 아니면 점수가 나지 않는다. 외야플라이나 단순한 내야 땅볼에 점수를 주는 위험이 없어지면 투수는 훨씬 과감하게 던질 수가 있다.

‘홈런만 조심하면 돼. 에고, 말이 씨가 될라.’

말한 건 아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스트라이크.”

타자의 시원한 헛스윙이 나왔다. 유인구에 어김없이 배트가 돌아갔다. 이건 마음의 여유가 가져다준 스트라이크다. 아마 원아웃에 루가 차 있었다면 로저스가 저런 식으로 던지지는 못했을 거다.

이제 볼카운트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

타자는 태연한 척하려 하지만 몸이 굳은 것 같다. 이걸 위축이라고 한다.

‘내년에는 좀 나아질 거야. 아! 다시 올라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과감하게 찔러 넣은 하이 패스트볼에 다시 타자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예쓰! 바로 이거지. 거봐. 내가 잘 풀릴 거라고 했잖아.”

소르카의 흥분이 실린 고함 소리가 귓전에 울린다.

“그래. 니 말이 맞아.”

굳이 토 달지 않고 순순하게 동의를 해줬다. 경기가 잘 풀리고 있는데 굳이 반대의견을 내고 싶지 않았다. 이건 컵스에게는 경기가 꼬였다는 뜻이다.

‘우승 파티는 원정 경기보다는 홈이 좋은데…’

이 정도면 원정에 동행한 클러비(Clubby)들이 파티 준비를 시작했을 것 같다.

***

1회가 양 팀에게 모두 고비였다. 위기를 잘 넘긴 로저스는 순항 중이고 기회를 걷어 차버린 컵스는 반전의 계기를 다시 못 만들고 있었다.

6회 현재 스코어는 6:2 로저스가 포스트 시즌에 등판한 게임 중 최고의 피칭을 보여준 게임인 것 같다.

“이제 적당히 하고 내려와도 될 것 같은데…”

“아직 공이 괜찮잖아. 개인적으로 욕심이 생기지 않겠어? 퀄리티 스타트 정도는 하고 싶겠지.”

“포스트 시즌에 그런 게 중요해? 감독이 가만히 두지 않을걸. 주자 하나라도 내보내면 바로 교체할 거야. 지금 던질 투수는 남아돈다구.”

벤치에서 오늘 끝낼 결심을 했다. 나와 소르카를 제외한 모든 투수가 불펜에 대기 중이었다.

“로저스가 내려오면 아마 드로이넨이나 존슨을 올리겠지.”

소르카의 생각에는 나도 동감이다. 우리 감독이 정규 시즌에는 로테이션의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지만, 포스트 시즌에서는 사람이 달라졌다.

승부를 결정지어야 하는 순간이라고 판단을 내리면 뒤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 무지막지한 물량 공세를 하는 걸 여러 번 봐왔다. 오늘 이기면 끝인데 망설일 게 없다.

더군다나 아메리칸 리그 쪽은 레드삭스와 레인저스가 어제 경기까지 시리즈 스코어 2:2로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챔피언십의 주인공이 결정되려면 최소한 두 경기는 더 치러야 하고 그건 월드시리즈까지 최소 3일의 휴식이 보장된다는 뜻이다.

“아! 볼넷이네.”

로저스가 풀카운트에서 선택한 볼은 의외로 느린 커브였다. 로저스는 브레이킹 볼에 대한 컨트롤 능력이 최상급은 아니었다. 그리고 커브를 잘 던지는 투수도 아니어서 패스트볼이나 주무기인 슬라이더를 던질 것으로 예상했는데 역으로 볼 배합을 가져갔다.

타자도 허를 찔린 듯 꼼짝 못 하고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주심에게서 볼이라는 판정이 나와 버렸다.

“들어간 것 같지 않았어?”

“그런 거 같긴 한데… 그렇지만 어쩌겠어. 주심이 아니라잖아.”

바로 타임이 걸리고 감독이 마운드로 향했다. 로저스는 체념한 듯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 존슨이 나오네.”

“후훗. 볼 판정이고 뭐고 간에 구위로 밀어붙여서 끝장을 내려는가 보군. 어쩌면 그게 정답이겠지. 넉 점 여유가 있으니까.”

“존슨이 6, 7회를 책임져 주면 8회 애덤 9회 체이스 순이겠네. 드로이넨은 예비로 남겨두고. 컵스 감독 머리에 지진 날 것 같은데…”

과장이 아니라 같은 팀인 내가 들어도 갑갑해지는 투수 운용이다.

로저스는 더그아웃으로 온 뒤 아이싱 대신 게임 관람을 선택했다. 더그아웃의 선수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한쪽 구석에 팔짱을 끼고 섰다. 표정에서부터 복잡한 마음이 드러난다.

‘이 정도면 네 역할 충분히 한 거야. 뭐가 그렇게 부족한 것 같아. 하긴 이게 바람직한 걸지도…’

현실에 만족하면 안주하게 된다. 로저스처럼 젊은 선수는 더 발전할 여지가 있다. 솔직히 부럽다. 나도 어느새 새로운 것을 추가하기보다는 가진 것을 지키는 쪽으로 마음이 돌아가고 있었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나이가 드는 것 같다.

“스트라이크.”

초구부터 100마일이 나왔다. 상대 팀뿐만이 아니라 관중석마저 술렁이고 있다.

‘작정하고 나왔네. 일찍부터 몸을 풀었나 봐. 도대체 언제부터 준비시킨 거야?’

정말 이럴 때는 무자비한 라드 감독이다.

“스트라이크.”

‘헉!’

이번엔 101마일이다. 칠 테면 쳐 보란 듯 한가운데를 노려 던지고 있다. 저 구속으로 세밀한 컨트롤은 어렵다. 계속 구속이 이렇게 유지되면서 존을 통과하면 단기간에 공략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뜬금포 홈런은 몰라도… 연타는 안 되지.’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졌다. 이제 진짜 월드시리즈를 준비해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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