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피날레
턱-
내 송구를 받은 1루수 필의 글러브가 주자의 팔을 후려치듯 짚었다. 주자의 손이 베이스를 터치한 것과 어느 쪽이 빨랐는지 모르겠다. 처음 던진 견제구는 말 그대로 1루 주자의 주루플레이를 견제한다는 뜻이 강했지만, 지금은 잡겠다는 의도가 절반은 포함되어 있었다.
“세이프.”
즉각적인 콜과 함께 심판의 양손이 벌어졌다.
‘응? 이렇게 쉽게 콜을 해?’
내 눈엔 아슬아슬한 타이밍으로 보였는데 1루심에게는 그렇지도 않았나 보다. 순간 비디오 판독을 요청할까란 생각이 들었지만 태그 장면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필도 가만히 있는데 내가 나설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1루 주자가 일어나서 타임요청을 하고 돌아서 유니폼을 털고 있다. 4회면 아직 초반인데 상하의 가릴 것 없이 온통 흙투성이다.
‘누가 보면 그 옷으로 몇 게임 치른 줄 알겠네. 그렇게 매무새에 신경을 쓸 필요 없잖아. 견제구 하나 더 던지면 똑같은 꼴이 될 텐데…’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에 나와야 하는 상황에 몰린 것도 짜증 나는데 상대 팀인 로키스가 게임을 너무 열심히 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몇몇 선수들이 그러고 있다.
로키스는 지구 4위다. 이 경기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아무런 대미지가 없다. 지든 이기든 포스트시즌과는 전혀 관계없는 팀이다.
‘원정 왔으면 그냥 쉬엄쉬엄하면 되지 이렇게 바락바락 대들면 어떻게 하냐고.’
조금 이해되는 면은 있다. 지금 로키스의 주력선수들은 거의 다 빠졌다. 출전한 선수 중 다수가 확장 로스터로 올라온 루키들이다. 그들로서는 이 경기가 올 시즌용이 아니라 다음 시즌 로스터에 들어갈 수 있느냐를 결정할 마지막 시험대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미 탈락한 선수들은 마이너로 다 돌아갔고 남은 한 줌의 선수들이 티끌 같은 가능성을 위해 분투 중이다. 여기서 특별히 잘한다고 하더라도 다음 시즌 로스터의 후보군이 될 선수는 한두 명 정도다. 웬만해선 기존 레귤러의 벽을 넘기가 어렵다. 그들은 미래를 위해 치열하게 현실에 부딪치고 있다.
‘좋아! 좋다고. 다 이해해. 열심히 해야지. 그런데 그게 왜 하필이면 나를 상대로 그러냐고.’
실력 자체가 그렇게 특별하게 뛰어난 선수는 안 보인다. 맞서보니 내가 부담을 느낄 정도의 타자는 없었다. 그러나 타석에서 끈끈하게 달라붙는 것도 그렇고 어떻게 출루만 하면 질척거리면서 귀찮게 하는 것 때문에 짜증이 난다.
‘도루를 하려면 하든지…’
리드를 거의 한계치까지 잡는 것 같은데 모션만 클 뿐 정작 도루를 실행하지는 않는다.
통상적으로 도루를 하기 위해서는 리드가 필요하다. 투수가 투구판을 밟고 난 이후부터 다음 루까지의 거리를 줄이는 도움닫기와 같은 것이다. 옆으로 비스듬히 서서 후속 동작을 취하기 유리하게끔 다음 루로 향하는 오른발은 45도 정도 열어놓는다. 이게 기본 자세다.
보통은 보폭의 세 개 반 정도를 리드 거리로 잡는데 베이스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면 투수가 견제를 할 때 귀루가 어렵다. 그래서 주력과 순발력에 자신이 있으면 보폭의 네 개 만큼, 좀 모자란 선수는 세 개 정도가 일반적이다.
이 리드 거리가 짧으면 견제구는 거의 위협이 되지 않는다. 물론 주자가 그렇게 리드를 잡으면 도루 의사가 없는 것으로 보고 견제구를 던지지도 않겠지만… 어쨌든 견제구에 이처럼 귀루 타이밍이 아슬아슬했다면 거의 한계치까지 리드를 늘여 잡고 있는 게 된다.
거기까지는 그렇거니 했다. 상대 투수를 교란시키는 것이 주자에게는 당연한 임무이니까. 더군다나 벤치에게 자신을 어필하려는 목적이 있는 선수의 타격이 썩 좋지 않다면, 이러한 작전 수행능력을 보여주는 것밖에 남지 않는다.
그런데 스킵 동작이 너무 심하다. 스킵은 투수가 투구 동작에 들어가고 난 후 주자가 다음 베이스에 더욱 가깝게 이동하는 동작이다. 정말 도루하는 것처럼 스타트해서 두세 발짝 달리는 동작을 취하면 러닝 스텝이라고 하고 옆으로 선 자세 그대로 두세 발짝 움직이면 사이드 스텝이다.
오른손 투수인 내가 투구 자세를 취하면 등 뒤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모를 것 같지만 뭐랄까…
‘느껴져! 느껴진다고.’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아느냐고 하면 대답할 말이 궁하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안다. 그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투수를 오래 하다 보니까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되었다.
‘다른 투수들도 대개 비슷하다고 하더군. 이게 같은 직종을 오래 하면 생기는 노하우 같은 걸지도 모르지.’
아마도 진실은 정면으로 주자를 보고 있는 포수의 대처나 야수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그것이 일어나게 만든 원인을 머릿속에서 입체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리라고 추측한다.
오감이 아닌 다른 감각기관의 존재는 몹시 어색하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걸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에서 오는 괴리가 상당하다.
스킵은 상당히 중요한 동작이다. 이것을 잘하면 투수의 주의를 분산시켜 집중력을 떨어트린다. 포수는 더하다. 투수의 투구를 포구한 후 바로 2루 송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준비 동작을 취해야 한다. 앉아서 2루 송구를 하지 않는 이상 계속 몸을 일으켜야 한다. 평소와 다른 일을 하다 보면 실수할 확률이 대폭 늘어난다.
‘실제로 이럴 때 포수의 포구미스는 꽤 흔하게 일어나지.’
이런 상황에서 유격수는 베이스 커버를 들어가 포수를 송구를 받아줘야 하고 다른 내야수들은 유격수가 움직이면서 생긴 틈을 메우는 사전 약속된 포메이션으로 움직임을 가져간다. 주자의 단순하다면 단순한 동작 하나로 수비에 상당한 압박감을 계속 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걸 잘하는 주자는 생각보다 드물어.’
장타 한 방의 가치가 증대한 현대야구에서 대개 모든 선수가 벌크업을 한다. 같은 종목이어도 세부적인 쓰임새에 따라 늘려야 하는 근육의 양과 형태는 다르다. 예를 들어 달리기라는 공통적인 것을 하지만 마라톤 선수와 100M 선수의 체형은 확연하게 달라진다.
장타를 위한 벌크업은 자연스럽게 주력의 약화를 가져왔다. 기본적으로 긴 리드폭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성립하는 압박감이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한 선수 자체가 과거보다 줄어들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주자가 잘못될 위험도가 굉장히 높다.
근력이 좋아진 만큼 포수의 기본 송구 능력도 예전보다 상당히 높아졌다.
‘도루하다가 죽으면 억울하지는 않지. 해보지도 못하고 아웃카운트를 늘이면…’
기본이 안 된 선수라고 욕이란 욕은 다 듣는다. 사소한 부상의 위험도 크다. 그래서 웬만한 선수들은 잘 하려 들지 않고 벤치에서도 굳이 권하지 않는다. 적당한 리드폭을 가지고 사이드 스텝이나 슬금슬금 밟는 게 보통의 주자다.
저렇게 난리 치는 주자는 상당히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다저스가 우리에게 3연패를 한 후 무너져 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 뒤 이어진 두 경기에서 꾸역꾸역 이겨내는 바람에 오늘 경기에 등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실 지금 정규시즌 경기에는 별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 좀 쉬면서 차분하게 곧 벌어질 포스트시즌 경기를 준비하고 싶었다.
‘그런데 사정이… 빌어먹을 시즌 시작부터 꼬이더니 끝까지…’
총력전을 벌여 다저스와의 3연전을 모두 쓸어 담은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뒤를 걱정할 겨를 없이 선발을 당겨서 써버린 탓에 그다음 경기부터 새로운 악전고투를 벌여야 했다. 결국 우리도 두 경기를 이겨내 연승을 이어나가고 있긴 하다.
‘지난 두 경기에 불펜을 다 갈아 넣었지. 특히 이번 시리즈 첫 경기가 힘들었어.’
애덤과 체이스는 연투를 했고 그 외에 쓸 수 있는 불펜 투수는 남김없이 써버렸다. 상대가 로키스라 조금은 편안한 경기가 되리라고 생각하기도 했었지만, 로키스의 몇몇 선수들은 오해하지 말라는 듯 다 늦은 분전을 보여주었다.
리그의 평균적인 선발투수를 상대로 우리 타선이 평균 이상의 득점을 올려줘 겨우 이길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지금 이 꼴이 났다.
‘억지로 쓰자면 불펜 몇 명은 쓸 수 있겠지만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그건 좀…’
지금 제일 좋은 건 오늘 내가 완투를 해내는 것이다.
‘단순히 완투가 아니라 완투승을 해야지.’
만약 우리 팀이 오늘 경기에서 지고 다저스가 이기면 맹랑한 상황이 나올 수도 있다. 그래서 무조건 이기면서 내가 완투를 해내야 하는데 상대 팀이 협조를 하지 않고 있다.
‘음. 로키스가 문제가 아니라 선수 몇 명이 문제인가? 어쨌든… 아이! 저놈 또 나가네.’
빗맞은 내야안타라는 운으로 출루한 주자가 너무하는 것 같다. 슬쩍 뒤를 돌아보며 눈으로 일단 경고를 보냈다.
‘응? 견제 효과가 있었나?’
리드 거리는 비슷하지만 조금 전보다 미묘하게 중심이 뒤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뭐! 이 정도면…’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주저하지 않고 세트포지션으로 가볍게 투구를 시작했다. 싱커의 회전이 적당하게 이루어졌다.
‘헉! 런 앤 히트?’
1루 주자가 스타트를 끊었다. 베그웰의 움찔하는 모습이 확대되어 보이는 것 같다.
딱-
‘악!’
듣기 싫은 소리다. 라인 드라이브성 타구만 이런 소리가 난다.
‘에이. 정말… 응? 그렇지.’
잘 맞았다고 다 안타가 되는 건 아니다. 베그웰의 불끈 쥔 주먹이 모든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2루수 크로포드가 천천히 몸을 돌려 1루수에게 송구하려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스타트를 끊었던 1루 주자가 꼼짝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다. 이런 직선 타구가 잡히면 주자로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운이 나쁠 때가 있으면 좋을 때도 있는 거지. 흐흣. 다 랜덤 아니겠어?’
타구 질이 좋다고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니다. 적당한 때와 장소에 있던 크로포드에게 막혔다. 코스가 좋지 않았다.
어떻게 잡았는지는 모른다. 이제 내게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그 경위가 중요한 선수도 있겠지만 투수인 내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잡았고 아웃 카운트가 두 개 올라간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승리에 한발 가까워졌다.
‘오! 좋아. 뭐! 그런 거지. 노력한다고 다 성공하는 건 아니라서…’
1루수 필이 송구를 잡는 것을 보며 더그아웃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따악-
홈팬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르블론이 느긋하게 베이스를 돌고 있다.
1사 1, 3루에서 터진 3점 홈런.
‘에구, 진작 좀 치지.
터질 듯 터지지 않던 타선이 8회 대폭발을 했다. 벌써 6점째다. 하위타선에서 시작된 공격이고 아직 원아웃이라 한두 점 더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진짜 끝인가 보네. 일찍 좀 퇴근하게 진작 좀 치지.”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 선수들을 맞이하며 조금 민감할 수도 있는 농담을 건네도 모두들 웃음 일색이다.
“푸하하. 홈런 무를까?”
“무르긴 뭘 물러. 3점보다는 6점이 낫지.”
이럴 땐 무조건 다다익선이다.
‘마지막 한 이닝…’
시즌 마지막 경기를 완봉으로 장식하는 것도 나름 의미 있는 대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