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87화 (187/200)

187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중요한 건 아니다

털썩-

로저스가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얼굴을 수건으로 덮어 표정을 살필 수는 없었지만, 가끔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잘 추슬러야 해. 이건 누구도 도와줄 수가 없어.’

1회 두 개의 홈런 허용 후 이어진 이닝을 잘 막아내던 로저스가 5회 말 다시 투런 홈런을 허용해 점수 차가 벌어져 버렸다. 현재 4:2로 두 점 지고 있다. 5회 초 우리 공격에서 동점 홈런을 치며 기세를 올리자마자 벌어진 일이다.

“바꿀까?”

“그러지는 않을 것 같은데…‘

허용한 점수를 보면 투수 교체가 이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모두 홈런에 의한 실점이어서 정작 투구 수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리고 홈런을 제외하면 거의 안타나 출루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애매한 볼판정으로 허용한 볼넷 하나에 이어진 홈런이라…’

로저스가 저러는 게 열을 받아서인지 자괴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기서 투수를 바꿀 것 같지는 않다.

“오늘 왜 이렇게 홈런이 쏟아지는 거야?”

“글쎄, 그런 거 생각하면 뭐 하겠어, 이유야 있겠지만 지금 그게 중요하지는 않잖아.”

양 팀이 낸 6점이라는 점수가 모두 홈런으로 났다. 로저스가 한 게임에서 3개의 홈런을 맞은 것도 거의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었고 우리 팀이 2개의 홈런을 친 것도 좀 이상한 일이다. 물론 우리 팀의 경기 중에서 5회까지 홈런 두 개를 쳤던 경기가 드물지는 않지만, 그런 류의 경기와는 확연히 다르다. 현재 우리 팀의 안타 수 역시 2개다.

5회까지 17명의 타자가 나서 안타 2개 친 것을 타율로 환산하면 1할 1푼 7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건 우리 타선이 상대 투수에게 철저하게 눌리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구위를 가진 투수와 치르는 경기에서 홈런 2개는 거의 나오기 어렵다.

따악-

“이거 뭐야?”

우리 팀의 6회 초 공격이 9번 타자부터 시작되긴 하지만 상위타선으로 바로 연결되는 이닝이라 득점에 대한 기대가 조금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은 아니었다. 투 아웃 후 등장한 알버트가 다시 홈런을 터트렸다.

‘4:3. 이거 오늘 정말 이상한 날이네.’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이 안 되는 경기다.

***

“아웃.”

낫 아웃 상황이었다. 아무리 바운드 된 볼이라지만 포구를 못한다는 건 베그웰에게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역시 후속 동작이 좋았다. 재빠른 블로킹으로 원바운드된 공을 멈춰 세우고 바로 마스크를 벗고 공을 잡았다. 이어진 1루 송구로 어렵지 않게 타자 주자를 잡아냈다.

‘로저스 힘 떨어졌네.’

브레이킹 볼을 던졌지만 원바운드로 공을 떨어트릴 생각까지는 없었던 것 같은데 악력이 떨어져서 의도치 않게 그렇게 된 것 같다. 의도적인 원바운드 볼이었다면 베그웰이 못 잡았을 리가 없다.

“바꿔줘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그렇겠지. 감독이 나가려는 것 같은데…”

7회 투 아웃 상황까지 잘 버텨냈다. 이제는 진짜 교체해줘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 분투에 비해 결과가 따르지 못한 것 같아 좀 아쉽긴 하다.

6과 2/3이닝 5안타 1볼넷이면 선발투수로서 그렇게 나쁘지 않은 투구기록이다. 하지만 6실점이 문제다. 정말 일관성 있는 투수였다. 안타를 모두 홈런으로 맞았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로저스 개인적으로나 팀에게나 대단한 투구였던 것 같다. 그렇게 홈런을 맞고도 6이닝 이상을 던진 것도 대단하고 그 상태에서 지금까지 교체하지 않은 벤치의 뚝심도 대단하다 싶다.

“홈런 다섯 개? 너무 많은데 이거 한 게임 최다 피홈런쯤 되는 것 아니야?”

지금까지 어디에서든 한 게임에서 다섯 개의 홈런을 허용한 투수를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런 통계가 있긴 하나? 싶지만 워낙 이상한 기록도 수집되는 메이저리그니 혹시 하는 마음에서 소르카에서 물었다.

“그건 한 게임 6개야.”

설마 했는데 진짜 대답이 나왔다.

“뭐? 그런 기록이 정말 있어?”

“응, 몰랐어? 한 게임에 6홈런 맞은 투수는 꽤 많아. 9명인가 돼.”

생각보다 많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투수의 컨디션이 바닥일 때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그런 기록이 나올 때까지 마운드에 남겨두는 벤치가 있었다는 게 더 신기하다.

“브레이브스의 마이클 블레이젝이 그걸로 좀 유명한데 2017시즌 그는 내셔널스와의 경기에서 한 이닝에 홈런 5개를 맞았지. 심지어 거기에 4연타석 홈런이 포함되지. 그게 역대 한 이닝 최다 피홈런이야. 그날 그의 기록이 2와 1/3이닝을 던졌는데 7안타 8실점을 했어. 말했다시피 홈런은 6개였고.”

‘7안타 중 홈런 6개?’

투수에게는 악몽 같은 일이었을 것 같다.

“무슨 그런… 난 오늘 전엔 전혀 그 비슷한 일도 못 본 것 같은데 어떻게…”

“자주 나오는 일은 아니지. 그 블레이젝의 일도 마운드 높이를 낮춘 이후엔 처음이었을 거야.”

메이저리그의 원래 마운드 높이는 15인치였는데 타고투저 현상이 아주 심해져 1969년 10인치로 낮췄다고 알고 있다.

“아이러니한 건 이런 피홈런 기록이 아무 투수에게나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거야. 선발 중에서도 엘리트급에서 주로 나왔지. 신뢰가 떨어지는 투수는 이런 기록이 나오기 전에 강판될 거잖아. 그래서 팀에서 난관에 처하더라도 헤쳐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신뢰한 선수들이 초반 난조에 빠졌을 때 주로 만들어졌어.”

“그중에 내가 알만한 투수도 있어?”

평소에 잘 던져서 나오는 기록이라니 상당히 흥미가 생기는 이야기였다.

“콜은 알지 않아? 파이리츠와 양키즈에서 뛰었던…”

그를 모를 수가 없다. 파이어볼러로 유명했고 한때 메이저리그 투수 중 9년 3억 2천 400만 달러라는 역대 최고액 계약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알지. 물론 개인적으로 아는 건 아니고…”

“그런 그도 2022시즌 트윈스 경기에서 2와 1/3이닝 8피안타 2볼넷으로 7실점을 했던 적이 있었지. 홈런도 5개 맞고. 아마 1선발이 아니었으면 더 일찍 강판당했을 텐데 벤치에서 믿고 밀어붙이다 생긴 참사지. 그게 그의 유일한 5피홈런 경기야. 투수라면 그럴 수 있어.”

말하는 분위기가 지금 로저스에게 벌어진 일이 별거 아니라고 하고 싶은 것 같다. 별로 공감이 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상황이 벌어졌던 경기가 오늘만큼의 중요도가 있었을까?’

로저스가 원해서 생긴 일도 아니고 본인은 잘 던지고 싶었겠지만, 결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프로로서 오늘은 최악의 경기력이었다. 솔직한 심정은 그의 엉덩이라도 걷어 차버리고 싶다.

나도 예전에 3피홈런 경기의 경험은 좀 있다. 홈런 맞은 후의 기분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로저스가 내려왔다. 그는 더그아웃에서 조금 늘어진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표정을 풀지 않고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흐물흐물해져 있다.

지난겨울 로저스는 부단하게 노력했었다. 포스트시즌에서 붙여진 큰 게임에 약한 피처라는 인식을 떨쳐내고 싶어 했다. 그렇게 준비한 이번 시즌은 포스트시즌이 되기도 전에 이 사달이 났다.

성질은 났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겠냐란 생각이 들었다.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냥 말없이 다가가 등을 좀 두드려줬다. 로저스는 고개를 숙인 채 수건을 뒤집어쓰고 조용히 더그아웃을 떠났다.

‘하아!’

복잡한 기분이다.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긴 했지만, 그냥 잊어버리고 다음 경기 잘하면 된다고 말하기엔 오늘 이 경기가 너무 중요했다.

마운드엔 애덤이 올라갔다. 전반기 이후 연투를 피하고 8회 한 이닝만 책임지게 하는 것으로 투수 운용을 변경하면서 다시 살아나고 있었는데 오늘은 벤치도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7회 2사 후긴 하지만 애덤을 냈다는 건 아직 벤치에서 게임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남은 공격 두 번에 6:3은 많이 갑갑한 스코어다.

‘3안타 3홈런과 5홈런의 대결이라… 이것 참!’

우리 불펜이 남은 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돌아오는 8회 우리 타순이 7번 타자부터 시작된다. 9회 상위 타순에게 희망을 품어보기엔 3점이라는 점수 차이가 너무 커 보였다. 생각할수록 암담하다.

‘결국 여기까지인가!’

소르카도 어느 순간부터 말이 없어졌다.

***

‘응? 여기서 대타? 뭐하자는 거야?’

8회 우리 공격이 시작되자 아론 커크가 대타로 나섰다. 7번 타자인 크로포드에 비해 타격 능력이 별로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진 않지만, 백번 양보해서 거기까지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7번 크로포드는 2루수다. 커크는 내가 알기론 내야 수비를 볼 수 없다.

‘수비는 어쩌자는 거지?’

내야 수비가 약해지는 것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포지션 메우는 것 자체가 잘 안될 것 같다. 지금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오늘 지명타자로 출전한 헌트를 2루수로 돌리는 건데 그렇게 해도 문제가 생기긴 마찬가지다.

헌트가 2루수를 맡을 수는 있다. 한때 잘하기도 했었고 오랫동안 해오던 포지션이었으니 임시로 잠시 메우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지명타자 자리는 현재 뛰고 있는 선수가 이어받을 수 없다. 그냥 소멸된다. 비는 타순은 투수가 메워야 한다. 커크의 자리도 만들어야 하는 문제도 있다.

‘지금 대타인 커크를 좌익수 크리스 자리로 보내면 1번 타순에 투수가… 아니, 그게 아닌가? 커크가 살아나가면 1번 타순 투수 자리에 다시 대타를… 그럼 누구를? 크리스보다 나은 타자가 있나? 그럼 투수는 누구?’

무엇인가 굉장히 복잡하다. 만약 이번 공격이 삼자범퇴로 끝나게 되면 아주 많이 꼬이게 될 것 같다.

“이것 좀 이상하지 않아?”

“어쩌겠어. 정상적인 것 같지 않지만, 벤치도 이대로 게임이 넘어가는 걸 보고 있을 수는 없었겠지.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어?”

소르카의 말이 옳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합리적 판단과 감정이 항상 같을 수는 없다.

‘하아! 어쩌다 게임이 이 지경으로… 몰라! 나중 일은 벤치가 알아서 하겠지. 일단 커크가 살아나가는 수밖에 없어.’

틱-

초구에 기습적인 세이프티 번트가 나왔다.

‘아! 미국이니까 드래그 번트(drag bunt)지.’

“달려!”

그동안 커크가 번트를 댄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무엇인가 준비가 있긴 있었나 보다. 번트가 생각보다 그리 쉬운 기술이 아니다. 그는 확장 로스터 시기에 올라와 그동안 몇 타석 나오지도 않았다. 즉 데이터가 거의 없는 상태다. 그래서였는지 다저스도 정상 수비 위치를 지키다 허를 찔렸다.

‘아! 살았네. 에구, 어렵다 어려워!’

뛰는 선수가 가장 힘들겠지만 지켜보는 나도 정말 숨이 넘어갈 것 같다. 그래도 무엇인가 희망이 조금은 생긴 것 같다.

‘그래 일단 한 점부터지. 차근차근 쫓아가다 보면… 하아! 지금 8회네. 그래도 일단 한 점 따라붙으면 9회에 분위기가 달라질 수도 있잖아.’

현자타임이 시작되려는 걸 억지로 누르고 경기에만 집중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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