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상대가 소총을 쏘면 우린 대포를 쏜다
‘우리 감독 정말 무지막지하네.’
소르카가 마운드로 올라오고 있었다. 애덤을 원포인트 릴리프로 써서 8회 남은 한 타자를 맡기고 체이스가 당연히 9회를 매조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르카라니… 그가 마무리를 해본 적이 있나?’
그런 불펜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있다. 클로저는 전문성이 있는 보직이다.
‘이렇게 갑자기? 선발투수를 하다가 그냥 막… 할 수도 있겠네. 소르카 정도의 클래스라면 무엇인들 못 하겠어. 경험 풍부하고 구위 좋고…’
소르카는 한 게임을 책임질 수 있는 투수다. 팀의 입장에서 그런 투수를 1이닝용으로 사용한다는 건 심각한 전력 낭비다. 그리고 소르카는 전형적으로 몸이 늦게 풀리는 선발투수 체질이었다. 그런저런 이유로 굳이 불펜투수를 하지 않아서 그렇지 소르카가 하려고 들면 잘하긴 할 것 같다.
‘월드 시리즈에서나 가끔 나오는 특급투수의 마무리를 디비전 시리즈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체이스를 올려도 충분히 끝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벤치는 더 확실한 걸 원하나 보다. 체이스가 비록 4차전에서 역전을 허용하긴 했지만, 마지막 홈런이 나오기 전까지는 정타를 허용하지 않았었다.
‘그날은 일진이 꼬여서… 이거 미리 작정하고 준비한 건가?’
이 장면에서 상대적으로 워밍업 시간이 오래 걸리는 선발투수를 마무리로 올릴 수 있는 것은 적어도 5회 이전에 결심을 하고 준비했다는 뜻이다.
‘오늘은 승리에 운이 개입되는 것조차 차단하겠다. 이건가? 이것 참! 소르카는 왜 한다고 했을까?’
그 정도 되는 투수에게 무턱대고 등판을 강요할 수는 없다.
‘뭐! 어쨌든 본인이 동의를 했으니 나왔겠지. 그나저나 필리스가 넋이 나가지 않았을까?’
타석을 준비하는 타자의 표정으로 그 마음까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좋은 기분은 아닐 것 같다. 투수가 등판 중 자기 투구 이외의 것에 신경 쓸 여유는 별로 없다. 우리 공격 때 더그아웃에서 쉬면서 오늘 소르카가 안 보이네라는 생각을 얼핏 하긴 한 것 같다. 다음 등판 컨디션 조걸 때문에 더그아웃에 안 나왔을 거라 무심히 넘겼다.
‘지레짐작이었어. 이러면 챔피언십 시리즈의 선발 로테이션은 로저스부터 시작하게 되는 건가?’
이렇게 소르카를 당겨서 쓰면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그를 두 번 등판시키기가 어렵다.
‘나도 3차전 정도에나 등판할 수 있는데 이러면 소르카가 4차전 선발이… 아니, 오늘 짧게 던진 소르카가 3차전 내가 4차전인가?’
누가 되었든 3차전 선발은 4일 휴식 후 7차전 등판이 가능하다. 굳이 오늘 이렇게까지 해서 다음 시리즈의 로테이션을 어지럽혀야 할 정도의 게임인지는 득실을 다시 따져봐야겠지만, 어쨌든 소르카의 등판은 실행되었고 무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잘되기를 바랄 수밖에… 오늘 지면 바로 탈락인데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건가?’
소르카의 등판은 감독의 돌다리를 다시 두드리고 싶은 심정에서 나온 일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타당성 있는 결정 같기도 하다.
‘풋! 난 현역 은퇴하고 나서 감독하기는 어렵겠네.’
이렇게 짧은 시간에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건 감독으로서 결격 사유이다.
“파울."
초구 패스트볼은 볼. 2구째 느린 커브로 타자의 의표를 찔러 스트라이크. 3구째 몸쪽으로 붙인 패스트볼에 타자의 배트가 끌려 나왔다.
원 볼 투 스트라이크.
내가 투구 중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선택지는 유인구다. 존에 걸칠 듯 말듯 한 애매한 공을 코너에 떨어트린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그러나 소르카는 타자가 알고도 못 친다는 그의 무지막지한 슬라이더를 아웃코스에 꽂아 넣었다.
“크크큿.”
티를 안 내려 했는데 뒤틀린 웃음소리가 꾹 다문 입술을 비집고 나오고 말았다. 참을 수가 없었다.
‘흐흣. 역시 잘 던져. 나 때문에 2인자로 밀리긴 했지만 정말…’
저런 투수를 에이스에서 밀어낼 수 있었다니 난 정말 대단한 놈인 것 같다.
‘워어. 진정하자고. 너무 악당 같이 웃었나?’
어느 팀은 악의 제국이란 말도 들었는데 악당이면 어떠랴 싶다. 야구판에서 악(惡)은 강팀의 대명사나 마찬가지다.
2002년 쿠바의 투수 호세 콘트레라스가 망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아마 최강 에이스의 출현에 각 팀이 그의 영입 경쟁을 벌였으나 결국은 양키즈가 4년 3,200만 달러로 그를 품에 안았다. 경쟁에서 패한 레드삭스의 루치노 사장이 악의 제국이 이제는 촉수를 라틴 아메리카로 뻗치고 있다고 양키즈를 악의 제국이라 칭하며 돈 많은 강팀은 야구판에서 악이 되었다.
웬만한 야구팬이면 누구나 다 알만한 이 악의 제국이란 표현은 공식적으로 양키즈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미국 법원의 판결문에 악의 제국=양키즈란 표현이 나오면서 공적 효력을 가지게 되었다.
과거 이블 엔터프라이즈(Evil Enterprises)란 회사가 베이스볼 이블 엠파이어(Baseballs Evil Empire)라는 상표 등록을 시도한 일이 있었는데 야구에서 악의 제국은 양키스가 유일하다며 법원이 이 요구를 기각해 버렸다고 한다.
판결문에 악의 제국이 야구와 연관된 용어로 사용될 때 양키스만이 그 상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쓰여 있다고 하는데 아마 판결 내린 판사가 양키즈 골수팬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야구판에서 악당은 강한 팀에서 나오는 거다. 약팀의 눈물과 원망을 먹고 자란다. 전례가 그렇다. 우리가 월드시리즈 3연패쯤 하고 나면 악마라고 불릴지도 모른다.
8회 말 1사 2루에서 볼넷이 나왔다. 주자가 둘이 되면서 관중석이 다시 술렁이고 있다.
‘선두 타자 안타, 진루타로 1사 2루 그리고 볼넷… 스토리 좋네. 여기서 끝장을 내 버려.’
6번 필의 타석이라 한번 기대해볼 만하다. 필은 2할 5푼대로 타율이 그렇게 높은 타자는 아니지만 20개 내외의 홈런을 매 시즌 꾸준히 쳐온 타자다.
‘가끔 이런 장면에서 한 방… 아… 밤이 길어서 꿈이 많아진 건가? 이게 夜長夢多(야장몽다)였지.’
고 감독은 어울리지 않게 가끔 고색창연한 문자를 쓸 때가 있었다.
생각은 하되 너무 급하게 하지 마라
급하게 결정하다 보면 일이 어긋나는 수가 많다
그렇다고 생각을 너무 깊이도 하지 마라
생각이 너무 깊으면 일을 하기도 전에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가 대학 때 내게 가르쳐준 마운드에서 가져야 할 투수의 자세다. 원래는 思之勿遽(사지물거) 어쩌고 하는 아주 옛날 어떤 학자의 말이라는데 그렇게는 외우지 못하고 풀이한 내용만 기억하고 있다.
고 감독의 말에 의하면 세상사란 다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 있어서 꼭 야구용으로 만들어진 말이 아니더라도 다 통하게 되어 있다고 하는데 잘 모르는 내용이라 처음 들었을 때는 그렇거니 했었다.
정확하게 뜻을 알지는 못하지만 가끔씩 마운드에서 되뇌면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포수의 사인대로 공을 던졌다. 지금이 그런 상황인 것 같다.
‘단체 경기잖아. 내가 애태우며 간절히 바라도 안 될 일이 되지는 않는다고. 필을 믿어야지.’
옳은 판단을 위해 노력하지만 그게 절대적으로 옳다는 보장은 아니다. 난 부족함이 많은 야구선수일 뿐이다. 스스로의 판단에 자신이 있더라도 가끔씩 뒤는 돌아봐야 한다. 같은 사실을 다른 관점으로 본다고 그것이 틀린 것일까?
난 내 판단 잘못에 대한 책임만 지고 싶지만 단체 경기에선 그게 잘 안 된다.
필리스가 여기서 다시 투수를 바꾼다. 기존 투수가 승부하는 자세를 보이지 못하고 허무하게 볼넷을 준 것이 감독의 교체 의지를 재촉한 것 같다.
‘저런 미친…’
올라오는 투수를 보자니 기가 막힌다.
‘이러면 3연투인가? 아니 그전에도 등판하지 않았나?’
소위 말하는 필리스 불펜 3인방 중 오늘 등판하지 않았던 개릭 로우가 마운드에 섰다.
‘아무리 어제가 이동일이라 쉬었어도 이건 너무하잖아.’
그를 이번 시리즈 거의 매 경기에서 보았던 것 같다. 여기서 투수를 내린다는 건 만약 이 경기가 동점이 되어 연장에 돌입하게 되면 지금 올리는 투수를 최대한 길게 쓸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 팀을 떠나 같은 투수 입장에서 참 딱하다는 생각만 든다.
‘아무리 뒤가 없어도 그렇지. 올 시즌만 야구하고 말 것처럼 하면 어쩌자는 거야?’
이 교체는 무조건 더 이상 실점하지 않겠다는 자세다. 두 명의 주자가 있고 필리스가 이번 이닝을 끝내기 위해 필요한 아웃카운트도 두 개다.
여기서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감수하고 무조건 승부하겠다는 자세다. 필리스의 입장에서 가장 좋은 것은 삼진이다. 그걸 해낼 수 있는 투수를 내보낸 거다.
‘연투에 지치지 않았어? 거의 맛 갈 때가 된 것 같은데… 이상과 현실은 구별해야 맞는 거잖아.’
“스트라이크.”
투 볼 투 스트라이크가 되었다. 개릭 로우는 아직도 쌩쌩했다. 아직 한계까지는 멀었다는 듯 위력적인 포심패스트볼이 존을 파고들었다.
“개릭, 개애릭…”
자이언츠 선수들의 이름만 메아리치는 오라클 파크에 묘한 불협화음이 끼어들었다.
스카우트석의 중간에서 필리스 저지를 입은 세 얼간이가 필리스 투수를 목 놓아 부르고 있다. 그동안 존재감이 없어 잠깐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돌출했다.
‘아! 그거 위험하다니까. 왜 사서 위험을 자초하는 거야. 그건 너희 홈인 시티즌스 뱅크 파크에서나 하면 되잖아. 꼭 여기까지 와서 그러는 이유가 뭐냐고.’
그들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자이언츠 저지를 입은 일군의 사람들이 싫은 눈치를 보여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어휴! 쟤네들이 무슨 이유가 있겠어. 그런 걸 설명할 수 있으면 정상인이지.’
탁-
귓전을 맴도는 웅성임 가운데로 결이 다른 소리가 날아들었다.
‘막혔나? 하아! 유격수 정면이네.’
6-4-3으로 이어지는 군더더기 없는 더블플레이가 완성되었다.
‘으음. 이렇게 된 거 할 수 없지. 이기고 있잖아.’
이런 장면을 드물게 보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기대가 일그러졌다고 최종결과가 달라지는 않는다. 필리스가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대세를 거스르긴 어렵다고 생각한다.
“스트라이크.”
무표정하게 마운드에 오른 소르카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자기 할 일을 또박또박 해나가고 있었다. 장인(匠人)의 모습이다.
조금 전 우리 팀 공격으로 잠시 틈이 났을 때 그에게 인사라도 할까 하다 눈감고 묵상하듯 집중하는 모습에 다가갈 엄두를 못 냈다.
‘개인적인 성향, 투수로서 이룰 만한 건 거의 다 이뤘고. 아! 사이영상이 아직…‘
무엇이 소르카에게 저런 집중력을 발휘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스카우터석의 세 얼간이는 이제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한 명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질근질근 씹고 있다.
필리스는 대타를 연달아 내며 소르카의 투구 리듬을 흔들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틱-
막힌 타구가 2루수 앞으로 구른다.
‘끝났네. 그래 이게 클래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