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88화 (188/200)

188화. 고전(苦戰)

“번트?”

타석에 선 우리 팀의 8번 타자 패터슨이 번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뭐 하자는 거야?”

메이저리그에서 희생번트(Sacrifice Bunt)라니 조금 이해하기 어렵다. 과거 내셔널 리그에 지명타자 제도가 없었을 때는 투수 타석에서 종종 등장하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세이버메트릭스에 의하면 번트는 득점 가능성이 적은 공격수단이다. 각종 통계가 증명하고 있다.

무사 1루의 경우 기대 득점은 0.877점. 득점 확률은 43.3%다. 1사 2루는 기대 득점이 0.680점. 득점 확률은 40.3%이다. 무사 1루에서 정상적으로 공격을 진행했을 경우가 1사 2루의 상황보다 기대 득점이나 득점 확률이 높다. 희생번트는 아웃카운트를 늘려 득점 가능성을 낮추는 행위라고 세이버메트릭스에서는 규정한다.

세이버메트릭스가 현대 야구의 대세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메이저리그에서 번트는 없어져 갔다. 지금 타석에 선 패터슨이 아무리 멘도사라인 이하의 타자라 하더라도 가끔은 장타도 치고 타점을 올리기도 한다.

분명히 벤치의 지시가 있었을 것 같은데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냥 맡겨 두는 것이…’

가슴이 답답하다.

“여기서 희생번트는 좀 그렇지 않아?”

참지 못하고 내 불만이 입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벤치의 작전을 선수들이 이러쿵저러쿵하는 게 바람직한 일이 아니란 건 알지만, 이 장면에선 말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다.

“그거야 모르지 병살타에 대한 걱정 때문일 수도 있고… 3점 차이니까 우리가 굳이 번트하겠다는 걸 다저스가 피하려고 하지는 않을 거 같네.”

벤치의 작전을 옹호하는 말인 것 같지만 뉘앙스가 미묘하다. 들려오는 말의 내용과는 다르게 소르카 역시 나와 생각이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아마도…”

갑자기 1루 주자가 2루로 달리기 시작했다. 리드 거리도 길게 잡지 않고 있었는데 정말 돌연하게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타이밍이었다.

‘희생번트도 못 미덥나? 어이구! 여기서 런 앤 히트까지…’

정말 벤치의 걱정이 과한 것 같다. 그러나 이왕 번트를 하려고 마음먹었으면 이렇게 확실하게 해두는 것도 괜찮은 것 같기도 하다. 1루 주자인 커크는 단독 도루가 가능한 빠른 선수다.

‘양수겸장이라… 우리 벤치도 머리 좀 쓰려고 하네.’

도루 시도는 항상 실패의 위험이 따른다. 실패하면 갖은 애를 써서 만들어놓은 찬스가 한 번에 날아간다. 어떻게든 주자를 2루에 두고 싶고 단독 도루는 불안하다. 그래서 런 앤 히트와 희생번트라는 양동작전을 구사하는 것 같다.

상대가 분석에 들어가기 전인 초구부터 이러면 피치아웃의 가능성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생각이 정신없이 휙휙 돌아갔다.

틱-

‘됐어.’

3루수 앞으로 잘 굴렸다. 정상 수비 위치를 고수하던 3루수가 급하게 대시하며 타구를 잡아냈다. 좋은 대시였다. 이왕이면 내야안타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건 힘들 것 같다.

1루 주자는 거의 2루에 도달했다. 이 정도면 슬라이딩도 필요 없는 타이밍이다. 작전 성공이다.

‘번트를 대지 않고 그냥 놔뒀으면 단독 도루가 성공했을 수도 있었… 어? 뭐 하는 거야? 여기서 본헤드 플레이가… 아닌가?’

2루에 서서 들어간 주자가 멈추지 않고 그대로 3루로 질주한다. 타자 주자는 아웃. 1루수가 머뭇머뭇 3루로 송구하지 못하고 있다. 3루수가 대시 후 원위치로 복귀하는 타이밍이 늦어 버렸다.

“노렸네. 노렸어. 하핫. 이것 참!”

1루수의 3루 송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3루수는 급하게 몸을 돌리다 미끄러지고 말았고 유격수가 커버를 들어왔지만 한참이나 늦은 타이밍이었다.

번트 두 개로 1사 3루가 만들어졌다.

라드 감독은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기 운용을 해왔다. 기본적으로 우세한 전력으로 지키는 야구를 선호했고 다양한 작전 구사보다는 선수 개인 역량에 맡기는 것을 선호했다. 이런 성향은 당연히 루키의 패기보다는 고참의 경험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

비슷한 실력이라면 경험 있는 선수를 쓰게 된다. 그런 점 때문에 지난 시즌 팀을 우승으로 이끌어냈음에도 야구팬들의 커뮤니티 같은 곳에서는 제법 비판이 나온다.

‘팜을 황폐화시킨 주범이라나 뭐라나. 그게 왜 감독 책임이야. 프런트 탓이지.’

지난 포스트시즌에서 과감한 작전 야구를 구사한 적이 있긴 했었지만, 그건 아주 예외적인 경우였다. 살짝 이상한 구석이 있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번엔 과감함이 지나쳤다. 이 정도로 미친 짓을 벌일 줄은 몰랐다.

성즉군왕 패즉역신(成則君王 敗則逆賊, 성공하면 왕이고 실패하면 역적)이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른다.

성공했기 때문에 과감한 작전이 되는 거다. 조금 전 무엇인가 하나라도 삐끗했으면 중요한 장면에서 무모한 작전으로 경기를 망친 감독으로 매도당하기 딱 좋을 만한 상황이었다.

“확신이 있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상대 심리 파악부터 이런 작전에 적합한 선수 준비, 튼튼한 심장까지 삼위일체가 맞아떨어져서 성공한 것 같은데…”

운이 좋았다는 것을 현학적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럴듯한 용어가 섞이면 대개는 따져 묻지 않는다.

“그거 욕한 거지?”

소르카는 그 대부분에서 빼줘야 할 것 같다.

“무슨 말을… 결과가 좋게 나왔잖아. 프로는 결과로 말해야 한다는 뜻이었어.”

“글쎄, 조금 애매하네. 네가 말한 이유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내 생각엔 근본적으로 다저스가 번트 수비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네. 그런 플레이를 해본 적이 거의 없을 거야. 그리고 아직 결과가 안 나왔어. 작전 성공을 이야기하려면 점수가 나야겠지.”

“하긴 누구도 번트를 거의 안 하는데 그런 타구를 처리할 일이 없었겠지. 그래서 허를 찔렸다? 그건 그럴 것 같은데 점수는 어렵지 않게 날 것 같아. 저런 주자가 있는데 점수가 안 나겠어? 저 스피드를 다저스 애들도 경험했잖아. 내야로만 굴리면 절대로 홈 승부하지 않을 거야.”

얕은 외야플라이라도 리터치는 문제없을 것 같다. 커크가 빠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어?’

갑자기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설마 또 번트를?’

지금 상황에서 가장 걱정되는 것이 삼진인데 우리 팀의 9번 타자 테일러는 상당히 위험인물이다. 8회 3점 차이면 다저스가 전진 수비 같은 걸 할 리가 없는데 다시 번트로 타구를 굴리기만 한다면 그게 점수 내기에 제일 안전한 방법일 것 같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다저스 놈들 한 방 먹인 것 같아 기분은 좋네. 그리고 쟤네들은 왜 이렇게 시간을 끄는 거야?”

나와 소르카가 대화에 열을 올리고 있는 동안 다저스의 감독과 선수들은 마운드에 모여 있었다.

“할 말이 정해져 있을 것 같은데… 빨리빨리 줄 점수 주고 아웃카운트 늘리자 이런 말밖에 더 하겠어?”

“말이야 빤하지만, 사람 감정은 그렇지 않잖아. 그게 제자리로 돌아오려면 시간이 필요하지.”

틱-

곧이어 속행된 경기에서 다시 번트가 나왔다. 3루 주자 커크는 날듯이 홈으로 달렸고 번트 타구를 잡은 다저스의 3루수는 주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1루로 송구했다.

“1점 내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흥분이 지나가고 나자 다시 현실이 무겁게 다가왔다. 하위타선에서 쥐어짜듯 1점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마지막 공격이 남았을 뿐인데 2점 차로 뒤지고 있다.

8회 2사가 되자 다저스는 가차 없이 끝내기에 돌입했다. 오늘 7과 2/3이닝을 4실점으로 호투한 선발을 내리고 바로 마무리를 올렸다.

다저스의 클로저는 이번 시즌 40세이브를 하고 있는 조셉 필더다. 100마일에 가까운 포심 패스트볼과 슬라이더 조합이 까다로운 투수다. 두 번의 블론 세이브를 기록하고 있지만 40번에 2번이라면 5%밖에 안 된다. 그 황당한 확률을 뚫어야 하는 게 우리 팀이라는 것이 비극이다.

“필더가 8회 등판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네.”

“이틀 쉬었잖아. 스테미너는 충분할 거야. 아웃카운트 3개나 4개나 거기서 거기지.”

다저스가 연패를 한 탓에 그동안은 볼 일이 없었다. 지고 있는 경기에 마무리투수를 내는 팀은 없다.

1이닝 마무리라는 개념은 100년이 넘는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비교적 최신 개념이다. 1988년 애슬레틱스 토니 라 루사 감독이 데니스 에커슬리를 마지막 이닝을 맡는 전담 투수로 쓴 것이 최초의 일이다. 1970~80년대에도 전문 불펜투수는 존재했지만, 그때의 마무리는 7~8회에 올라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승리를 지켜내야 할 기회가 많은 강팀일수록 좋은 마무리투수는 필수적으로 있어야 한다.

퍽-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1번 타자 크리스는 힘 한 번 써보지 못했다. 2사 후이긴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은 있었는데 그냥 역시로 끝나버렸다.

“여기서 체이스를 올린다고?”

수비 위치 조정을 어떻게 할까 싶더니 여기서 무리수가 나왔다. 7회 2사 후 등판해 한 타자만 상대한 애덤을 교체하리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커크는 크리스가 맡았던 좌익수 자리로, 지명타자인 헌트가 2루수를 맡았다. 지명타자 자리는 소멸했지만 투수가 교체되어 나간 선수의 타순에 들어가기 때문에 이러면 두 이닝 정도는 괜찮다.

‘어차피 한 이닝 남았는데 아무려면 어때.’

9회 공격이 2번 알버트부터 시작이라 교체된 크리스 자리까지 돌아오려면 타순이 한 바퀴 돌아야 한다. 복잡해지려는 장면을 체이스의 8회 등판으로 응급처치를 했다. 벤치의 고심이 엿보인다.

9회 공격에서 최소 두 점을 얻지 못하면 경기가 그대로 끝나는데 이것저것 가릴 수는 없었을 테지만 정상적이 아닌 건 확실하다.

“8회 등판은 굉장히 오래간만일 텐데 체이스가 바로 적응이 될까?”

투수란 종족 자체가 굉장히 민감한데다가 체이스가 결코 경험이 많다고 할 수는 없는 투수다. 조금 걱정스럽다. 그렇게 봐서 그런지 평소와 다르게 조금 서두르는 게 보이는 것 같다. 그런데 마음은 우리만 급한 게 아닌가 보다. 다저스 선수들의 분위기가 이제까지와는 달라졌다.

‘뭐야? 너희들 다 이긴 거 같아?’

스윙도 빨리빨리 다음 타자가 들어오는 것도 빠르다.

요기 베라가 말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

‘우린 끈끈하기로 이름난 자이언츠라고. 쩝! 진짜 그런가?’

과거에는 그랬었지만, 지금의 팀컬러를 끈끈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역전승의 경험이 없는 건 아니지만, 두 시즌 간 우리 팀은 리드를 지키는 야구를 해왔다. 그게 되는 시기 승률이 가장 높았다.

‘연전승이란 게 주로 약자가 하는 거라서… 우리 같은 강팀이 별로 경험할 일이 없었다고.’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간절함이 없었던 다저스의 공격은 삼자범퇴로 쉽게 끝이 났다. 걸리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휘두르는 배트로 공략해서 무너트리기에는 체이스의 공이 만만하지 않다.

이제 9회 마지막 공격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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