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93화 (193/200)

193화. 에이스의 이기는 법

필리스 타자들을 만만하게 느끼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필리스 타자가 똑같은 건 아니다. 다저스의 카스트로 만큼은 아니었지만, 기록상으로 나에게 우세를 보이는 타자가 하나 있었다.

지금 내셔널 리그에서 강한 2번의 대표적인 예로 우리 팀의 알버트와 함께 거론되는 선수가 필리스 소속이다.

‘호세 마르쿠스라고… 홈런은 알버트보다 조금 많고 타율은 조금 떨어지지.’

30홈런이 가능한 3할 타자다. 알버트는 지난해가 최다 홈런 시즌이었는데 27개를 쳐냈다. 올 시즌은 두 개 적다. 마르쿠스는 지난 두 시즌 다 30홈런을 넘겼다. 그리고 그 두 시즌에서 나를 상대로 22타수 7안타를 쳤다. 타율로는 0.318이다. 거의 그의 시즌 평균 타율과 비슷하다.

이 사실은 그에게 나는 리그의 통상적인 투수 이상이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 기간 동안 난 1점대 평균자책을 찍었고 사이영상도 한 번 받았다. 즉, 리그에서 가장 적은 실점을 하는 투수였다.

‘그런 타자가 있음에도 내가 어떻게 필리스를 상대로 퍼펙트를 해낼 수 있었을 것 같아?’

마르쿠스는 얼핏 보면 내가 약세를 보였던 카스트로와 비슷해 보이는 유형의 타자다. 배팅스피드가 빠르고 스트라이크 존 밖의 공에도 거침없이 스윙을 한다.

‘나도 처음엔 비슷한 줄 알았어. 그런데 상대한 횟수가 많아질수록 전혀 다른 스타일의 타자라는 생각이 들었지.’

카스트로는 극단에 가까운 배트볼히터지만 마르쿠스는 그런 쪽과는 거리가 멀었다. 카스트로는 즉흥적인 성향이 강했다. 히팅존이 아주 넓지만, 매번 같은 방식으로 배트를 내지 않는다.

‘어떨 때는 아래로 많이 떨어지는 볼에도 스윙을 하지만 어떤 날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런 식이지.’

마르쿠스는 자신의 히팅존이 확고한 타자였다. 다만 그 존이 일반적인 타자들에 비해 많이 넓어서 배드볼히터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비슷한 구질을 가진 비슷한 코스에 대해 항상 거의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걸 알고 나서는 조금 편해졌어.’

그를 상대하는 나의 해법은 존의 경계면을 오고 가는 피칭이다. 마르쿠스는 카스트로만큼 부담스럽지 않았다. 카스트로에게는 유인구를 던지기가 몹시 껄끄러웠다. 잘 들어갔다 싶은 유인구도 느닷없이 맞아 나가곤 했다.

‘마르쿠스가 그렇지는 않지. 유인구를 던질만해. 그가 반응하면 성공. 실패하면 볼카운트 하나 손해 보면 그뿐이야.’

마르쿠스에게는 제법 맞았지만, 그가 별로 부담스럽다든가 그렇지는 않다. 그는 내게 계산이 서는 타자였다.

그리고 이번 시즌 카스트로를 상대하면서 느낀 점이 많았다. 카스트로에게 그렇게 고의볼넷을 남발할 수 있었던 건 타자가 아니라 타선을 상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원래 나는 볼넷을 주느니 안타를 맞겠다는 식의 피칭을 했었다.

‘원포인트 릴리프가 볼넷을 줄 수 있는 보직이 아니잖아. 대학 때는 태생적으로 어쩔 수 없었다고. 그리고 요즘은 환경이 달라져서…’

한국에서는 볼넷을 주느니 안타를 맞겠다가 통용되었지만, 메이저리그에서 그러다간 홈런을 맞는다. 그것 때문에 초창기에 홈런 공장이란 말도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 피홈런이 급격하게 줄어든 이유가 그런 식의 정면승부를 하지 않아서이다.

지난 일은 지난 일이고 아무튼 요즘 나는 볼넷을 별로 꺼리지 않는다. 볼넷 주는 걸 좋아하는 투수가 되었다는 건 아니고 예전만큼 피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볼.”

1차전에 상대했을 때 마르쿠스는 마음이 급했다. 브루어스와의 와일드카드 시리즈에서 맹활약을 펼친 영향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지나친 자신감이 독으로 작용했다.

‘풀타임 5년 차면 뭘 하냐고, 포스트시즌 경험이 없는데…1차전에서 단타를 하나 쳐내긴 했었지 투아웃 이후라서 별 영양가는 없었지만…’

4타석 3타수 1안타 1볼넷이면 괜찮은 활약을 한 것 같지만, 내가 받아들이는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오늘은 좀 다르게 마음을 먹고 나왔는지 적극적인 배팅보다는 먼저 공을 살피겠다는 모습이다.

타선이 좋으면 4강을 가지만, 투수력이 좋으면 우승을 한다라는 말을 고등학교 때 들었다. 야구는 투수놀음이라는 말과 연관성을 가지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 다 들어맞는 건 아니지만 타격감이라고 불리는 타자의 컨디션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보다 투수의 컨디션 유지가 상대적으로 쉽다는 건 맞다. 즉, 타자의 타격지표보다는 투수의 성적에 기복이 적다. 포스트시즌과 같은 단기전에서는 그 차이가 더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다.

‘오호! 기다려? 그렇게 마음에 여유가 있다고?’

절대로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한다. 우린 포스트시즌 시작 후 5게임째이지만 필리스는 8게임째다. 게다가 지난 몇 년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난 경기에서 강점이라고 하는 불펜을 쏟아부은 상태다.

‘중압감 높은 경기가 이어지는데 제대로 쉬지도 못했고 경험도 부족해. 게다가 팀은 전력손실까지 심하게 있는데 마음이 안 급해진다고?’

지난 일을 거울삼아 문제를 개선할 마음을 먹고 나왔겠지만, 생각만으로 현실을 바꾸는 건 어렵다.

그의 히팅존에 닿을 듯 말듯 한 낮게 떨어지는 싱커를 하나 더 던졌다.

“볼.”

또 참는다. 확실한 볼에만 스윙하기로 한 모양이다. 아무리 히팅존이 넓다고 하지만 외곽의 볼을 치는 것보다는 존의 중앙에 가까울수록 당연히 좋은 타구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하핫! 이럴 때 보면 베그웰도 나와 생각하는 방법이 비슷한 것 같은데 평소엔 왜…’

하나 더 빼란다. 당연히 스트라이크를 잡으러 가야 할 타이밍이지만 쉽게 가지 않는다. 타자가 다시 스윙하지 않으면 스트라이크 없이 쓰리 볼이 된다.

‘하다 안 되면 볼넷으로 보내면 되지.’

틱-

마르쿠스는 참아내지 못했다. 빗맞은 타구가 3루 방향으로 튀었다.

“아웃.”

1루심의 손이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손을 들어 박수 치는 시늉을 해 보였다.

‘3루수의 호수비를 칭찬하는 의미의… 음.’

1루로 뛰다 돌아서는 마르쿠스의 눈이 곱지가 않다.

‘내 박수가 자신을 조롱하는 의미라고 생각한 건가? 그거야. 겸사겸사… 물론 누가 물어보면 그렇게 말하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이 야구판은 너무 보수적이야. 이렇게 의사 표현에 제약이 있어서야…’

좋은 볼을 주지 않는다는 걸 타자가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 왜 쳤을까?

‘그것을 내가 정확히 알 수는 없지. 바보짓에 이유가 있겠어? 굳이 추측해보자면 급해진 마음과 좋지 않은 팀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불펜이라는 최대 강점이 불안해진 필리스가 이 경기를 이기고자 한다면 초반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 초반에 승기를 잡지 못하면 뒤로 갈수록 어렵다.

마르쿠스는 칼을 휘두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한발 물러설 수 있는 곳이 있었고 마르쿠스는 밀릴 수 없는 입장이었다. 보통은 2패 후 2연승 한 팀이 기세를 타는 법인데 오늘은 좀 이상한 것 같다.

‘이런 게 경험 부족이지.’

올 시즌 우리 팀은 참고 또 참으면서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했다. 급한 상황에서도 선발투수의 로테이션을 지키면서 묵묵히 전진했다.

‘아! 그건 아닌가? 로테이션이 지켜진 건 나와 소르카만인가?’

덕분에 내 몸 상태는 그렇게 나쁘지 않다. 시즌 초보다 못한 건 분명하지만 평균 정도는 유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필리스의 장단에 굳이 맞춰줄 필요는 없다. 상대가 이판사판의 마음으로 달려든다고 덩달아 내가 정면으로 싸워는 건 현명한 행동이 못된다.

다음 타자도 가볍게 마무리하고 1회를 삼자범퇴로 마쳤다. 좋은 출발이었다.

***

타악-.

조금은 소리가 둔탁했다. 타구는 맹렬히 뻗어 나갔지만 크게 걱정스럽지는 않다.

‘대개 이런 타구는… 주자도 없는 상황이라서…’

와아아!

오라클 파크가 떠나갈 듯 엄청난 관중의 환호가 터졌다.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여기는 우리 홈이다. 타구가 담장을 넘었다든지 했다면 이런 환호가 나올 리 없다.

‘외야에서 잡혔겠지.’

관중 반응으로 봐서는 조금 어렵게 잡은 것 같다. 하지만 어렵든지 쉽든지 간에 잡았으면 똑같은 아웃이다. 그 과정까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아! 공이 뜨고 있네. 내가 힘이 떨어졌나? 아직 힘 떨어질 만큼 공을 많이 던지지는 않았는데…’

그라운드 볼러에게 이건 빨간 불이 제대로 들어온 상황이다. 7회에도 두 개의 외야플라이가 나왔었다. 8회도 시작하자마자 외야로 공이 뻗었다.

‘88구라…아직은 괜찮은 것 아닌가?’

걱정스러웠지만 이제는 그런 것을 겉으로 티 내지 않을 만큼의 경험은 가지고 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필리스에게 내가 외야플라이를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다.

‘내가 100마일을 던지는 투수라면 구위가 떨어진 게 바로 티가 났을 텐데 이럴 땐 흐느적거리는 공이 도움이 되네. 필리스가 판단 내리기 애매할 때 한 타자 더 잡고…’

현재 스코어는 2:0이다. 4차전의 일도 있고 해서 가급적이면 내가 끝을 내고 싶었는데 그러기는 어려울 것 같다. 공이 뜨고 있다는 건 공 끝의 움직임이 무디어졌다는 거다. 피네스 피처에게 무브먼트는 곧 구위다. 확실히 포스트시즌 투구는 정규시즌에 비해 힘이 배는 드는 것 같다.

베그웰에게 교체 의사를 표현하는 사인을 보냈다. 교체 시기에 관한 것은 이미 전회에 벤치와 의견을 주고받았다. 이미 불펜 준비는 되어 있었다.

‘자! 이제 조금만 끌어주면 되겠지. 마지막 타자 잘 해보자구..’

“스트라이크.”

이제 공을 아낄 필요도 없다. 교체가 여유로우려면 불펜에 시간을 좀 더 줄 수 있으면 좋다. 그런 복합적인 이유로 초구를 뺐는데 기대하지도 않았던 타자의 스윙이 나와버렸다.

‘야! 뭐가 그렇게 급해. 이러니 나한테 질질 끌려다니다 게임이 이 꼴이 난 거잖아. 공은 좀 보고 휘둘러야지.’

8회에 두 점 뒤져 급한 마음은 알겠는데 하는 짓을 보고 있자니 공 던지는 내가 다 안타깝다.

“스트라이크.”

또 스윙이 나왔다. 2구도 스트라이크가 아니었다.

‘상대가 지금 눈감고 막 휘둘러주는데 거기 대고 스트라이크를 던져줄 투수가 있겠어?’

그라운드 볼 유도를 하고 싶은데 타자가 이렇게 공을 못 맞히면 많이 곤란하다.

‘응? 하이 패스트볼을 몸쪽으로? 하! 마지막에 삼진 잡고 끝내라고?’

굳이 그렇게 힘쓰지 않아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만 포수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타자의 스윙과 공과의 간격이 상당해 보였다.

‘풋! 맞춰주려고 했으면 애먹었겠네.’

투구 수를 좀 늘려 시간을 끈다는 애초의 계획과는 좀 달라졌지만, 관중의 열렬한 박수와 칭송을 받으며 마운드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어. 이제 결과를 기다리면 돼. 어? 이건 뭐지?’

내 뒤를 이어 던질 투수로 예상한 건 당연히 애덤이나 체이스였다. 아무리 4차전에 안 좋은 일이 있었지만 아직 포스트시즌은 많이 남았다.

“그런데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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