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95화 (195/200)

195화. 2031 챔피언십 시리즈 (1)

‘너무 멀리 갔잖아!’

고개를 돌려서 슬쩍 쳐다보는 시늉을 했더니 주자가 리드 거리를 조금 좁혔는지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올 시즌 내내 이게 불편했다. 이번 시즌 1루 주자의 리드가 보통보다 커지면 고개를 돌렸을 때 주자가 안 보인다. 올 시즌을 앞두고 투구 폼을 조금 수정했는데 그것이 원인이다.

투수의 투구 준비 자세는 일단 투구판을 밟는 것에서 시작한다. 나와 같은 오른손 투수는 홈 플레이트와 3루 사이로 비스듬히 선다. 이 자세가 문제였다. 투구 시 꼬임각을 크게 하는 것이 투구 폼 수정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예전보다 3루 쪽으로 아주 조금 더 돌아서 선다.

그랬더니 1루를 보는 것이 아주 불편해졌다. 주자의 리드가 커지면 주자가 시야에서 사라진다. 보려면 목을 더 돌려야 하는데 지금이 최대한이다. 그 한계에 딱 걸려버렸다.

‘예전 투구 자세가 주자 견제에 대해서는 마지노선이었나 보지.’

내가 웨이트 트레이닝을 많이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해가 갈수록 예전에 비해 근육이 발달하고 있는 것은 맞다. 어쩌면 목 주변 근육의 발달로 목이 돌아가는 각도가 좀 작아졌을지도 모르겠다.

필라테스라는 유연성 강화 훈련의 효과 때문인지 모든 관절 부위의 회전각이 더 커졌는데 목만은 예외인 것 같다.

‘이건 투구 폼 교정을 하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 아니, 고려 대상도 아니었지.’

이 단점을 알게 된 건 시즌이 시작되고 나서였다.

‘확실히 실전과 연습은 달라.’

투구 훈련 때 주자를 두는 경우는 거의 없다. 타자도 그냥 마네킹 하나 세워 놓는 수준이다. 스프링 캠프 때의 연습경기나 시범경기 때는 가끔 1루 주자가 있었지만, 그때 그들은 아주 열심히 주자의 역할을 하지 않았었다.

‘그러다 시즌 두 번째 경기에서 이 상황을 맞이했을 때의 황당함이란…’

최대한 고개를 돌리고 곁눈질을 하면 좀 더 옆쪽을 볼 수 있지만 마운드에서 투수의 모든 동작은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렇게 하면 너무 어색해서 후속 동작을 취하기가 애매해지는 느낌이다.

투구 자세를 원래대로 돌리기도 어려웠다. 겨울 동안 세심하게 새로운 폼을 몸에 적응시켰는데 시즌 중에 수정 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갑자기 그렇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것만 제외하면 새로운 폼은 아주 좋다. 꼬임각이 커지면서 주로 사이드 스핀을 이용하는 슬라이더의 각이 더욱 예리해졌다. 제어할 수 없는 슬라이더를 버리고 장착했던 새로운 슬라이더는 내 구종 중 공 자체의 위력만을 따지면 상대적으로 제일 모자라는 구종이었다.

‘공 끝의 휘는 방향이 다른 구종과 섞어 쓰니까 괜찮아 보이는 거지. 사실은 그저 그런 공이었어.’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그냥 보통 투수의 평범한 슬라이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랬었는데 새롭게 던질 수 있게 된 슬라이더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투구 폼을 수정함으로 생긴 장점에 비하면 단점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투구 폼을 다시 수정해야겠다는 생각이 아직까지 들지 않고 있다.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적응하면 되는 거야. 베그웰의 일이 좀 늘어나긴 했지만, 그것까지야 어쩌겠어.’

이번 시즌 1루 주자를 거의 보려고 하지 않았다. 1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은 그냥 1루 주자에게 보이기 위함이다. 원래는 내가 너를 신경 쓰고 있다는 의사 표현의 수단이지만 올 시즌 내가 하는 것은 그 흉내일 뿐이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상대는 내막을 모르니까. 마운드에서 투구 준비 동작을 할 때 발 각도가 조금 달라져 큰 변화를 느끼는 건 나 혼자만이다. 여간 주의를 기울여보지 않고서는 작년과 이번 시즌에 뭐가 달라졌는지 그 차이점을 찾기는 쉽지 않다.

원래도 내 투구 동작은 느리지 않았고 베그웰의 2루 송구 랩타임은 리그 최상위 수준이었다. 그래서 1루 주자들은 2루 도루 자체를 잘 시도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그대로 가는 것으로 마음을 먹고 적응하려 하니까 큰 문제없이 지금까지 흘러왔다.

견제하는 행동과 견제구를 던질 타이밍을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 고려해야 하는 베그웰은 더 신경 쓸 것이 많아졌지만 별말 없이 바뀐 상황에 맞춰 플레이 방식을 수정했다.

과거에는 도루 허용의 책임 소재가 포수라는 생각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다 투수들의 견제 능력과 투구 동작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이 점점 많아졌다.

아마 도루가 포수 책임이라는 생각은 도루 저지율이라는 포수 스탯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아무튼 나와 베그웰의 관계에선 베그웰의 부담이 아주 커졌다. 올 시즌 난 견제 동작을 취하는 타이밍과 견제구를 던지는 그 모든 것을 베그웰의 사인에 따라서 헸다.

‘그렇게 맡기고 나니까 좀 편해졌었는데 가끔 1루 주자가 있을 때 왼쪽 타자가 나오니까 그게 또 문제가 되더라고.’

베그웰이 1루 쪽을 잘 볼 수 있어야 견제에 관련된 플레이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는데 좌타자가 타석에 들어서면 몸에 가려서 1루가 잘 안 보인다. 베그웰의 말에 따르면 그런 경우 평소 포구 위치보다 조금 비켜 앉든지 해서 보는 각도를 좀 비틀어 해결한다고 하는데 어쨌든 그가 고생이 많다.

‘견제구 느리게…’

1루 주자가 다시 리드 거리를 넓히고 있는 모양이다.

‘귀찮게 왜 자꾸 움직여.’

천천히 발을 풀어 1루수에게 가볍게 공을 전달했다.

‘이게 견제라는 표현에 가장 잘 맞는 거 아닌가?’

우우우-.

내 견제구에 관중석에서 야유가 터져 나온다.

“시간 끌지 말고 승부해.”

“쫄았네.”

야유에 뒤이어 양념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F나 S로 시작되는 단어를 너무 많이 들어서인지 이 정도 표현은 굉장히 점잖은 말인 것처럼 느껴진다.

‘카디널스를 이긴 것으로 만족했나? 그래서 봐주는 건가?’

컵스와 카디널스의 라이벌리는 우리와 다저스만큼이나 유명하다. 역사와 전통을 이야기할 정도의 연차가 쌓인 팀들답게 팬들의 라이벌 의식 역시 길고 꾸준하게 계속 이어져 왔다. 1920년대 컵스 선수가 리그리 필드에서 카디널스 팬을 공격하고 이를 시발점으로 관중 5,000명이 패싸움을 벌인 이야기는 메이저 역사를 잘 모르는 나도 들은 적이 있을 정도다.

‘이게 벌써 100년도 넘은 이야기잖아. 그때 관중들이 다 흙으로 돌아가서 요즘은 얌전이들만 남았나 보지.’

컵스 팬은 팀에 대한 충성심이 넘치고 열성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긴 세월 동안의 조롱으로 고통을 강요받은 역사가 있었다.

‘염소의 저주가 끝나고 나서 많이 부드러워졌나 보지. 아니면, 내가 리그리 필드에서 던진 적이 별로 없어서 미운털이 박히기 전인가?’

올 시즌 컵스는 돌풍의 팀이었다. 와일드카드 2위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해 실질적 최강팀이라고 불리던 다저스를 와일드카드 시리즈에서 잡아냈고 이어 벌어진 디비전시리즈에서 내셔널리그 승률 1위였던 전통의 라이벌 카디널스까지 시리즈 전적 3:1로 완파했다.

두 번 다 절대 열세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보란 듯이 이겨냈다.

‘다저스는 시즌 막판에 맛이 가버려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카디널스를 잡은 건 좀 많이 의외였지. 이게 젊은 팀의 기세인가?’

컵스가 몇 년 전부터 묵묵하게 해왔던 리빌딩의 성과가 올 시즌 드러난 것 같다.

‘어쨌든 이번 시리즈를 컵스와 하게 되어 좋아진 거잖아. 카디널스가 올라왔으면 최종전을 우리가 가져올 수 없는 건데…’

홈에서 벌어진 1, 2차전에서 1승 1패를 했다. 큰 게임에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로저스가 소망하던 포스트 시즌 첫 승을 해냈다.

7이닝 5실점이 로저스 개인적으로 썩 만족스러운 결과물은 아니었겠지만, 오랜만에 터진 타선의 뒷받침을 받으며 상당히 많은 이닝을 소화해냈다. 보이는 것보다 내실이 있었던 승리였다.

그 승리로서 디비전 시리즈에서의 투수 운용이 결코 무리했던 것이 아니었고, 우리 선발진의 깊이를 믿은 벤치의 과감한 운용이었다는 것을 로저스가 증명한 셈이 되어 버렸다.

‘다 그렇게 포장되는 거야. 어쨌든 7이닝이나 먹어줘서 불펜도 한숨 돌렸고 두루두루 좋았으면 다 잘된 거지.’

이제 내가 보여줄 차례다.

“스트라이크.”

주자와 신경전을 벌이는 척하며 타자의 예봉을 피했는데 효과가 있다.

5회 말 현재 스코어는 3:1 우리가 두 점 앞서 있다. 1회 느닷없이 홈런을 맞으며 언짢게 게임을 시작했는데 이 정도면 상당히 잘 풀린 것 같다.

‘타격의 팀이라고 하더니 상당히 잘 치긴 하네.’

쉬어갈 만한 곳이 없는 타선이었다. 게다가 대부분 타자들이 무척 빠르다. 빗맞은 공이 양산되는 내 스타일상 상당히 거북한 스타일이다.

이번 회도 원아웃을 잘 잡아놓고 하위타선에서 다섯 번째 안타를 맞았다.

‘니들은 유행도 모르냐? 요즘 추세를 좀 따르라고. 크게 휘두르고 몰라? 홈런의 가치를 잘 좀 생각해봐.’

내야 땅볼은 내가 의도하는 것일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의도적으로 굴리고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타선은 처음 만난 것 같다. 그렇게 출루하면 또 2루를 향해 달린다. 도루 저지를 두 번 당하고 나서부터 좀 자제하는 듯 보이지만 게임 초반에는 정말 가관이었다.

시즌 중에 만났을 때 기억으로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나름 나를 상대할 맞춤 전략을 준비한 것 같았다.

이런 컵스 타선의 특징을 모아놓은 것 같은 타자가 지금 타석에 선 해럴드 쿠마다. 20-20이 가능한 1번 타자 출루율은 무려 4할을 넘긴다. 오늘 나를 상대로 선두타자 홈런까지 때려냈다.

‘니들이 조금만 더 침착하게 플레이했으면 한두 점 더 낼 수도 있었겠지.’

도루사 때문에 선두타자를 출루시키고 다시 안타를 맞았음에도 실점하지 않은 이닝이 있었다. 하지만 내게 최고 투수라는 이름이 그냥 붙여진 것은 아니다.

‘5안타 1실점은 집중타를 회피한 투수 능력이라고 봐줘야 하지 않겠어?’

컵스의 게임 플랜이 거슬리긴 하지만 그것에 크게 신경 쓰고 있지는 않다. 그라운드 볼러에게 컨택에 신경 써 어떻게든 배트에 맞히려 하는 타자는 대환영이다.

‘오늘 안타가 좀 나온 건 니들 운이 좋아서였겠지. 그 운은 곧 내개도 주어질 거야.’

한쪽에만 집중되는 운은 없다. 그런 일이 반복해서 생긴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실력이라고 부른다.

‘자! 이건 어때?’

스트라이크를 잡은 초구 슬라이더와 공 끝의 방향이 반대인 투심성의 패스트볼을 오른손 타자인 쿠마의 몸쪽으로 붙여버렸다.

빠른 볼은 높게 앞선 공의 대각선 방향으로 던지는 게 평소 내 투구 패턴이었지만 늘 그렇게 던지는 것으로 타자에게 각인되는 것은 피해야 하고, 그라운드 볼을 기대했기에 이번엔 낮은 스트라이크 존에 걸치게 던졌다.

틱-

그렇게 빠르지 않은 타구였다.

‘이걸 기대했니? 그런데 이번엔 방향이 안 좋네.’

타구는 낮은 바운드를 일으키며 내 앞으로 굴러왔다. 잡자마자 몸을 돌려 제대로 보지도 않고 훈련대로 바로 2루에 송구했다. 역시 기대한 장소에서 유격수 패터슨의 글러브가 공을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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