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91화 (191/200)

191화. 워밍업은 언제나 어렵다

우승 축하 파티는 즐거웠지만 바로 주어진 3일간의 꿀 같은 휴식이 더 반가웠다. 가벼운 러닝과 스트레칭 겸해서 하는 필라테스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푹 쉬었다

작년에는 친한 선수들과 다 같이 모여 와일드카드 시리즈를 보면서 즐겼었지만, 올해는 정말 그런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첫날은 틈만 나면 자기 바빴고 둘째 날은 엄청난 허기를 느끼며 거의 하루 종일 먹어 대기만 했다. 육체적 피로는 잠으로 달래고 정신적 피로는 식욕을 충족시키면서 풀었다.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었지만 습관처럼 기본적인 운동은 하게 되더라고. 운동선수라는 건 어쩔 수가 없나 봐.’

삼 일째가 되어서야 겨우 정신이 좀 돌아왔다. 정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엄청나게 피곤한 시즌이었던 것 같다.

전화기도 꺼버리고 이틀을 보냈는데 이제 슬슬 현실의 일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우리가 디비전 시리즈를 누구와 치르게 되지? 아직까지 별다른 연락이 없었던 걸 보니 2차전에서 끝나진 않았나 보네.’

급하게 전할 사항이 있었으면 아버지에게라도 연락을 했을 것인데 지난 이틀간 어떤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일찍부터 어디로 가셨는지 오늘은 뵙지를 못했다. 밥도 혼자서 먹었다.

‘그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가 지구 우승팀 중 승률 2위니까 누구하고…’

지구 우승팀 중 승률 3위는 브루어스다. 이 팀과 와일드카드 승률 3위 팀이 3전 2선승제로 맞붙어 그 승자가 우리와 디비전 시리즈를 치르게 된다.

‘와일드카드 3위가 필리스였지.’

이것도 마지막 날 결정되었는데 우승파티 도중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났다.

꺼놓았던 전화기를 다시 켜서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볼까란 생각이 들었지만, 전화기가 너무 먼 곳에 있었다. 게으름뱅이 모드를 이틀간 유지했더니 지금까지 누워있었던 거실 소파를 떠나 2층의 내 방까지 가는 것이 너무 귀찮게 느껴졌다.

TV를 켜고 스포츠 채널을 틀었다. 시간이 대충 오후인데 중계를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오호! 빙고. 바로 찾았네. 4회에 4:2’

필리스가 이기고 있지만, 밀워키의 4회 말 공격이 진행 중이었다.

‘주자가 둘…’

초반부터 난타전 양상이다.

‘어느 쪽이 이겨야 유리한 거지? 내 입장에선 필리스가 편한데…’

필리스에게는 별로 나쁜 기억이 없다. 내 퍼펙트 기록도 그 팀을 상대로 세워졌었고 마주쳤을 때마다 그리 어렵다고 느껴지지 않았던 팀이었다.

그동안 꽤 많이 경기를 했었지만. 단 한 번도 그 타선이 부담스럽다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필리스를 만나면 심지어 운마저 내 쪽으로 치우쳐 나타나곤 했었다.

‘포스트시즌 경기는 내 입장만 생각하기가 어려워서…’

내가 1차전부터 출전한다고 해도 총 5차전으로 치러지는 디비전 시리즈에서 좀 무리하지 않은 이상 더 이상의 경기에서 등판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최종전에 등판할 수도 있지만, 디비전시리즈부터 최종전을 치러야 한다면, 냉정하게 말해서 우승전력이 아닌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1차전 등판 후 최소 두 경기를 다른 선수들이 맡아야 하는데 내 상성보다는 그들의 상성을 우선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천천히 생각 좀 해봐야겠네. 이번 시즌 우리 팀과 상대 전적이… 음. 비슷하네.’

오오랜만에 머리 좀 굴렸더니 잠이 솔솔 오기 시작했다. 이 졸음에는 소파에서 등을 떼지 않고 있는 자세도 한몫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상체를 일으키기가 싫다. 머리가 천근만근은 나갈 듯 무겁다.

“헉!”

갑자기 눈을 떴는데 TV가 혼자 빛을 발하고 있다. 분명히 야구 중계에 채널을 맞춰놓았는데 지금 화면에서는 푸른 잔디가 보인다. 야구장에 잔디가 없는 건 아니지만, 저 정도는 아니다.

‘생각보다 오래 잤나? 한 10분 지난 것 같은데…’

여기저기 채널을 돌려보았지만 내가 원하는 정보를 바로 알려주는 채널은 없었다.

‘에고, 전화기 가지러 가야 하나?’

꼼짝하기 싫은 날 휴식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누가 되었든 내일부터 나가봐야 하는데 계속 이런 식이면 곤란하지.’

겨우 마음을 다잡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사실 어느 팀이든 별 상관은 없잖아. 어차피 어느 팀이든 우리가 이겨!’

***

“지금부터 약 10년 전인 2020시즌의 시작 전 피타고리안 기대승률을 바탕으로 예상한 자이언츠의 성적은 30승 30패였습니다. 나중에 드러나지만, 실제로 그런 성적이 나왔었다면 포스트시즌 진출이 가능했었습니다.”

해리스 사장의 살짝 기우뚱했다.

“아! 그 해가…”

“예. 맞습니다. 시즌 60경기만 치러진 단축 시즌이었죠.”

“그 시즌은 참고자료로 활용하기에 너무 예외가 많은 시즌이었지 않습니까.”

해리스 사장에게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고 있었다. 7월 하순에야 시즌 개막이 이루어졌고 팀 이동에 제한이 있어 리그에 상관없이 가까운 지역끼리 10팀씩 묶어 3개 지구로 재편성되었다. 게임은 같은 지구 팀들끼리만 가능했다.

“그때 같은 지구 팀 중 원래 같은 리그 소속 팀과 10경기씩, 다른 리그 소속이었던 5개 팀과는 4경기씩 했었던 것 같군요.”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팀들을 묶어놓고 포스트 시즌 진출 팀은 원래 리그에 맞춰 8팀씩이나 선발했다. 16팀이나 포스트 시즌에 나갈 수 있었다.

“예 맞습니다. 그때 그랬었죠. 연장전 규정을 바꿔 승부치기를 도입한 혁신적인 해였죠. 심지어 더블헤더를 하면 7이닝에 경기를 끝내고…”

윌리스 단장의 거침없는 말에 해리스 사장은 점점 더 궁금해졌다.

“잘 아시면서… 하긴 잊어버리기에는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긴 하죠. 어쨌든 기준으로 삼기엔 적절하지 않다 싶은 해의 지표를 굳이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해 우리 팀 성적을 혹시 기억하시나요?”

사장의 질문에 단장은 다른 질문으로 답을 해왔다.

“5할 승률에 조금 못 미쳤던 것 같습니다. 포스트 시즌 진출 가능성에 대해서 직원들과 했던 이야기가 기억이 나는군요.”

“예. 맞습니다. 그해 실제로 나온 성적은 29승 31패였습니다. 포스트시즌 진출엔 한 발 못 미쳤죠.”

분명히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하는 말들일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도 해리스 사장의 머리는 쉽게 끄덕여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하셨던 말씀들이 감독 재신임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저는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군요.”

라드 감독의 재계약에 대해서 가볍게 의견을 주고받다 벌어진 돌발적인 일이었다. 단장이 갑자기 너무 진지해진 것 같아 해리스 사장은 조금 불편함을 느꼈다.

“야구라는 게임의 본질에 대해서 이해를 구하고 싶어서 드린 말씀입니다. 표본으로 삼기엔 부적절해 보이는 해의 기록마저도 예상치와 그리 큰 오차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기준으로 삼은 피타고리안 기대승률 자체가 야구를 득실이라는 단순한 수치를 통해서 파악하는 것이라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래서요?”

“야구를 복잡하게 생각하면 한없이 복잡해집니다. 고려해야 할 요소가 너무 많죠. 그런데 평가 기준이 확고하면 웬만한 변화로는 결과가 흔들리지 않는 게 야구이기도 합니다.”

“음…”

“라드 감독은 우리 전력분석팀의 기대승률보다 정확하게 5승을 더 해냈습니다. 그것도 시즌 전체 기준이 아니라 하반기 기준으로 그렇습니다. 전반기까지 포함하면…”

그것에 대해서라면 해리스 사장도 할 말이 좀 있었다.

“그거야 후반기에는 전력상승의 요인이 있었지 않습니까? 감독의 역량보다는 트레이드가 시즌 결과에 미친 영향이 좀 더 크지 않을까요? 5승이라고 해봐야 우리 팀이 이번 시즌 마지막 7경기에서 7연승을 해내지 못했다면 그런 유의미한 차이가 생기지 않았겠지요.”

“그래서 제가 변수에 대한 말씀을 먼저 드린 겁니다. 어떤 변수라도 여간해서는 결과에 유의미할 정도의 변화를 가져오기가 힘든데 라드 감독은 그걸 해냈어요. 지금 사장님 말씀은 과정 자체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결과를 보고 거기 합당한 이유를 찾는 것처럼 보입니다.”

드러난 성과를 보이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단장의 숨은 뜻이라면 사장은 그것에 대해 별로 찬성하고 싶지 않았다. 그 기대승률에도 때때로 오차가 발생하는데 그건 너무 불규칙적이라 절대적으로 신용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사장의 생각이었다. 세이버메트릭스에 대한 단장의 견해가 요 몇 년 새 많이 달라진 것 같아 쓴웃음이 올라왔다.

2021시즌을 앞둔 블루제이스의 피타고리안 기대승률은 득실 마진 +183에 99승 63패였다. 하지만, 시즌 후 결과는 91승 71패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지구 우승팀들을 제외하면 최다 득실 마진 팀이었지만, 당시 와일드카드는 피타고리안 기대승률보다 실제 승률이 더 높게 나온 레드삭스와 양키즈가 차지했다. 그들의 득실 마진은 +80과 +42였지만 예상치보다 더 많은 승리를 얻어냈다.

예상과 기대가 항상 현실을 반영하지는 않는다. 지도가 있다고 무조건 목적지를 찾을 수는 없다. 목적지까지의 여정에서 시행착오가 줄어들며 목적지 도달 가능성을 높여 줄 뿐이다.

“라드 감독과 장기 계약이 하고 싶은 겁니까?”

해리스 사장은 말을 돌리지 않았다.

“결론은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말씀하신 내용이 그 판단의 근거입니까? 저는 이번 시즌 반전을 만들어낸 가장 큰 원인을 꼽자면 헌트의 트레이드를 설계하고 성공시킨 단장님의 공로가 첫 번째라고 생각합니다만. 무능한 사장이 사고 친 걸 수습해 주셨죠.”

윌리스 단장의 얼굴에서 살짝 홍조가 나타났다.

“원래 했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흠흠. 아무튼 저도 라드 감독이 무에서 유를 창출할 수 있는 특별함을 가졌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실제로 최초 계약 시점에서는 아무 장점을 보여주지 못했었죠.”

그랬었다. 그저 그런 전력의 팀을 운용해 그저 그런 성적을 냈었다. 딱 현상 유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무리 좋게 말해주려 해도 칭찬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저도 그저 그런 감독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생각의 방향을 조금만 바꿔보면 그때 그런 면이 장점은 아니었지만, 전력이 갖춰진 지금은 아주 굉장한 강점이죠. 우리에게는 더도 말고 현상 유지를 할 수 있는 감독이 최상의 감독입니다.”

“음…”

“2020년의 자이언츠는 운이 없었지만 매년 운이 없지는 않죠. 2021시즌은 시작부터 어두운 전망이 많았지만 결국 어떻게 되었죠?”

2021시즌 자이언츠는 지구 우승을 했다.

“그 우승에는 2020년의 전력을 온전하게 가져간 부분이 가장 크게 작용했죠. 지금 우리 팀에는 그런 일을 해줄 감독이 필요합니다.”

단장의 말에는 솔깃해지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해리스 사장은 급격하게 쏠리는 마음에 당혹스러운 감정을 숨기듯 입을 열었다.

“하핫! 제가 지금 설득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요즘 어디 화술 강좌라도 들으십니까?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긍정적으로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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