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2031 챔피언십 시리즈 (2)
“아웃.”
연속적인 심판의 콜이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끓어오르던 경기장의 열기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거봐. 운이란 게 다 이런 거라니까.’
삼자범퇴는 아니었지만 세 타자만 상대했으니 결과는 그것과 별 차이 없다. 흥분한 관중에게 찬물 한 바가지를 끼얹었다. 급격하게 조용해진 리그리 필드의 상태가 아주 마음에 든다.
‘겨우 원아웃 1루에서 점수 나길 기대한 거야? 날 너무 낮춰보지 말라구.’
점점 이 경기장에 적응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게임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어떤 감이 올 때가 있다.
‘별거 아닌 상황이었는데 왜 여기서 고비를 넘긴 것 같은 느낌이 들지? 나쁜 예감은 아니잖아. 좋은 게 좋은 거지. 긍정적 마인드가 중요해.’
사실은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포스트 시즌에서의 투구는 같은 이닝을 던지더라도 그 피로도가 정규시즌의 두 배쯤은 되는 것 같다.
어깨를 으쓱이며 더그아웃으로 돌아와 앉았다. 실점하지 않는 것에만 몰두해 신경을 좀 곤두세웠더니 그렇게 긴 시간 투구한 것도 아닌데 몸이 좀 늘어진다. 하지만 고작 2점 차이다. 아직 마음을 놓을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이럴 땐 우리 공격 시간이 좀 길었으면 좋겠다.
따악-
물병을 집으려던 손이 저절로 멎었다.
‘응? 이게 무슨 일?’
6회 초 첫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자마자 초구에 우측 펜스를 넘겨버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번 이닝 우리 공격은 8번 타자부터였다.
‘크로포드가 올 시즌 홈런이 있었던가?’
보통 한 시즌을 풀타임으로 출전하면 600타석쯤 서게 된다. 메이저리그의 규정 타석이 502타석이다. 전체 경기 수 162게임에 3.1타석을 곱하면 그게 규정 타석 수다.
‘대박이네.’
이 홈런이 크로포드의 시즌 첫 홈런이라면 1/600의 확률이 터진 것이고 두 번째면 1/300이다. 내가 자이언츠에서 뛴 지난 3년간 내 등판일에 크로포드가 홈런을 친 적은 없었다. 이건 확실하다. 자주 일어나는 일은 헷갈릴 수도 있지만 단 한 번은 기억이 아주 잘된다. 그 한 번이 없다.
홈런은 고사하고 안타도 드문드문이었는데 너무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환영 인사에 동참했다. 정말 야구 오래 하고 볼 일이다.
따악-
‘이거 뭐지? 오늘 단체로 약이라도 한 거야?’
9번 타자 패터슨까지 2루타를 때려냈다. 기시감이 밀려온다. 이런 모습을 작년에는 가끔 봤었던 것 같다.
‘이런 모습이 나오면 그때마다…’
하위타선에서 공격의 물꼬가 터지는 날 작년의 우리 팀은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대량득점을 했었다. 올해는 거의 나오지 않았던 장면인데 무엇 때문이지 지금 이 상황이 자꾸 작년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이거 어쩌면…’
그동안 치러진 디비전 시리즈 5번의 경기와 2번의 챔피언십 경기에서 그리 인상적이지 않던 타선이 대폭발을 일으켰다. 연속적인 안타의 폭풍이 몰아쳤다.
‘뭐라고 할 말이 없네.’
지금 5번 헌트 타석인데 이번 이닝에만 홈런 하나와 2루타 2개, 단타 3개다. 연속 6안타가 터지는 동안 4득점을 했고 아직도 아웃 하나 없이 주자 1, 3루다. 컵스가 투수 교체를 두 번씩이나 하면서 이 불길을 꺼보려 애를 썼지만 아무 소용없는 발버둥이었다.
‘정말 끝나버렸네.’
순식간에 스코어가 7:1이 되었지만, 몇 점이 더 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기세다.
“오늘 일찍 쉬어도 되겠어.”
로저스다. 한동안 무표정한 얼굴로 더그아웃에서 묵묵히 경기만 지켜보더니 1차전 승리 이후 표정이 살아났다. 원래의 활기가 조금씩 돌아오고 있는 모습이다. 확실히 승리는 만병을 치료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늘 경기가 나름 접전이 유지되고 있어서인지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는데 승리의 기운이 넘실대기 시작하자 더그아웃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 것 같다.
“너무 몰아치는 것 같아서 이젠 조금 걱정이 될 지경이야. 오늘 경기는 석 점으로도 충분했는데 이런 거 내일 좀 해주면 안 되나?”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이미 들어온 점수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에서 웬만한 말쯤은 농담으로 여겨진다.
“하아! 또 잘난 척하긴…”
“내가 무슨 잘난 척을 했다고… 척이 아니라 잘난 걸 내가 어쩌겠어. 무를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풋! 나 참! 아니라 하고는 싶은데… 차마 부인할 수가 없네. 잘난 에이스님께서는 오늘 일찍 쉬시지요.”
이런 선을 넘는 발언을 하는 걸로 봐서는 로저스의 기가 좀 살아나긴 한 것 같다.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언제 선수에서 코치로 전직을 한 거야?”
“이 상황에서 이 정도 예상은 관중이라도 할 수 있는 거라고. 공격이 아직 끝나지 않아서 그렇지 끝나면 바로 코치가 이야기할걸? 잘되었지 뭐야. 쉬엄쉬엄 던지든지 일찍 끝내고 쉬든지 선택할 수 날이 그렇게 쉽게 오는 게 아니잖아.”
따악-
조금 둔탁한 타격음이 들려서 이제 한 명 죽나 보다 싶었는데 얼핏 눈에 헌트의 팔로 스로우 동작이 들어왔다.
‘배트가 끝까지 돌았어.’
정말 노련한 선수다. 순간적 판단으로 마지막까지 타구에 힘을 실었다. 막히는가 싶던 타구가 기어이 유격수를 넘어갔다.
“그래. 달려.”
로저스의 고함과 함께 3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왔다. 8:1이 되고 다시 주자 1, 2루다. 아직 무사다.
‘정말…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고… 끝내주네.’
“So. 내일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여기까지가 컵스의 한계인 것 같아.”
득점 주자를 환영하는 대열 속에서 로저스가 낮게 속삭였다.
“한계라니 그게 무슨 뜻이야?”
원래부터 로저스는 심심찮게 헛소리도 곧잘 했었다. 기가 살아나니 그 스타일이 다시 나오는 것 같다. 득점한 선수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자리로 돌아와서도 로저스의 말은 계속되었다.
“말 그대로지. 애초에 컵스는 투타가 안정된 팀이 아니었잖아. 아주 엉망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포스트 시즌 진출 팀 중에서는 거의 최하위라고 생각해.”
“그래서?”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다는 것 자체가 하위전력으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정규 시즌 162경기를 치르는 동안 운과 같은 변수는 거의 걸러진다.
‘최하위? 그걸 어떻게 측정할 수가 있어. 야구는 아무리 모르는 거라고 하지만, 챔피언십에 올라오는 게 운으로 될 것 같아?’
그래도 무슨 말을 하는지 일단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와일드카드 시리즈에서 다저스. 디비전 시리즈에서 카디널스를 잡은 게 전부 운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부분적으로 운이 작용한 면은 분명히 있다고 봐. 그리고 그것에 플러스해서 항상 벼랑 끝에 선 것처럼 승부를 벌였어.”
“음. 그런 부분은 있었지.”
“사실 컵스는 타격이 강한 팀이지 투수력으로 승부하는 팀이 아니잖아. 두 번의 시리즈를 거치면서 무리를 많이 했지. 겨우 버텨주던 투수력이 이제 한계에 온 것 같다고.”
‘이건 좀 순화한 표현인 것 같은데…’
돌려서 하는 이 이야기를 풀어보자면 우리 타선이 포스트 시즌에 진출할 급 정도의 투수를 상대로는 많이 밀렸으나 무리한 투수 운용으로 컨디션이 저하된 투수나 급 낮은 투수가 나오면서 쳐내고 있다는 소리다.
“니 생각에는 지금이 컵스가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는 한계다 이 말이네.”
로저스가 이렇게나마 말을 가려서 하는 걸 보니 무턱대고 지르는 말처럼 들리지는 않는다.
‘음. 희망이 좀 많이 섞여 있는 것 같은데… 음. 나름 그럴듯한가?’
반박하자면 못 할 것도 없지만 이런 나쁘지 않은 전망에 굳이 토를 달고 싶지가 않다. 말이 씨가 된다라는 걸 전적으로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예전부터 좋지 않다고 하는 걸 애써 할 필요는 없다.
‘뭐! 로저스의 말이 맞으면 좋고 아니라도 손해날 건 없으니까.’
우리가 이렇게 수군거리는 사이에도 쉴 새 없이 공격은 이어졌다. 타자 일순하며 아웃카운트는 하나씩 늘어갔지만, 무려 8득점을 올렸다. 오늘은 어디가 하위타선인지 모르겠다.
따악-
투아웃이 되고 주자가 1루에 묶여서 여기까지인가 했지만 달아오른 타격감은 식지 않았다. 2번 알버트가 홈런을 터트리며 다시 2득점을 추가해 기어이 두 자릿수 득점을 만들었다.
‘13:1 하하핫. 이런 미친…’
“So. 다음 이닝까지만 하는 게 어떤가?”
리우드 투수 코치의 얼굴에도 함박웃음이 피어나고 있었다. 12점 차이에 한두 이닝 더 던지는 건 아무 의미도 없다.
“저 이후엔 누가…”
말을 뱉어놓고 아차 했다. 선수가 코치에게 할 말이 아닌 것 같아서다. 서로의 포지션은 침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의도는 없었지만, 오해를 받을만한 말이었다.
“그동안 안 던지던 애들에게 기회를 좀 줘봐야지. 걔네들도 포스트 시즌 로스터에 이름을 올려놓고 등판은 한 번 해봐야 할 거잖아. 오늘 기회가 좋아. 한두 이닝 맡겨보고… 괜찮으면 끝까지 갈 수도 있지.”
다행히 리우드 코치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대답을 해 주었다.
우리 감독이야말로 쓰는 선수만 쓰는 타입이다. 투수조 13명 중에서 포스트 시즌에 등판하지 못한 선수가 3명이나 된다. 심지어 그중에 한 명은 정규 시즌에서도 등판 이닝이 1이닝에 불과하다.
‘일단 7, 8회를 맡길 생각인가 보네.’
지금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점수 차가 좁혀지면 가차 없이 주전들을 내보낼 사람이 라드 감독이다.
‘몇 점까지 봐 줄까? 이번 기회에 좀 지긋하게 지켜봐 줘요, 감독님. 애들이 던질 기회가 있어야 자신을 증명하죠.’
지금 주로 나서고 있는 불펜투수들이 영원하지는 않다. 당장 애덤만 하더라도 언제 퍼질지 모른다. 우리 감독의 성향은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디서 검증된 투수를 사 와서 쓸 스타일이지 선수를 키워 쓰는 유형은 아니다.
‘자라날 기회는 주고 경쟁을 시켜야지. 가뭄에 콩 나듯 등판을 해서 어떻게 발전을 하냐구.’
“볼.”
타자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의욕이 보이지 않는다. 배트를 내지도 못하고 있다. 어서 목을 쳐달라고 하는 것 같다.
‘이해는 해. 12점 차이에 상대 투수가 리그 최저 평균자책을 찍은 투수라면 그럴 수 있지.’
적극적으로 던져주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이번 이닝이 너무 빨리 끝나서는 안 된다. 등판을 준비하는 투수들이 몸을 풀 시간을 충분히 주고 싶었다.
‘아마 원래 준비하던 투수가 아니라 부랴부랴 바꿨을 거야.’
여기서 한두 점 준다고 별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투구 수를 조절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서 최대한 시간을 끌어주고 싶었다.
‘타자 놈들은 믿을 수가 없어.’
이 정도 점수 차가 벌어지면 이기는 쪽이나 지는 쪽이나 별 의욕이 안 생기는 건 마찬가지다. 투수는 내가 챙겨야 한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하아! 좀 치라고… 파울도 좀 내고 해야 투구 수가 늘어날 거 아니야. 그게 안 되면 굴리기라도 해야지. 아까는 잘하더니 갑자기 왜 이래.’
이렇게 어이없는 삼진이 나오면 수비 시간이 너무 짧아진다. 정말 세상만사 내 마음처럼 되는 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