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필리스가 좋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돌아봤다.
관중석에는 자이언츠 저지를 입은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열렬한 환호를 보내는 그들은 우리의 승리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그래 이게 홈이긴 한데 오늘은 좀…’
흥분으로 달아올랐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다.
‘칼날 위에 선 기분이 이런 건가?’
주어진 연습구는 다 던졌다. 필리스의 1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고 있었다. 심판이 플레이 볼(Play ball)을 선언하면 2031시즌 디비전 시리즈 최종전이 바로 시작된다.
축구는 킥오프(Kick off). 농구에서는 점프볼(Jump ball)이라는 용어가 플레이 볼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차고 뛰고 놀고는… 각 종목의 특성을 반영한 거겠지?’
야구가 만들어져 시작된 초창기 시절 야구는 여가활동이었다. 그래서 팀 간의 승패 경쟁보다는 같이 즐기는 놀이라는 의미를 부여해 플레이 볼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는데 백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 많이 변화한 것 같다.
지금 저 홈팬들의 열광적 분위기를 바로 몸으로 받아들이면서 경기를 즐기는 건 어려울 것 같다.
‘프로선수가 경기를 즐기면서 한다는 건… 음.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프로 스포츠가 추구하는 본연의 모습은 뭐지? 돈을 위한 쇼 비즈니스인가?’
만약 저 관중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다간 살아남기 어려울 것 같다. 야구를 하는 경기장을 볼파크(Ball park)라고 한다. 이것 역시 플레이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야구가 공으로 하는 놀이라면 그 놀이의 장소는 공원(Park)이 어울린다.
‘소풍 가서 하는 여가활동인 건가?’
다른 구기 종목에서 경기장을 필드(Field, 전장)나 코트(Court, 법정)라고 부르는 것과 너무 대비된다. 경기 자체를 싸우는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그런 용어가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야구는 다른 구기 종목에 비해 기본적으로 천천히 진행되는 종목이다. 축구나 농구와 같은 게임은 공수를 굳이 나누지 않는다. 공격을 하다 바로 수비를 할 수도 있고 수비 전술이 공격 전술을 겸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야구는 인위적으로 공격과 수비를 나눠놓았다.
다르다는 것은 낯섦과 종종 동의어로 쓰인다.
‘야구에서 그 낯섦은 개성이 된 게 아닐까? 아! 모르긴 몰라도 축구나 야구를 하면 경기 중에 이런 생각할 시간은 안 생기겠지. 심판 선생님. 플레이 볼 선언 좀 빨리 하시죠. 꾸물대니까 별생각이 다 나잖아요.’
지난 경기와는 달리 홈경기다. 분위기가 달라지면 당연히 새로운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사실은 지난 경기에서 이겨 오늘 다른 구장에서 던질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바람 좋고 경치까지 좋은 정자를 찾기는 힘들다. 최선을 가지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 가질 수 있는 건 차선이다.
‘잘 알면서 왜 오늘따라…’
지난 두 게임 동안 2연패를 했고 그 두 번째 패배가 황당한 역전패였던 것 따위의 이유 때문에 괜스레 마음이 뒤숭숭해진 것 같다.
‘정말 병신 같은 패배이긴 했지.’
9회 말까지 3점 앞서 있다가 3점 홈런으로 동점 허용 후 백투백 홈런으로 바로 결승점을 줘 버렸다. 포스트 시즌 역사상 가장 극적인 승부 운운하는 기사가 수없이 뉴스 게시판을 장식했다.
패배 직후엔 어이가 없다 못해 허무할 지경이어서 기억을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지만 시간이라는 특효약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효과가 좋았다. 이제 이틀이 지나서 조금 무디어지긴 했다.
원래 승리의 이유보다는 패배의 이유가 다양하기 마련이지만 조금 지나서 생각해 보니 딱히 명확하게 그날 패배의 이유를 찾기가 어려웠다.
굳이 찾자면 베그웰이 9회 말 수비에 결장한 것이 평소와 조금 다른 일이었다. 9회 초 공격 중에 슬라이딩을 하다 살짝 발목을 삐끗했는데 당장 경기 뛰는 데 별 지장이 있지는 않았지만, 포수 수비란 것이 발목에 부담이 많이 주는 자세라 혹시 덧날까 그냥 교체를 해줬다.
‘그것을 문제라고 말하긴 어렵지. 3점 앞서 있었고 시즌 중에도 그런 식으로 리드한 경기에서 백업 포수가 마무리를 하는 것은 가끔 있는 일이었으니…’
우리 ERA 1점대의 마무리를 가진 팀이다. 체이스가 9회에 4실점을 하는 장면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날 체이스의 공이 나빴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날따라 이상하게 빗맞은 공들이 연속으로 안타가 되었다.
‘그리고 홈런… 그것도 사실은 잘 맞았다고 하기에는 좀… 유일한 실책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동점이 되었을 때 투수 교체를 못했다는 건데… 그것 역시…’
‘응?’
무엇 때문인지 좀처럼 나오지 않는 플레이 볼 선언을 기다리고 있는데 조금은 특이한 것이 보였다. 정면으로 보이는 홈플레이트 뒤 좌석을 통상적으로 스카우트 좌석이라고 부른다. 물론 스카우트만 앉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경기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위치라 그런 별칭이 붙었다. 더그아웃 뒷좌석과 함께 가장 선호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자이언츠 저지의 물결 사이로 필리스 저지를 입은 서너 명의 사람이 보였다. 필리스 모자까지 갖춰 쓴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하아! 이걸 용기 있다고 해야 하는 건지. 무모하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네.’
필리스의 극성팬들이 유명하긴 하지만 자이언츠도 그에 못지않다. 주 공격대상이 다저스 팬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팀에 우호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흥분한 극성팬들이 벌이는 폭행사고는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샌프란시스코의 클럽에 다저스 저지를 입고 나타났다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한 사람이 있을 정도다. 주로 혈기 넘치는 20대들 끼리 벌인 일이긴 했지만 어떤 계기가 생겼을 때 나이 많다고 봐줄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 않아도 말도 안 되는 역전패 때문에 분위기가 좋지 않은데… 이건 좀…’
오라클 파크에서 다른 구단 저지를 입으면 안 되는 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사람은 분위기 파악을 하고 살아야 한다. 그게 사회다.
오늘 이겨야 할 이유가 금방 또 하나 늘어난 것 같다. 할 수 있다면 사건 사고는 미리 예방하는 것이 좋다. 적어도 그런 노력은 필요하다.
‘당신들의 무사 귀가 때문이라도 이겨주지. 고마워하게 될 거야.’
눈웃음을 살짝 지었더니 눈매가 험해지며 엄지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나 참! 그 옷 입고 여기 나타날 때부터 정상적인 X은 아니겠지 싶더니만. 자해도 여러 가지로 하네.’
오라클 파크에서 자이언츠 선발 투수에게 도발을 하다니 정말 제정신이 아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다르게 반응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사고 발생의 원인이 되고 싶지는 않다.
필리스가 오랜만에 포스트 시즌에 진출을 하다 보니 팬심이 끓어올라 이런 일이 생겼다고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기로 했다.
작년과 올해 오라클 파크에서 빈자리를 찾기는 어려웠다. 역시 성적이 나오면 사람이 모인다. 특히 포스트 시즌에 이르러서는 재판매하는 좌석이 몇 배의 프리미엄이 붙어 후덜덜한 가격에 거래된다고 한다.
“플레이 볼!”
마침 알맞게 경기가 시작되었다.
5일을 쉬고 등판한 것이라 연습 투구 시 체크한 몸 상태는 최상에 가까웠다. 언제나 그렇지만 필리스는 만만한 상대다. 지난 1차전에서도 8이닝 1실점으로 압살하다시피 했었다. 2:1 승리여서 그리 편한 내용의 게임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가 편하게 느끼는 것만큼이나 필리스가 나를 껄끄러워할 건 확실하다. 지난 두 시즌 간 필리스 상대 내 ERA는 1점대 초반이었다. 이 정도면 심리적으로 압도하는 것이 가능하다.
휙-
“스트라이크.”
초구부터 타자의 마음이 너무 급했다. 게임 시작 후 선두타자라면 다음 타자를 위해서라도 공을 좀 오래 봐줘야 하는데 그런 마음이 1도 없는 것 같다.
‘어차피 못 치는데 적극적으로라도 배팅하겠다 이건가? 아니면 나한테 쫄아서? 아! 품위 있게 해야지. 필리스 타자들이 내게 부담을 많이 느끼나 보네.’
이런 상황이 즐거워 저절로 웃게 된다. 타자의 눈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아! 너무 티 났나? 야! 오해하지 마. 너 비웃는 거 아니야. 그냥 반사작용 같은 거라고… 그리고 여기 우리 홈이야. 니가 째려보면 어쩔 건데…’
마음이 너무 편하다. 지난 일은 지난 일이고 오늘부터 새 역사를 창조하면 된다.
“스트라이크.”
흥분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지 크게 휘두르고 나서도 타자의 눈매가 부들거린다.
필리스가 2연패 후 2연승으로 기세등등해지긴 했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다.
‘두 번 이기기 위해 너무 무리를 많이 했어.’
이번 시즌 필리스가 우리 팀에 비해 낫다고 평가받는 부분은 불펜의 두께다. 필리스의 전략은 간단했다. 초반을 비슷하게 끌고 가자였다. 그리고 탄탄한 불펜투수들로 후반에서 결정지으려 했었다.
그 전략을 3차전에서 한 번 성공시켰다. 확실히 그런 강점은 있었다. 일단 리드를 잡자 불펜의 핵심인 승리조 3인방을 동원해 중반부터 경기를 잠그는 능력을 보여 주었다.
‘거기까지만 인정이야. 그 이후는…’
4차전에서 초반에 선발이 무너져 벼랑 끝에 서자 뒤가 없는 필리스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3차전에서 모두 사용한 세 명의 불펜투수를 연투시켰다. 그리고 그들의 투구 한계 이닝을 넘겨버렸다.
‘그 상황이 이해는 가지만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어.’
4차전 이후 하루를 쉬긴 했지만, 그들이 정상적인 컨디션일 리가 없다. 그 3인방은 정규시즌에서 이미 각각 70이닝을 넘게 던진 상태였었다. 투수는 상당히 민감한 생물이다. 정규시즌에서 쌓인 피로에다 단기간의 무리는 어느 순간 반드시 탈이 나게 되어 있다.
‘그들이 오늘 다시 등판하더라도 정상 컨디션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지.’
만약 오늘을 어떻게 넘어간다고 해도 그런 문제는 언젠가는 터진다.
‘투수 운용하는 꼴을 보니까 너네가 더 올라가기는 어려울 것 같아.’
투수의 무리한 운용은 포스트 시즌에 올라온 팀이라면 누구나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이지만 필리스는 너무 심했다. 최악의 경우는 몇 시즌의 시간을 들여 불펜을 구축했는데 그 불펜이 다음 시즌에 부상 등의 이유로 주저앉는 것이다. 이미 그럴 가능성이 충분해 보인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4차전에 쓰라린 패배를 하긴 했지만, 선발진의 두터움이 사라진 건 아니다. 통상적으로 세 명의 선발로 치르는 디비전 시리즈에서도 여전히 어떤 형식으로든 5명의 선발을 고루 활용하고 있다. 이건 우리가 단순히 디비전 시리즈 승리만을 원하는 팀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론은 오늘 초반에 크게 실점하지 않으면 뒤로 갈수록 유리해질 수밖에 없는 경기라는 뜻이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의도치 않은 삼구삼진이 나왔다. 하이 패스트볼 승부를 위해 목적구 삼아 던진 외곽으로 흐르는 슬라이더에 타자의 배트가 여지없이 끌려 나왔다.
‘음. 오늘 되는 날인가 보네.’
긍정적 마인드가 중요하다. 오늘은 오늘의 해가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