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89화 (189/200)

189화. 혈전의 끝은

9회 초 2번 알버트부터 공격이 시작된다. 우리 타선에서 가장 믿을만한 타자들이 연달아 등장한다.

평균자책 1점대 후반과 40세이브를 기록하고 있는 내셔널리그 최강 마무리가 상대이긴 하지만 우리 팀의 2번부터 6번 타자는 어느 팀 중심타선에도 뒤지지 않는다.

“6:4 두 점이라… 애매하네.”

“애매할 게 뭐가 있어. 두 점 정도야 쉽게 내기도 하잖아. 필더가 무적은 아니야. 이번 시즌에 블론도 두 번 있었다고.”

아무래도 소르카가 경기에 너무 빠져든 것 같다.

‘지금이 할 수 있다는 자기 최면이 필요한 때이긴 하지만… 그건 좀…’

그건 경기를 직접 뛰고 있는 선수들이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생각만으로 무엇이든 이루어진다면 못 할 것도 없지만, 한 발 떨어진 곳에서는 냉정함도 필요하다.

‘냉정하게 보든 감정이입을 해서 보든 결과가 마찬가지라면 어느 쪽이 나은 선택일까?’

블론은 스무 번에 한 번 나왔던 경우였다. 두 점이 쉽게 나기도 하지만 점수가 안 나려고 하면 안타 한 개 치기도 힘든 게 야구다.

“갈 때까지는 가야겠지. 아직 히든이 남았잖아. 첫 타자가 중요해. 어떻게든 알버트가 살아나가면 분위기가 달라질 거야.”

분위기에 맞춰 덕담을 조금 해줬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굳이 공개적으로 아니라고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때로는 아니더라도 함께해야 할 경우가 있다.

“그럼. 할 수 있어, 알버트. 넌 해낼 거야.”

소르카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주술도 아니고 이게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으음.”

감정이입이 너무 심하면 원하지 않은 결과가 나왔을 때 그 반발 또한 가해진다. 이 게임을 진다고 해서 우리가 포스트시즌에 못 나가는 것도 아닌데 이건 좀 과한 것 같다.

알버트가 이번 시즌 3할을 치고 있긴 하지만 그건 전체 투수를 상대로 한 타율이다. 리그의 정상급 투수를 상대로 한 타율은 2할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지금 나와 있는 필더에게도 그리 강하지 못했다.

‘그를 상대로 2할 내외였던 걸로 아는데… 혹시 안 좋은 결과가 나오더라도 겸허하게…’

따악-

‘헉! 안타가…’

초구 볼을 잘 골라낸 알버트가 2구로 들어온 패스트볼을 가볍게 밀어쳐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좌전안타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되면… 베그웰의 주자가 있을 때 타율이… 아…’

베그웰은 이번 시즌 무사 주자 1루였을 때 4할에 가까운 타율을 보였다. 평소에 잘 기억하지도 못했던 각종 수치들이 파노라마처럼 그려진다.

‘여기서 한 방만 더 나오면… 2할도 해냈는데 4할이면…’

갑자기 그렇게 멀어 보이던 두 점의 격차가 바로 눈앞에 다가온 것 같은 느낌이다.

대기 타석에 있던 베그웰이 바로 타석에 들어섰다. 현명한 선택이다. 괜히 타석 주변에서 루틴이랍시고 준비한다고 어슬렁거리면서 심리전을 하는 것보다 지금은 투수가 생각하고 마음을 진정시킬 시간을 없애는 게 득이다.

“볼.”

‘저게?’

상대 투수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러나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일반 사람은 잘 못 느끼겠지만, 같은 투수는 보면 안다. 안에서 밖으로 빠져나가는 슬라이더였는데 밖으로 흐르면서 많이 휘지 않고 존에 걸친 것처럼 보였다.

인터벌 없이 바로 2구가 이어졌다. 하이 패스트볼이다.

“볼.”

‘응?’

이어 던진 두 개 다 잘 던진 공이었다. 존의 안팎을 살짝 넘나드는 공. 이런 장면에서 최상이라고 불릴만한 구질이었다.

‘40세이브 할 만하네. 이럴 때 저런 공들을 던질 수 있으니까 가능했겠지.’

문제는 주심이 그걸 잡아주지 않아서 발생한 거지 구질 자체는 아주 훌륭했다. 두 개 다 스트라이크를 잡아줄 수도 있는 공이었다. 하나는 참아주는 듯했던 관중들은 난리가 났다. F자로 시작하는 온갖 말들로 야구장이 술렁이고 있다.

‘오늘 저 코스 판정이 어땠더라?’

더듬어 생각해봐도 별 기억이 없다. 이건 이전에는 기억에 남을 만한 특별한 장면이 없었다는 거다.

‘하긴 오늘 상대 선발이 저런 미묘한 제구가 되는 투수가 아니긴 했었지. 아주 더럽게 꼬인다고 느껴지겠네.’

포수가 뒤돌아 뭔가를 이야기하는 듯했으나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여기서 주심에게 어필해 봐야 좋은 쪽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투수 기분 때문에 한 것 같다. 판정에 짜증 난 투수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을 대신 해준 거다.

어지러운 분위기에서 투수를 다독일 줄 아는 좋은 포수다.

‘그런데 하필이면 지금 타자가 베그웰이라서…’

아마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환하게 꿰뚫어 보고 있을 것 같다. 베그웰이라면 이 장면에서 적극적으로 배팅하기보다 한두 개 더 기다려볼 것이다.

1루 견제가 나왔다. 이 상황에서 1루 주자가 도루를 시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지금 한 점 얻는 것은 아무 의미 없다. 지금은 주자를 모아야 할 때다. 이건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다.

‘머리가 복잡해진 모양이네. 흐흣, 시간이 필요해?’

투수가 길게 생각하는 것이 좋은 쪽으로 나타나는 걸 별로 본 기억이 없다.

“볼.”

이번 공은 투수의 손에서 공이 떨어졌을 때부터 바로 알만큼 많이 벗어나는 공이었다. 홈플레이트 앞에서 바운드된 공을 포수가 몸으로 막아냈다. 명백한 실투다.

‘손에서 미끄러졌나 보네. 거봐. 이렇게 된다니까.’

필더가 자기 투구 리듬을 잃어버린 것 같다. 다저스 벤치에서 바로 타임을 걸었다. 마운드로 상대 감독이 나가고 있다.

‘모여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너무 빤하지 않나?’

쓰리 볼 노 스트라이크. 거기에 상대는 리그에서 가장 정교하다고 할 수 있는 타자다. 이러면 정면 승부는 어렵다.

초구와 2구처럼 존을 안팎을 최대한 이용하는 피칭을 하는 수밖에 없다. 주심이 잡아주면 다행이고 계속 잡아주지 않으면 볼넷으로 보내야 한다. 여기서 괜히 확실한 스트라이크를 던지겠다는 마음을 가졌다가 공이 중앙으로 몰리면 한 번에 끝장이 나 버린다. 베그웰은 그 정도 부담감을 줄 수 있는 타자다.

‘피가 마르는 것 같겠네.’

주심의 경기 속행 콜이 떨어졌다. 더그아웃이 조용해졌다. 심지어 관중석마저 숨을 죽였다. 모두가 이 장면의 중요성을 느끼는 것 같다.

“스트라이크.”

“어?”

2구와 거의 흡사한 공이다. 몸쪽 높은 곳을 찌르는 패스트볼. 달라진 건 주심의 콜뿐이다. 얼핏 1루로 걸어 나가려던 듯 베그웰의 몸이 기우뚱하다 다시 돌아왔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침묵을 지키던 소르카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린다.

“조금 전에는 안 잡아주더니 지금은 잡아줘?”

“스트라이크 판정에 일관성이 있어야 할 것 아니야. 이러면 어떻게 치라는 거야?”

더그아웃이 웅성이고 있다. 우리 선수들이 한마디씩 다 하는 것 같다.

‘이거… 이거…’

좀 냉정하게 말하자면 심판 눈에는 아까 2구는 미묘하게 반 개 빠지고 이번에는 존의 안쪽으로 반 개쯤 치우쳤다고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받아들여지기에 현재 심판의 권위가 약하다. 게다가 기계식 판정이라는 대체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

“이래서 로봇 심판이 필요하다고.”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이 현실을 말해주고 있다. 엄밀하게 이건 판정의 문제라기보다는 신뢰의 문제다. 사적 영역이 판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넘어갈 수 있는 문제다.

‘에구, 그건 그렇고 필더 저놈 잘 던지는 줄은 알았지만, 이런 장면에서 저런 제구가 된단 말이야?’

구속도 95마일이었다. 우리 팀 체이스와 비슷한 유형의 투수였지만, 이런 세밀한 제구와 위기 상황에서 마음을 추스르는 능력은 좀 더 나은 것 같다.

“스트라이크.”

또 들어왔다. 이번엔 바깥쪽 슬라이더다.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 것에는 쓰리 볼이라서 베그웰이 애매한 볼에 적극적으로 스윙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겠지만, 그 애매한 공을 연속적으로 던질 수 있는 게 투수의 능력이다.

“허! 이러면 필더 칭찬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네. 40세이브 할만해.”

소르카에게서 솔직한 감탄이 흘러나왔다.

“흠. 아무리 그래도 베그웰이 만만한 타자는 아니지.”

이런 상황에서 상대 투수 칭찬은 좀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 생각되었는지 재빨리 베그웰을 끌어왔지만, 그 감탄은 진짜였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주심의 요란한 삼진콜과 함께 마운드의 필더가 한 손을 들어 보이며 환호한다. 조금 전 5구와 흡사한 궤적을 가졌지만, 더 휘어나가는 슬라이더였다. 리그에서 가장 정교한 컨택 능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 베그웰을 상대로 정말 대단하다.

베그웰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서 더그아웃으로 돌아왔다. 얼굴이 붉다. 베그웰에게도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다.

‘하! 이렇게 넘어가는 건가?’

끓어오르는 불안함을 애써 눌렀다. 아직 아웃카운트 두 개의 여유가 있다. 그리고 30홈런 타자들이 이어서 타석에 서게 되는데 아직 실망하기엔 너무 이르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4번 타자 레블론마저 삼진이다. 우리 팀의 최강 타자들을 연속 삼진으로 잡아내며 조셉 필더가 기세를 올리고 있다.

‘아! 기대를 접어야 하나?’

5번 타자 헌트는 패스트볼에 대한 약점이 뚜렷한 타자다. 이번 시리즈 1차전에서 마지막 순간 한 건 해주긴 했지만, 2차전에서는 봉쇄당하고 말았다.

그에게 필더는 최악의 상성을 가진 투수다. 97마일 이상을 의도적으로 던질 수 있고 정교한 제구력도 있다. 1차전에서는 상대의 실투를 추궁해 마지막 순간 결과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필더는 그럴 수 있는 투수가 아닌 것 같다.

따악-

“헉! 뭐야?”

마음이 지쳐 몸까지 늘어졌었는데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순식간에 전류가 흘렀다. 어스름한 저녁 하늘을 감싼 조명 사이를 뚫고 조그만 흰색 물체 하나가 비상하고 있었다.

“어떻게 쳤지?”

벌떡 일어나며 이미 일어나 만세를 부르고 있는 소르카에게 물었다.

“몰라. 공이 몰린 것 같은데… 방심했겠지.”

정말 이놈의 리그는 괴물들 천지다. 삐끗하면 한 방에 날아간다. 늙은 괴물이 오늘도 한 건 했다.

‘늙은? 이건 아닌가? 나보다 한두 살 정도 많을 뿐인데 늙었다고 하면 안 되지. 그런데 이젠 어쩌지?’

어떻게 9회 동점을 만들어내긴 했지만, 연장에 들어가면 승산이 있을지 모르겠다.

‘9회는 체이스가 막는다고 치고 상위 타선이 다시 돌아오려면 2~3이닝은 무실점으로 막아내야 하는데 우리 불펜으로 그게 가능한가? 아! 몰라. 감독이 알아서 하겠지. 일단은 환영부터…’

10회부터는 다음 시리즈 선발이 예정되어있던 드로이넨이 나섰다. 계속 보이지 않아 다음 경기 준비 때문에 오지 않은 걸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계속 불펜에 있었던 것 같다.

드로이넨은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냈고 11회 초 베그웰이 결승 홈런을 쳐내며 다저스를 잡아냈다. 장장 5시간 동안의 혈전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지치는 게임이었지만 결국은 이겨냈다. 159게임을 치르고서야 겨우 지구 1위로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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