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급할수록 돌아가라
“헉!”
소스라치게 놀랐다. 소르카가 가볍게 내 왼쪽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몸이 안 좋아?”
경기 시작을 기다리다 더그아웃에서 잠깐 졸았던 것 같다.
‘이런 실수를…’
한 이틀간 잠을 제대로 못 자긴 했었다. 그래도 지금 이런 게 다행이다. 아직 중계가 시작되기 전이라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지는 않은데 경기 중에 이랬다면 각종 매체에 좋은 가십거리를 제공했을 것 같다.
다저스와의 정규시즌 마지막 시리즈 1차전은 1:0의 신승(辛勝). 2차전은 소르카의 7이닝 1실점의 역투에 힘입어 4:3으로 결국 초반부터 이어진 리드를 지켜냈다.
그제는 몸은 굉장히 피곤한데 막상 잠자리에 들었을 때 눈이 말똥말똥해지는 기묘한 경험을 했었다. 결국 거의 날밤을 새우고 아침을 맞이했다.
‘어제는 불면의 후유증에 시달렸지. 그래도 어떻게 경기를 안 보겠어.’
몸이 힘든 게 낫지 마음이 힘들면 더 견디기 힘들다. 내가 던질 때보다 더 긴장해서 경기를 지켜봤다. 경기가 끝났을 땐 흥분으로 몸을 못 가눌 지경이었다. 역시 불면의 밤은 계속되었다.
“아! 그런 건 아니고 한 이틀 정도 밤에 잠이 안 오더라고. 몸이 크게 불편한 건 아니야. 긴장 때문이겠지. 오늘 경기만 이기면 좀 잘 수 있을 것 같은데…”
“너도 그랬어? 나도 어젯밤에 가슴이 두근거려서 잠을 좀 설치긴 했지. 경기 중엔 괜찮더니 누우니까 계속 경기 장면이 생각나서…”
소르카와 같은 큰 경기 경험이 많은 선수도 이럴 땐 별수 없다 싶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로저스는 봤어?”
“아니, 이 사람 저 사람 불펜에 기웃거리면 불편해할 것 같아서 안 가봤어. 걔도 빅리그 4년 차잖아. 중요한 경기도 좀 치러봤는데 내버려 두면 알아서 잘할 거야.”
사실이다. 재작년부터 올해까지 포스트 시즌 진출만 3시즌째… 이틀간 2승을 하면서 지구 우승을 못하더라도 와일드카드 1위는 확정지었다. 로저스는 지난 시즌 디비전 시리즈부터 챔피언십 시리즈, 월드시리즈까지 빠지지 않고 3선발로 활약했었다. 그래서 좀 불안하다.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로저스는 그저 호투만 했었다. 잘 던지기는 했지만 디비전 시리즈 한 경기를 제외하면 제대로 이긴 경기가 없었다. 승운이 없었다고 하기엔 상황이 너무 반복되었다.
‘별생각을 다 하네. 큰 경기에서 그 정도 던져준 것만 해도 잘한 건데… 경기가 그렇게 된 건 타자들이 잘 못 쳐서 그런 거지 그가 잘 못 던져 그랬던 건 아니지.’
물론 나와 소르카는 비슷한 상황에서 결국 경기를 이겨내긴 했었다. 로저스는 그렇지 못했고. 소르카와 로저스의 평균자책은 소르카가 조금 낮긴 하지만 큰 차이가 없다. 비슷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이긴 경기를 만들어내는 투수와 잘 던지지만 결국 아슬아슬한 패배를 당하는 투수가 소르카와 로저스의 현 위치를 만들어냈다.
로저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동계훈련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봤었다. 지금 그가 느낄 어마어마한 부담감을 너무 잘 알기에 그를 살피러 가는 것이 더 어려웠다.
“나도 그래서 가보지 않았는데 너도 그랬다니… 그것참!”
연승으로 선수단의 기세는 올라있고 고비를 두 번이나 넘겨 자신감과 분위기는 최상인데 왜 이렇게 불안한지 모르겠다.
‘쿳, 대범한 척하는 소심한 투수들의 대화라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건가?’
어쨌든 이틀 연속 1점 차 승리를 만들어냈다. 역전승이 아니라 더 마음에 든다. 한창 좋았던 시절 나왔던 우리의 승리공식대로 지켜서 만든 승리였다. 이건 우리 팀컬러가 지난 시절 무적을 자랑하던 시기로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라 생각하고 싶다.
“플레이 볼.”
우리 선공을 시작되었다.
와일드카드 시리즈로부터 시작해 월드시리즈를 우승한 전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소수의 경우다. 포스트 시즌에 들어가기 전 3일의 여유시간을 갖는 팀과 그런 것 없이 계속 달려야 팀 중 어느 쪽이 유리할지는 너무 확연해 생각하고 말고가 없다. 올 시즌 우리 팀은 후반기에 상당한 무리를 했다. 팀 정비를 위해서라도 3일의 휴식은 꼭 필요했다.
‘이제 다 왔어. 오늘 한 게임만 이기자고.’
물론 이기고 나면 다른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 생각밖에 없다.
“오늘은 이겨야 꼭 이겨야 돼!”
경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는데 누군가 벌써부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이 경기의 중요성 때문인지 메이저리그 최다 수용 인원을 자랑하는 다저 스타디움의 관중석은 꽉 들어차 있다.
“초반부터 난리네.”
관중의 마음은 이해가 간다. 이틀째 거듭된 1점 차 패배에 속이 많이 상했을 것 같다. 오죽 답답하면 저럴까. 응원하는 팀이 다를 뿐 나 역시 관중과 같은 마음이다
“대낮부터 맥주가 과했나 보지.”
소르카가 살짝 웃으며 농담조로 말을 받았다.
“뭐! 맨정신으로 경기 보기가 어렵지 않겠어?”
1번 타자 크리스는 신중히 투구를 잘 지켜보는 듯하더니 4구째 배트를 휘둘러 외야플라이 아웃. 2번 알버트도 비슷한 경로로 아웃카운트를 늘이고 말았다.
다저 스타디움이 대표적 투수 친화구장으로 알려지게 된 건 구장 크기 때문이 아니라 고지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밤이 되면 공기가 식어 하강기류를 형성한다. 습도도 높다. 이 영향으로 외야로 뻗는 타구가 무거워진 공기를 뚫기가 어렵게 된다. 홈런은 줄어들고 외야플라이는 증가한다. 그런데 이건 야간경기에만 해당되는 일이다. 오늘은 낮 경기다.
“오늘 해밀턴의 공이 괜찮은가 보지?”
해밀턴은 다저스의 3선발이다. 3점대 중반의 평균자책을 가지고 있는 우리 팀의 존슨과 비슷한 유형의 투수다. 리그의 선발투수들 중 손가락에 꼽히는 평균구속을 가진 투수다. 기복이 좀 있다는 약점은 있지만 맞아도 뻗지 않는다는 건 오늘은 그 약점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두 타자 상대한 걸로 판단하기는 좀 이르지 않겠어? 공이야 늘 좋았지.”
따악-
맑고 청명한 소리다. 투수일 때는 가장 듣기 싫은 소리. 고개가 휙 돌아갔다. 소르카에게 답할 틈이 없었다. 베그웰의 초구 공략 결과물은 바로 나타났다. 라인 드라이브성 타구가 중앙 펜스를 아주 살짝 넘어간다.
“하핫. 이게 넘어가네.”
홈에서 가장 먼 쪽 펜스이기는 하지만 메이저리그 구장 중 가장 짧다. 중앙 펜스의 거리가 400피트(약 122m)가 안 되는 유일한 구장이다. 펜스도 그리 높지 않다.
“저기가 395피트지? 이걸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는 거 맞지?”
“글쎄, 운이라고 하기엔 타구질이 너무 좋았잖아.”
물론 어디에서든 무조건 2루타는 되었을 타구다. 하지만 홈런은 어림없다. 낮 경기의 득을 본 것 같다.
2000년대 이후를 기준으로 하면 다저 스타디움은 거의 메이저리그 평균에 해당하는 홈런이 나온 구장이다. 기본적으로 야간경기에서 홈런이 억제되는 구장이 그렇다는 건 낮 경기에서는 평균보다 훨씬 많은 홈런이 나온다는 말이 된다. 실제로 낮 경기의 기류 형성은 야간과 반대로 이루어져 타구가 더 멀리 날아간다는 조사가 있었다.
어쨌든 이렇게 1회부터 선취점을 얻은 건 시리즈 중 처음이다. 더군다나 홈런에 대한 기대치가 높지 않은 베그웰이라니 뜻밖이라서 기쁨이 배가되는 것 같다.
“오늘 잘 풀리려나 보네.”
“그렇지.”
들뜬 마음을 담아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베그웰의 환영 세리머니에 참여했다. 베그웰의 포수 장비 착용을 도와주는 서비스까지 베풀었다. 오늘의 그는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공격은 계속되지 못하고 곧 끝났지만, 오늘 경기에 대한 걱정이 너무 심했던 것 같아 쑥스럽다.
따악-
“헉!”
선두타자에게 홈런을 맞았을 때는 그러려니 했다. 동점이 된 건 아쉬웠지만 모든 공을 투수가 제어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2번과 3번 타자를 삼진과 범타로 잘 처리했기에 안심하는 마음이 들었다.
다저스의 4번 레오날드가 그동안의 부진에 대한 분풀이를 하듯 대형홈런을 좌측 펜스 상단에 꽂아버렸다. 간단하게 역전당했다. 이번 시리즈 중 경기 중 역전을 허용한 건 처음이다.
‘하아! 어째 좀 쉽게 간다 싶더니… 오늘 쉽지 않겠네.’
“우아아! 그래 이거지. 잘했어.”
귀에 익은 목소리다. 아까 관중석의 그 미친놈이다.
‘재수가 없으려니 별 인간이 다…’
로저스가 긴장을 너무 많이 했던 탓인지 순간 긴장이 좀 풀어져 생긴 상황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어안이 벙벙하다. 마운드로 급히 달려나가는 감독의 뒷모습이 눈에 아프게 들어온다.
큰 승부가 결정되는 건 대개 작은 실수에서 시작한다. 문제는 그게 실수인지 평범한 상황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 벌어졌는데 우연히 상황이 겹쳐진 건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코스 공략을 달리한다든지 해서 타자 공략 방법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글쎄, 제구 좋은 넌 그게 쉽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로저스는 다르다고. 아니, 대부분 투수들이 그래. 경험적으로도 즉흥적으로 바꿔 투구하는 건 좋은 쪽보다는 나쁘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 영점을 잡아놓은 밸런스가 흔들릴 수도 있다고. 오히려 실투 가능성이 높아. 일단은 시간을 좀 가지고 하던 대로 밀어붙이는 게 맞을 거야. 이 이닝은 끝내놓고…”
잠시 뒤 감독이 마운드에서 더그아웃으로 복귀했다. 어떤 내용의 이야기가 오갔는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그냥 지켜봐야 할 때다.
로저스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타자가 타격 자세를 잡자 주저함 없이 투구가 이루어졌다.
“스트라이크.”
로저스의 선택은 높은 곳에서 뚝 떨어져 존 안으로 들어가는 느린 커브였다. 보통 루키는 위기상황에서 뒤로 물러나지만, 경험이 쌓여갈수록 정면 돌파를 시도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패스트볼을 존 안으로 무작정 밀어 넣는 것은 바보짓이다. 커브는 훌륭한 선택이었다. 이 장면에서 커브는 기존 패턴을 파괴하는 것과 다름없다.
“정면 돌파를 브레이킹 볼로 하려고 하네.”
“그게 절충안이었겠지.”
어떤 직종이든 위기상황에서 원래 실력이 나온다.
로저스는 파워 피처형의 선수답지 않게 노련하게 브레이킹 볼을 이용해서 볼카운트를 조절했다.
투 볼 투 스트라이크. 드디어 투수와 타자의 의지가 부딪쳐야 할 장면이 만들어졌다. 이제까지 다저스의 5번 타자를 상대하며 5구를 던지는 동안 로저스는 패스트볼을 하나도 던지지 않았다.
“커브, 슬라이더 조합이었지. 여기서도 다시 변화구를 던질까?”
“타자가 느린 구속에 익숙해져 있을 테니까. 위닝샷은 패스트볼이 나올 것 같은데…”
틱-
로저스는 다시 느린 커브로 돌아갔다. 존에 넣지는 않은 것 같다. 타자는 패스트볼을 던질 것이라 예측했는지 완전히 타이밍을 빼앗겼다. 억지로 맞춰낸 공이 내야를 구른다.
“아웃.”
1회는 잘 넘겨냈다.
“이제 게임 시작이야.. 타자들이 기본 점수는 내주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1점 차이쯤은 아무것도 아니지.”